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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아 집행위원장, 조혜영·배주연 프로그래머가 말하는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이주현 사진 최성열 2018-05-31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좋은 영화 이미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다

배주연 프로그래머, 김선아 집행위원장, 조혜영 프로그래머(왼쪽부터).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올해로 20회를 맞았다. 스무번의 여성영화제가 열리는 동안 한국 사회에서 여성(영화인)으로 살아가는 일이 퍽 행복한 일이 되는 현실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최근 2~3년 사이 페미니즘은 우리 사회의 중요한 이슈가 되었고 그와 더불어 영영페미니스트들이 등장해 각자의 위치에서 또렷한 목소리를 내는 상황을 목격할 수 있었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도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이야기했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여성은 좋은 영화를 만든다!’ ‘여성들이여 스크린을 점령하라!’ 김선아 집행위원장은 “20회 영화제 역시 지금까지 내건 슬로건을 관철시키는 과정에 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제20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5월 31일부터 6월 7일까지 서울 메가박스 신촌에서 열린다. 영화제 개막을 앞두고 김선아 집행위원장과 조혜영·배주연 프로그래머를 만났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의 인연부터 20회 영화제에서 주목해야 할 쟁점과 작품까지 두루 물었다.

-올해로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20주년을 맞았다. 어떤 마음으로 20회 영화제를 준비했나.

=김선아_ 우선 영원히 늙지 않는 영화제가 되고 싶다. 20주년이라고 해서 회고하고 회상에 젖기보다 계속해서 앞을 내다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영원히 신선하고 싶고 시대에 어필할 수 있는 영화제가 됐으면 하는 마음이다.

=배주연_ 운 좋게 20주년을 맞은 올해 새로 프로그래머로 합류했다. 기쁘기도 하면서 20주년이라는 중차대한 때에 들어와 책임감도 더 든다.

=조혜영_ 20회 영화제를 준비하면서, 이 시간성을 서로 다른 세대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같이 경험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1회 영화제부터 참여한 분들은 ‘우리가 이렇게 영화제를 잘 키워왔구나’ 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20주년을 즐기고 축하했으면 하고, 최근 2∼3년 사이 부상한 영영페미니스트와 젊은 여성 관객은 여성영화 혹은 여성주의 영화가 이만큼의 역사를 지니고 있고, 이런 역사 속에서 커왔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했으면 좋겠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첫 인연을 맺은 시기와 계기가 다 다른데, 각자 어떻게 여성영화제에 첫발을 들이게 됐나.

김선아_ 1회 때 포럼 코디네이터로 일했다. 그땐 영화제 포럼 코디네이터가 뭘 하는지도 몰랐다. 대학원에서 영화 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고 당시 프로그래머였던 김소영 선생님이 영화제에 데리고 들어왔다. 1회 영화제 땐 관객 줄 세운 기억밖에 없다. (웃음) 10회 때부터 수석프로그래머가 됐고 17회부터 집행위원장으로 일하고 있다. 내 인생의 중요한 한 부분을 여성영화제가 차지하고 있다.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조혜영_ 김선아 위원장님이 1회 때 관객 줄 세웠을 때 나는 그 줄에 서 있던 관객이었다. (웃음) 대학교 영화 동아리 선배들과 워쇼스키 자매의 <바운드>(1996)를 보러 갔던 게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대한 첫 기억이다. 이후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제에 결합했다. 대학원 석사 졸업하고 ‘이제 뭐하지’ 할 때 김선아 위원장님이 ‘여기 와서 일해라’ 해서 포럼 코디네이터로 일하다가 이후 영화제를 나와서 연분홍치마에서 김일란 감독과 <마마상>(공동연출, 2005) <3×FTM>(프로듀서, 2008)을 만들었고 그 영화들이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됐다. 그러다 대학원 박사 졸업하고 또 ‘이제 뭐하나’ 할 때 김선아 위원장님이 다시 불러줘서 합류했다. 그렇게 17회부터 4년째 프로그래머를 하고 있다.

배주연_ 조혜영 프로그래머가 포럼 코디네이터로 일하던 시절 그 포럼을 보러 갔다. (웃음)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램팀과 KT&G 상상마당 프로그래머를 거쳐,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아시아단편경쟁 예선 심사를 하면서 본격적으로 여성영화제 일을 하게 됐다. 그때 심사로 불러준 게 조혜영 프로그래머였다.

“위기는 늘 예산 문제”

-20회까지 오면서 내외적으로 힘든 시기도 여러 번 통과했을 것 같다.

김선아_ 위기는 늘 예산 문제에서 비롯됐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예산이 국내 6대 영화제 중 제일 적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던 때 서울시 예산이 깎였고 그때부터 본격적인 고난의 행군이 시작됐다. 협찬사의 경우도, 여성영화제 안의 퀴어레인보우 섹션을 없애야 협찬을 해주겠다거나, 자기네 기업을 비판하는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 조건으로 협찬을 해주겠다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타협하지 않고 버텼다. 음, 좀 멋진데. (웃음)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서울을 대표하는 영화제라고 하지만 사실 지난 10년 동안 서울시의 문화정책, 특히 영상문화정책이나 비전에 동의하기 힘든 점들이 있다. 영화를 단순히 부가가치 산업으로만 접근하는 발상, 영화제에 대한 몰이해가 우리를 힘들게 했다. 여성영화제보다 1년 앞서 시작한 부산국제영화제의 예산은 현재 여성영화제보다 10배 정도 많다. 20년이 지나고 보니 격차가 그만큼 커졌다. 여성영화제에 대한 선입견도 여전하다. 완성도나 예술성은 조금 떨어지지만 여성 이슈를 다뤘다는 의미가 있으니까, 정치적으로 올바르니까 봐줘야 한다는 생각과 의무감을 가진다고 할까. 오죽하면 18회 때 ‘여성은 좋은 영화를 만든다’라는 슬로건을 만들었겠나.

조혜영_ 여성영화 혹은 여성영화제는 작아도 된다, 혹은 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부산국제영화제와 서울국제여성영화제를 비교하면 다들 아니 여성영화제를 왜 부산과 비교해, 혹은 왜 전주하고 비교해, 그런 반응을 보인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나 제천국제음악영화제도 모든 장르를 다 다루는 게 아닌데 규모는 여성영화제보다 크다. 여성영화제는 여성영화를 상영하기 때문에 마치 절반만 지원해도 된다는 인식을 한다. 오히려 여성영화는 독립영화부터 상업영화까지 가로지르기 때문에 더 큰 범주에서 얘기할 수 있는 여지가 많다.

김선아_ 전체를 포괄할 수 없을 거란 선입견이 있다. 그래서 전체의 한 부분, 메이저가 아닌 한 부분으로 생각하는 거고.

배주연_ 남자 사람 친구들 중에는 여성영화제가 자기들을 위한 영화제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또 왜 여성영화제는 여성감독들의 영화만 상영하느냐, 그건 역차별이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김선아_ 우리 상영작의 10%는 남성감독의 영화다. 10%라는 수치는 상업영화 안에서 여성감독 작품의 비중이다. 여성감독들이 만든 상업영화의 비중이 10% 이상으로 늘어나면 여성영화제에서 상영되는 남성감독들의 영화도 늘 것이다.

배주연_ 다시 말해 여성감독이 10% 안에 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 토로하고 보여주는 거다. 여성영화제가 그런 고민을 관객은 물론 영화인들에게 던지는 효과도 있는 것 같다. 극장에서 남자들만 나오는 남성 중심적인 영화를 보는 것엔 아무런 불편함을 못 느끼면서 여성영화제에서 영화를 볼 땐 왜 여자주인공만 나오고 여자들의 이야기만 하냐고 그런다.

김선아_ 어쨌든 힘든 시기를 잘 넘길 수 있었던 건 스탭들 덕이 컸다. 스탭들의 희생과 헌신이 없었으면 20년 동안 영화제가 이어지지 못했을 거다. 영화제 개막식에서 얼굴 비추는 윗선들이 일을 잘해서가 아니라, 영화제에 처음 참여한 젊은 스탭들, 다른 영화제에선 3명이 일할 몫을 혼자서 커버하는 팀장급 스탭들이 버텨줬기 때문에 20년간 영화제가 지속될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려 그들에게 꼭 고맙다고, 미안하다고 전하고 싶다. (웃음)

기존 판에 들어가는 대신 새 판을 짠다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라고 말하는 건 여전히 어떤 도전을 감수하는 고백이 되곤 하는데, 페미니즘 이슈가 대중적이지 않았던 10년 전, 20년 전 여성주의 영화학자로 살아가는 건 얼마나 험난했는지 궁금하다.

배주연_ 이 질문을 받으니 우리가 되게 나이 든 사람 같다. (웃음)

김선아_ 박사논문에서 마지막으로 분석한 영화가 <올드보이>(2003)였는데, 그걸 마지막으로 이제 한국영화를 그만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영화의 변하지 않는 지점들에 질렸던 것 같다. 그게 2006년쯤이었고, 여전히 여성 친화적이지 않은 한국영화에 흥미를 못 느낀다. 영화비평에서도, 시네 페미니스트의 시각이 다른 시각과 충돌하고 싸우면서 다시 업그레이드돼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던 것 같다. 페미니스트 영화학자로서의 자의식은 늘 있었지만,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김기덕 영화가 어쩌고 저쩌고 얘기하는 것도 10년 전에 이미 질렸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아예 내가 판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바뀌지도 않는 기존의 판에 들어가서 싸우느니 여성들이 편하고 재밌게 일할 수 있는 판을 차라리 내가 만드는 게 낫겠다 싶더라. (웃음)

배주연_ 15년쯤 전인가, 페미니스트 영화학자가 진행하는 관객과의 대화(GV)에 갔을 때 일이 생각난다. 한 관객이 여성 혐오적 발언의 질문을 건넸다. 사람 많은 극장에서 싸울 수도 없고 과연 저 혐오 발언에 어떻게 답할까 궁금했다. 그런데 그 발언을 무시하고 넘어가더라. 내 얘기를 들을 자세가 되어 있지 않으면 내 얘기를 듣지 말라는 태도를 취한 거였다. 그게 방금 김선아 위원장님이 말한 내 판을 내가 만들겠다는 이야기와도 닿아 있다고 본다. 대학 때 여성주의 세미나를 하고 여성주의자가 되려고 했던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면 여성주의자가 아닌 사람들을 설득하고 내 이야기를 듣게 할까 고민하던 시기여서 그때의 일이 내겐 신선하게 느껴졌다.

조혜영_ 페미니즘의 관점에서 이건 여성 혐오다, 이건 남성 중심적 사고다라고 비판하는 것도 이제 식상하다. 지긋지긋하다. (웃음) 이번 영화제 쟁점토크 중, 유튜브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유명 미디어 비평가 아니타 사키시안의 특별강연 제목도 ‘이젠 신물 나: 온라인 괴롭힘의 대가’이다. 이제는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얘기하고 싶고, 내가 매혹된 것, 내가 보고 싶은 것들을 얘기하고 싶다. 17회 때부터 김선아 위원장님이랑 그런 고민을 많이 했다. 우연인지 시대의 요구인지 모르겠지만 17회 영화제를 준비하던 그즈음 한창 온라인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해시태그 운동이 일었다. 반여성주의자들과 싸우고 비판하는 것도 맞고 다 좋지만 젊은 페미니스트들에게 우리가 좋은 세계를 만들 수 있다는 걸, 좋은 영화 이미지가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생각으로 지난 4년간 여성영화제의 방향성을 만들어갔다.

-20주년을 맞은 올해 관객에게 던지고 싶은 질문이나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는 무엇인가.

김선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겸 수석프로그래머

김선아_ 20년 동안 세 가지 슬로건을 만들었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보자’, ‘여성은 좋은 영화를 만든다’, ‘여성들이여 스크린을 점령하라’. 이 세 가지 슬로건이 영화제의 방향성과 역할을 함축하고 있다. 여성의 눈으로 세계를 봤더니 좋은 영화를 만들게 됐고 그 좋은 영화가 결국 스크린을 점령하더라. (웃음) 그걸 관철시키기 위한 과정에 20회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20년 동안 여성감독의 작품 수가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아니고, 선입견 없이 투자를 받는 상황이 된 것도 아니다. 영화과에는 여학생과 남학생의 비율이 5:5이지만 개봉작을 보면 남성감독과 여성감독의 작품 비율이 9:1이다. 현실은 변하지 않았고 우리는 그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회인 올해도 마찬가지다. 국제컨퍼런스 ‘영화산업 성평등을 위한 정책과 전략들’을 개최하고, 더불어 비평의 언어가 너무 말라버린 것 같아 새로운 언어를 발명할 수 있길 기대하며 ‘필름 페미니즘의 새로운 도전’을 주제로 하는 국제 컨퍼런스를 준비했다. 국제 컨퍼런스를 통해서 말과 이미지 그리고 그것을 정책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전방위적인 프레임을 제시하려고 한다.

조혜영_ 10주년 때도 세계의 영화학자들을 불러서 시네 페미니즘과 관련한 컨퍼런스를 열었는데, 10년 만에 다시 비슷한 방식과 주제로 국제컨퍼런스를 열게 됐다. 세계적인 영화학자 로라 마크스가 기조연설을 한다. 여성주의적 영화비평의 흐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성평등 영화정책은 사람들이 ‘그게 뭐야?’ 하던 시절부터, 아무도 성평등 영화정책에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4년 전부터 꾸준히 얘기해왔다. 17회 때 스웨덴 여성영화 특별전을 마련하면서 스웨덴의 성평등 영화정책을 이끌었던 영화진흥위원장 안나 세르너를 초청해 포럼을 열었다. 안나 세르너는 공공기금으로 영화제작을 지원할 때 여성과 남성의 지원 비율을 5:5로 하는 정책을 추진했고, 그 모델이 성공을 거뒀다. 스웨덴에서 좋은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스웨덴 여성감독들이 세계 영화제에서 수상하기 시작했다. 최근엔 영국, 호주, 프랑스 등에서도 스웨덴 모델을 실천하고 있다. 이런 성평등 영화정책의 필요성을 올해도 국제 컨퍼런스를 통해 이야기하려 한다.

“장편경쟁 섹션 신설은 영화제의 오랜 꿈이었다”

-올해 장편경쟁(국제장편경쟁/한국장편경쟁) 섹션을 신설한 것도 눈에 띈다.

김선아_ 장편경쟁 섹션 신설은 영화제의 오랜 꿈이었다. 지금까지는 10대 여성감독의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경쟁부문 ‘아이틴즈’와 아시아 여성감독을 육성하기 위한 ‘아시아단편경쟁’ 그리고 제작지원 프로그램 ‘피치&캐치’가 있었다. 여성감독들의 영화가 더 많이 제작되고 상영되고 공유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기 위해서는 장평경쟁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올해 영화제 예산이 증액되면서 꿈을 이루게 됐다.

배주연_ 한국장편경쟁 프로그래밍을 하면서 아쉬웠던 건 다큐멘터리에 비해 극영화를 소개하기 힘들었다는 점이다. 극영화의 경우 워낙 만들어지는 편수도 적고, 여성감독에게 주어지는 기회는 더 적고, 그나마 만들어진 영화도 개봉이나 배급 시스템을 고려하다보니 영화제에서의 프리미어 상영이 힘든 경우가 있었다. 사실 만들어지는 영화 편수가 많으면 문제될 일이 아닌데 제작 편수가 적기 때문에 그 시스템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화가 많지 않은 측면도 있다.

-상영작 중 페미니즘 입문용으로 한편의 영화를 소개한다면.

배주연_ <밤쉘>은 고전 할리우드 시기의 배우 헤디 라머에 관한 다큐멘터리다. 헤디 라머는 유명한 배우이자 발명가였고 이민자였다. 예쁜 여자가 무슨 발명이냐는 편견도 받았고 결혼을 6번 하면서 스캔들에도 휘말렸고 이민자 출신 배우로서 할리우드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이용당하기도 했지만, 헤디 라머는 언제나 당당하고 똑똑하게 삶을 개척했다. 수잔 서랜던이 제작한 영화이고, 재밌게 볼 수 있을 거다.

김선아_ 미국의 두 번째 여성 대법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삶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RBG>도 추천하고 싶고, 시네 페미니스트들에겐 <>이란 영화를 소개하고 싶다. 아르헨티나의 여성감독 루크레시아 마르텔의 2000년 데뷔작이다. 제5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을 받으면서 아르헨티나영화의 현재를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사실 영화를 보면 정말 당혹스럽다. 원주민과 부르주아 계급의 문제, 아나키한 상태의 모가장 사회에 대한 이야기 등 너무 많은 얘기가 담겨 있다. 플롯을 요약할 수 없는 영화 그래서 새로운 영화 그래서 은곰상을 탄 것 같은 영화다. (웃음) 꼭 페미니스트가 아니더라도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사람들이 봤으면 한다.

조혜영_ 개막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은 일생을 페미니스트로 살아왔고 90대가 되어서도 여전히 훌륭한 영화작가로 활동하고 있는 아녜스 바르다의 인생을 요약해서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는 젊은 남성 사진작가 JR과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는데, 오히려 아녜스 바르다가 얼마나 여성의 이미지를 사랑하고 잘 다루는 작가인지를 보여주는 지점도 있다.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영화, 보고 있으면 너무 행복해지는 영화다.

여성주의 비평의 언어를 확장해간다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 있는 동안 시도해보고 싶은 것들, 실현시키고 싶은 프로젝트는 무엇인가.

조혜영_ 기본적으로 집행위원장과 프로그래머가 이렇게 긴밀하게 일하는 곳이 없다. 김선아 집행위원장님 덕에 적은 예산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걸 최대한 해왔던 것 같다. 그럼에도 만약 예산이 있다면, 매체를 넓혀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최근 미술쪽에서 흥미로운 비디오 아트들이 계속 나오고 있다. 예전에 실험영화로 얘기되던 장르가 이제는 미술쪽으로 넘어갔다고 보는데, 트랜스미디어의 경향을 포괄할 수 있는 전시, 비디오 설치 같은 걸 해보고 싶다.

배주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배주연_ 앞에서도 나온 이야기지만 여성주의 비평의 언어를 확장하는게 우리의 과제일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여성영화제를 통해 만들어진 네트워크를 통해서 여성주의 영화비평지를 만든다거나 비평의 언어가 더 풍성해질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으면 좋겠다.

김선아_ 욕심은 많다. 다른 국제 영화제처럼 전용 상영관이 있으면 영화제가 더 안정화될 텐데 하는 생각도 하고. 이 극장, 저 극장 옮겨다니며 영화제를 준비한 게 벌써 20년이다. 언제든 여성영화를 볼 수 있는 거점으로서의 전용 상영관을 만들어서, 영화제 상영작도 틀고 평상시엔 벡델 테스트를 통과한 영화를 상영해도 좋지 않을까. 한편으론 사우스 바이 사우스 웨스트(SXSW, 매년 봄 미국 텍사스주에서 열리는 음악, 영화, 정보기술 등을 아우르는 축제)까지는 아니어도 영화, 비디오게임, 관광, VR 등 여러 매체와 미디어를 아우르는 방식, 빅 블러(Big Blur, 산업의 경계가 흐릿해지는 현상)에 대한 고민도 하고 있다. 아무튼 이루고 싶은 건 정말 많다. (웃음)

김선아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집행위원장 겸 수석프로그래머 추천작

❶ <씨네필>. “<씨네21>이란 매체 적합성을 따져 고른 영화다. 매일 영화관에 가서 예술영화를 보는 할머니 세분의 이야기다. 영화와 함께 한평생 늙어가는 게 뭔지 이 영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❷ <마드모아젤 파라디스의 피아노>. “눈먼 여성 천재 피아니스트가 사랑에 빠지면서 시력을 회복하지만 음악적 재능을 잃어버리는 이야기다. 자신의 재능이 타자에 의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망가질 때의 갈등을 면도날처럼 예리하게 보여준다.”

❸ <텅 빈 여자>. “외도를 한 남편으로 인해 에이즈에 걸린 여성의 이야기다. 사랑했던 사람에게 당한 육체적 배신이 어떤 건지 그 복잡한 심정을 잘 표현한 성숙한 관점의 영화다.”

❹ <태양의 한방울>. “시의성이 뛰어난 작품이고, 제2의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감독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1974)라고도 할 수 있는 영화다.”

조혜영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추천작

❶ <쉐이크다운>. “흑인 레즈비언 감독이 만든 LA의 흑인 레즈비언 전용 스트립바에 대한 다큐멘터리다. 성노동자이면서 흑인들의 하위문화를 새롭게 창조한 기획자였던 여성들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볼 수 있다. 감독이 내부자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인터뷰 영상과 과거의 비디오 푸티지를 힙하게 활용한다. 참고로 레일라 와인로브 감독은 뉴욕의 하이엔드 스트리트 브랜드 후드 바이 에어의 CEO다.”

❷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되기>. “한편의 드라마로서 정말 재밌다. 스웨덴의 동화작가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이 <내 이름 삐삐 롱스타킹> 같은 작품을 만들 수 있었던 배경에 페미니즘이 자리하고 있었다는 걸 확인할 수 있는 영화다.”

❸ <버진 머신>. “올해 독일의 실험영화 감독 모니카 트로이트의 회고전을 준비했다. 1980년대 유럽 퀴어영화의 최전선에 있었던 감독인데, 여성주의 포르노, 퀴어영화의 급진적 이미지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영화들을 만들었다. <버진 머신>은 낭만적 판타지를 성적 판타지로 깨는 이야기다. 충격받고 싶은 분들에게 권한다. (웃음)”

배주연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프로그래머 추천작

❶ <얼굴, 그 맞은편>. “다큐멘터리 옥랑문화 수상작이고, 디지털 성범죄를 다룬 다큐멘터리다. 성폭력 영상을 소비하고 제작하는 사람들을 밝혀내고 문제제기하는 여성 활동가들의 모습을 담았다. 최근에 중요하고 긴급하게 다뤄야 할 주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시의성 측면에서 추천하는 작품이다.”

❷ <자유연기>. “경력단절 여성에 대한 이야기다. 출산과 육아로 인해 오디션을 보러 가기도 힘든 상황에 처한 연극배우의 이야기를 무척 공감가게 만든 단편 극영화다. 주인공 배우의 연기가 공감 형성에 크게 기여한다.”

❸ <버려진>. “이란의 단편영화고, 대리출산을 하는 한 가정의 이야기다. 여성의 계급성과 모성이 충돌하는 지점을 극적으로 잘 표현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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