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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전> 이해영 감독, "실체 없는 신념을 좇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김현수 사진 백종헌 2018-05-31

“<독전>의 가장 큰 반전은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감독 이해영’이란 이름이라더라.” 홍콩 누아르의 거장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2013)을 리메이크한 <독전>은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2014), <페스티발>(2010), <천하장사 마돈나>(공동연출 이해준, 2006)를 연출한 이해영 감독의 신작이다. <독전>의 리메이크 제작 소식이 들려왔을 때부터 과연 이해영 감독이 홍콩 누아르 장르를 어떻게 재해석할지 그 방향조차 가늠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이다. 완성된 영화는 쉽게 말해 예상 가능한 리메이크의 수순을 밟지 않는, 평범함을 거부하는 스타일이 도드라지는 영화다. <독전>의 스타일에 관해서는 분명 관객의 호불호도 갈릴 것 같다. 일반 관객을 대상으로 한 모니터링 시사회 중 감독의 이름을 보고 당황해했을 관객의 반응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과감하고 새로운 도전에 응한 감독으로서 응당 불안할 법도 하지만 오히려 개봉을 앞둔 이해영 감독은 편안해 보였다. 돌이켜보면 그의 전작은 모두 일반적인 장르의 공식 안에서 놀되 의식적으로 경계를 넘나드는 방식으로 평범함을 거부해왔다. 그런 면에서 <독전> 또한 이해영 감독만의 뚜렷한 족적을 남긴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약간은 어리둥절하고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를 <독전>이란 생경한 범죄 세계를 좀더 들여다보고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희대의 마약조직과 이를 잡기 위해 ‘사생결단’의 자세로 ‘끝까지 간다’고 외치는 남자들의 세계에 발을 들인 이해영 감독의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다.

-제작사 용필름으로부터 <독전> 연출 제안을 받았을 때 원작이나 누아르 장르에 대한 부담감은 없었나.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을 끝내고 차기작을 고민하던 시기에 감독으로서 이전과는 달라지고 싶다는 갈증이 있었다.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을 리메이크하는 것은 도전이었지만 장르적으로는 고민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지난 작업들이 장르적이지는 않았지만 늘 어떠한 장르에 다가가려 노력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장르에 대한 도전은 해볼 만하겠다고 생각했다. 정서경 작가가 쓴 <독전> 시나리오가 2고 정도까지 나온 상태였는데 큰 틀에서 이견이 없었다.

-두기봉 감독의 <마약전쟁>은 중국 공안과 홍콩 마약 조직간의 싸움을 통해 홍콩과 중국의 지정학적 관계 또한 담아내고 있다. 이를 한국이란 배경으로 옮겨왔을 때 어떤 방향에서 각색해야 할지가 관건이었을 것 같다.

=소위 마약 청정국으로 분류되는 한국에 거대 마약 조직이 있다는 설정을 어떻게 영화적으로 설득력 있게 가져갈 것인가? 원작과의 큰 차이는 캐릭터를 대하는 연출자의 태도였다. 나는 관객으로서 영화 속 마초적인 캐릭터에 대한 약간의 저항감이 있다. 두기봉 감독이 하드보일드하게 끝까지 밀어붙여 보여주는 남성 코드와는 다른 질감의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원작의 캐릭터와 마약반 형사 원호(조진웅), 락(류준열)과의 온도 차이가 확연하게 다르다.

=원작의 뢰 형사(순홍레이)는 남성성을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캐릭터였다면 원호는 훨씬 감성적이다. 배우가 가진 색깔 덕분이기도 하다. 또한 원작의 차이(고천락)가 속셈이 읽히는 캐릭터였다면 락은 조직에서 버림받은 하수인이지만 왠지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아우라가 느껴지길 바랐다.

-지난해 가을 <독전> 촬영장을 찾았던 <씨네21>과의 인터뷰(1124호 기획 <독전> 촬영현장을 가다)에서 락을 표현하기 위해 레퍼런스로 삼은 인물을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것 같다며 답변을 피한 적 있다.

=락은 만화 <몬스터>의 주인공 ‘요한’ 같은 인물이었다. 감정적 부침이 별로 없는, 뭔가 특별한 행동은 안 하지만 자꾸 마음과 에너지를 뺏기는 인물이기를 원했다. 원호는 자기 속내를 쉽게 드러내는 인물인데 반해 락은 관객으로 하여금 더 들여다보고 싶게 만들고 싶었다. 사실 류준열의 레퍼런스는 류준열이다, 라고 이야기한 적은 있다. (웃음)

-<독전>은 누구에게는 스타일이 과하다는 인상을 줄 수도 있겠지만, 끝까지 그 시도를 밀어붙였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거대한 마약조직이 서울에 존재한다는 설정을 관객에게 설득력 있게 보여주려면 결국 설정에 걸맞은 스타일이 갖춰져야 한다, 스타일이 곧 개연성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미장센에 신경을 썼다. 영화 속 배경이 시대를 초월한 무국적인 느낌을 주는데 너무 촌스럽거나 스타일을 위한 스타일처럼 보이지 않게끔 적정선을 유지하는 게 어려웠다. 그래서 <은교>(2012), <사도>(2015) 등을 작업한 김태경 촬영감독이 보여주는 탐미적인 느낌도 중요했다. 범죄극을 사건 다루듯이 접근하지 않을 것, 뉘앙스를 잡아낼 것 등이 연출상에서 고민했던 점이다.

-경찰과 마약조직원간의 싸움에서 벌어지는 액션의 전체 컨셉에 대해서 허명행 무술감독과 주로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 궁금하다.

=전체적으로는 원호와 하림(김주혁), 원호와 브라이언(차승원)의 구도로 싸움이 벌어지는데 원호와 하림 사이에서는 고급 기술이 들어가는 싸움이 아니라 치사하게 반칙도 많이 쓰는 등 약간 지저분한 기술을 구사하면서 막 싸우는 느낌이 들도록 설계했다. 브라이언은 재벌이니까 좋은 훈련을 많이 받았을 것 같고, 그래서 괜히 세련되어 보이는 화려한 액션이 되기를 원했다.

-배우 김주혁과 진서연이 연기하는 하림과 보령은 마치 원작과의 차이를 선언하듯 재해석한 캐릭터다.

=나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질문했고 만들어내기 어려웠던 캐릭터들이다. 두 사람 모두 외계에서 떨어진 것 같은, 너무나 강력해서 파악하기 어려운 인물이자 주종 관계를 파악하기 어려운 관계로 만들었다. 보통 조직의 보스 옆에는 수단화되는 여성이 등장하기 마련이지 않나? 보령과 하림은 주종 관계를 파악할 수 없다. 여성 관객 중에 보령을 오히려 멋있다고 느끼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디자인했다.

-배우 진서연을 비롯해 마약 제조 기술자로 등장하는 배우 이주영, 마약반 형사 소연 역의 배우 강승현 등이 연기하는 캐릭터 모두 남성 위주의 세계 안에서 각자의 존재감을 확연히 드러낸다.

=적어도 이 세계 안에서 여성들의 존재감이 명확하게 느껴지기를 바랐고 소모되거나 수단으로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원작의 형제 설정을 남매로 바꿔 이주영 배우를 등장시켰는데 실제로 팔에 힘이 너무 없어 양손에 총을 드는 걸 어려워했다. 굉장한 연습 끝에 총을 난사하는 장면을 해냈는데 화면에서 사라지며 마지막 두발을 쏠 때의 느낌은 내가 현장에서 보고 반할 정도였다.

-액션에 있어서도 여성 캐릭터들에게 다른 역할을 분담했는데, 형사 소연의 액션 신은 <아토믹 블론드>(2017) 같은 여성 액션영화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강승현 배우는 살면서 주먹을 한번도 쥐어본 적이 없다더라. (웃음) 그런 친구가 3개월 정도 트레이닝을 받았다. 소연이 잠입을 위해 위장하려고 굽 높은 힐을 신었다가 상대편 여성 조직원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힐을 벗어던지고 맨발로 내려찍기를 하는 장면이 가장 화려한 액션 신이길 바랐다. 소연과 몸싸움을 벌이는 배우는 이예은이라고, 배우를 준비하면서 특공무술을 배웠던 친구다. 벽 타고 날아오르는 장면을 대역 없이 본인이 다 했다.

-마약 제조 기술자인 청각장애인 남매의 등장 장면도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들이 머무는 소금 공장의 배경을 비롯해 대화를 훔쳐보는 경찰들에게 통역을 해주는 수화 통역사(박선영)의 활약은 영화에 이상한 활력을 불어넣는다.

=원호와 하림의 역할 바꾸기 접전이 끝나고 염전으로 향해 갈 때, 이 영화는 이해영이 만든 영화입니다, 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워낙 반대 의견도 많았지만 통역사가 마치 변사처럼 남매의 행동을 번역해주는 것이 영화적으로도 재미있었다. 원호의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는 장면도 실은 중요했다. 사회적 약자들끼리 연대해서 살아가는 모습과 서로를 보듬는 정서를 안겨주려고 했다.

-차승원이 연기하는 브라이언 이사의 등장과 함께 영화는 원작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달려간다. 브라이언 이사의 존재감은 그래서 중요하고 또 이해영 감독만의 인장 같기도 하다.

=아니다. (웃음) 브라이언의 캐릭터 컨셉은 배우 차승원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는 나도 생각하지 못했던 카드였다. 제작사 대표님의 추천으로 만났는데 자꾸만 나를 보며 브라이언이 재미없는 인물이라고 강조하기에 어떻게든 설득시키고 싶어졌다. 원래 시나리오에서는 좀 전형적인 인물이었는데, 내가 <마스터>(2012)의 랭케스터(필립 세이무어 호프먼)처럼 힘을 안 주는데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교주 같은 느낌이 재미있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본인이 너무 재미있어 하면서 브라이언을 만들어왔다. 현장에서는 관객이 대체 뭐하는 인간이지 하고 궁금해할 정도로 의뭉스럽게 만들자는 의도로 헤어스타일이나 대사를 만들었다.

-수많은 인물 가운데 영화 전체의 긴장감을 이끌고 가야 하는 건 원호와 락의 관계다. 둘 사이의 긴장을 비롯해 관객과 두 사람 사이의 긴장까지 설계해야 하는 감독의 입장에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지점은 무엇이었나.

=원호는 관객 입장에서는 감정을 직접 드러내는 캐릭터이기 때문에 그를 따라가기는 쉽다. 그런데 락은 늘 원호 옆에 있으면서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감독으로서는 스트레이트한 감정으로 사건을 정면 돌파하는 원호를 보는 락의 느낌이 중요했다. 원호와 하림이 만나는 역할 바꾸기 시퀀스에서 원호가 락에게 왜 허락도 없이 돌발행동을 했느냐고 몰아세운다. 그때 락이 갑자기 선문답을 하듯 “방금 그거 꿈꾸신 거예요”라고 말하는데 질주하던 원호가 무릎이 툭 꺾이면서 눈빛이 흔들린다. 그런 모드 전환의 순간을 관객과 함께하고 싶었다. <독전>은 분명 캐릭터 영화지만 사건 위주로 모든 시퀀스가 넘어가기 때문에 사실은 단 한번도 캐릭터를 위한 순간은 없다시피 하다. 우리가 익히 봐 왔던 브로맨스물과는 다른 방식의 접근이다.

-용산역은 영화에서 꽤 중요한 공간으로 활용된다. 왜 서울의 수많은 명소 가운데 용산역을 택한 것인지 궁금하다.

=마약 유통의 핵심이 될 수 있는, 철도의 심장이라고 볼 수 있는 그런 곳이 어딜까? 생각해보니 그곳이 용산역이었다. 대한민국 심장부에 주사기를 꽂는 느낌이 들었다. 한 가지 더, 모든 부감숏은 철로가 보이는 쪽에서 찍었다. 철로를 강조하고 싶었다.

-한글 원제는 원작의 제목이기도 한 ‘독전’(毒戰)을 그대로 쓰는데 영어 원제는 ‘Believer’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서로 누가 누군지 모르는 불분명한 정체성에 관한 고민이 원작보다 진하게 들어가 있는 느낌이다.

=엔딩 크레딧 직전에 한글 제목 말고 영어 원제만 보인다. 내가 제안한 건데, ‘Believer’가 이 영화를 잘 설명하는 것 같다. <독전>은 인물들이 스스로 집착하고 매달리고 있었던 실체 없는 신념에 대한 이야기다. 정체성에 대해 스스로를 규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막연하게 실체 없는 어떤 것을 쫓다보니 자신의 실체 없음도 깨닫게 되는 이야기가 맞지 않을까, 생각했다.

-배우 류준열을 비롯해 최근의 관객이 좋아하는 배우상이 시대에 따라 변화하고 있다. 감독 역시 배우를 캐스팅하고 영화를 연출하는 입장이기에 시대 변화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만약 <독전>을 10년 전에 만들었다면 다른 이미지의 배우를 캐스팅했을 것 같다. 류준열이란 배우는 2018년 현재의 관객이 열광하는 새로운 세대의 이미지인 것 같다. 그는 실력으로 자신의 외모를 만들어낸 배우라서 더욱 그의 활약이 고무적이다. 그를 캐스팅한 것은 그 나이대 배우 중에서는 가장 연기를 잘하기도 하고 또 그의 얼굴을 자꾸 읽고 싶게 만드는 힘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블루레이 책자에 소개된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이미지 자체로는 B급영화가 될 공산이 컸기 때문에 기획적인 재단이 필요했다. 시대, 공간, 그리고 장르를 선명하게 규정해서 상업영화의 외형을 갖추겠다는 계산이었다”라고 말한 적 있다. 이에 비추어보면, 전작이 시대와 공간을 도드라지게 드러내는 쪽이었다면, <독전>은 그와 반대로 시대와 공간을 지우는 방식으로 접근한 것 같다.

=시대를 흐릿하게 묘사한 것은 물론 의도적인 것이지만 거대 마약조직이란 설정 때문에 스타일로 밀고 나가야만 좀더 힘을 갖겠다는 판단이었다. 물론, 영화란 시대의 공기나 흐름, 메시지를 읽어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독전>은 소재의 특이성 때문에라도 그런 위치에서 약간은 비껴나 있는 이야기다.

-<독전>을 통해서 장르에 대한 갈증이 더 깊어졌다고 해야 할까.

=상업적으로 감독인 나를 증명하려면 장르적으로 명확한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다그쳤던 것 같다. 지난 세편의 연출작 모두 나름대로는 어떤 장르를 연상시키긴 하지만 공식에 들어맞은 적은 없었다. 이번에는 좀더 장르의 주파수를 정확하게 맞춰야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작품 구상도 하고 있나.

=아직 구체적으로 세우지는 않았지만 어떤 영화든 관객의 기대에 정확하게 답할 수 있는 영화를 더 만들고 싶다. 바로 그것이 장르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 <독전>은 장르영화의 컨벤션 안에서 감독의 목소리를 내는, 내가 진짜로 믿는 것을 녹여내는 쾌감이 있는 즐거운 작업이었다. 장르에 대해 더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었고, 다음 영화는 더 나아지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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