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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결혼은, 미친 짓이다

‘키치중독자’가 아니라 ‘키치반성자’의 모습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은 시인 유하를 일러 ‘키치중독자’이며 ‘키치반성자’라고 했다. 영화, 만화, 포르노, 무협지, 유행가 등 온갖 대중문화가 유하에겐 시의 육체요 영혼이었다. 감독 유하에게도 시인 유하와 같은 호칭을 붙일 수 있을까? 첫 영화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1993)에서 그는 시인 유하의 현실을 드러냈지만 영화의 언어로 표현할 순 없었다. <바람부는 날이면…>은 쏟아지는 키치적 이미지를 감당못해 쩔쩔매는 감독의 자화상이었다. 그러나 거의 10년 만에 내놓은 두번째 영화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다르다. 충분히 노련해지기로 작정한 감독 유하는 시의 언어와 결별한다. 매끈한 멜로드라마와 날렵한 코미디는 망설임없이 몸을 섞지만, 감독은 어느 것에도 ‘중독’되지 않는다. 그 적당한 거리두기가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문장을 여러 번 되씹게 만든다.

감독은 이만교의 동명소설에서 “불온한 여주인공의 캐릭터에 끌렸다”고 말한다. 여주인공 연희는 ‘사랑’과 ‘결혼’ 가운데 어느 하나도 버리지 않는다. 사랑과 결혼의 대상이 같다면야 새삼스런 일이 아니지만, 연희의 연인 준영은 결혼제도에 투항할 생각이 추호도 없는 남자다. 그녀는 차선책으로 남편과 애인이 공존하는 이중생활을 계획한다. 그녀가 우연히 이런 상황에 이른 게 아니라 계획대로 두집 살림을 한다는 사실이 ‘연희’라는 이름을 잊지 못하게 한다. 적어도 한국영화에서 결혼을 이런 식으로 걷어찬 여자는 처음이다. 결혼한다고 남편만 바라보고 살 수 없을 거라는 남자의 말에 그녀는 답한다. “난, 자신있어! 절대로 들키지 않을 자신!”

그리하여 그녀가 주말부부를 가장하며 준영의 옥탑방을 찾을 때, 거기엔 ‘불륜’이라는 단어가 주는 끈적한 느낌이 없다. 이것은 감독의 말대로 ‘기묘한 사랑이야기’지만, 기묘하지 않게 연출함으로써 더욱더 매섭게 결혼에 대한 정상적인(정확히 말하면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를 공격한다. 영화가 택한 길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연희의 사진첩처럼 행복한 연인들의 미소를 오래 붙잡아두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정상적인 연인들처럼 밀어를 속삭이고 쇼핑을 하고 여행을 하면서, 그들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상한 커플이라는 의심을 거두게 만든다. 평범한 로맨틱코미디로 시작해 에로틱한 열정으로 치달았다 별이 쏟아지는 밤을 함께 나누는 낭만적 순간으로 이어지는, 어느 것 하나 기묘할 것 없는 사랑의 판타지를 그들도 함께한다.

영화는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멜로드라마의 고전적 레퍼토리와 형식을 빌려오면서 시한부 인생이나 이복남매 스토리에서 제자리걸음을 반복하는 관습을 깨고 나간다. 현실의 결혼제도에 시비를 걸면서 웨딩마치로 종결되는 로맨틱코미디의 규칙도 뒤집는다. 프랭크 카프라의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처럼 백만장자의 딸과 가난뱅이 신문기자가 결혼하는 완벽한 영화적 엔딩이 현실에선 불가능하다는 것이 은연중에 폭로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펼쳐보이는 리얼리티의 스펙트럼은 넓지는 않지만 예리하고 파괴적이다. 사랑의 신화를 반복재생하는 장르인 멜로드라마에 새로운 에너지를 불어넣는 것은 현실에서 건져올린 이런 비판정신일 것이다.

엄정화와 감우성은 궁합이 잘 맞는 커플이다. TV에서 오랫동안 섹시한 가수로 자리잡았던 그대로 엄정화는 연희의 도발적인 이미지에 어울린다. 하지만 그녀가 도발적이라고 억세고 강한 여자라고 여기면 곤란하다. 화면에 비치지 않는 시간 동안 우리는 그녀가 많이 울었을 것이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적당한 내숭과 타고난 애교로 속삭이는 그녀가 결혼과 사랑, 둘 중 어느 하나를 버리지 못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감우성 역시 TV에서부터 지적이면서 냉소적인 이미지였다. 그는 결혼을 누구랑 할까 고민하는 연희에게 “나 포함해서 가난한 자식들은 다 빼”라고 말하는 현실주의적 태도를 취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작은 부탁들은 다 들어줄 수 있는 가슴이 넓은 남자다. 두 남녀의 모습에서 카메라를 돌리는 순간이 많지 않은 영화인데도 집중력을 잃지 않는 건 두 배우의 호흡이 제대로 맞아들어가는 리듬감 때문이다.

아마 <결혼은, 미친 짓이다>에서 시인 유하와 감독 유하의 공통점으로 남는 것은 ‘키치중독자’가 아니라 ‘키치반성자’의 모습일 것이다. 키치반성자로서 유하는 그렇다고 홍상수의 영화를 흉내낼 마음은 없어보인다. 그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 노스탤지어를 느끼며 장르의 힘을 믿는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호소력도 바로 그런 노스탤지어와 맞닿아 있다. 연희의 사진첩을 보며 준영은 말한다. “사진 속에서만큼은 그녀도 나도 한없이 행복해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가지 않은 그 길, 결혼과 셋방살림으로 이어지는 그 길을 갔다면 정말 행복했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여전히 미련이 남는다. 그 안타까움과 죄책감, 후회와 연민이 이 기묘한 사랑이야기에 머리보다 마음이 먼저 끌리는 이유이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원작과 영화

TV와 경쟁하던 소설, 영화가 되다

“리모컨을 장착한 새로운 작가의 출현.” 문학평론가 김화영씨는 이만교씨의 소설 <결혼은, 미친 짓이다>가 “주제와 문체와 대화와 행동과 정신을 아우르는 예외적인 속도를 구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것은 “TV 프로그램이나 만화가 웬만한 문학작품보다 뛰어난 상상력을 선보여서 놀라곤 한다. 나는 이들에게 때로 배우고 한편으로는 경쟁하고 싶다”는 작가의 말과 상통한다.

<결혼은, 미친 짓이다>는 소설 자체가 TV 단막극처럼 가볍고 빠르다. 소설가 조성기씨는 “홍상수 감독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라 표현했지만 홍상수 영화처럼 보는 이의 마음을 무겁게 짓누르는 편은 아니다. 소설은 통속적인 상황에서 출발, 포르노처럼 빠져들다 한순간 미끌어져 예기치못한 종착역에 도달한다. TV, 영화, 만화 등 다른 대중문화 장르와 경쟁하겠다는 의도로 쓰여진 이 소설에 대중문화 중독자로 이름높은 유하가 관심을 보인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유하는 오늘의 작가상 심사위원으로 있을 때 소설을 보고 영화화를 마음먹었다. 실제 영화와 소설, 양쪽 이야기의 차이는 크지 않다. 소설에서 은희였던 여자의 이름을 연희로 바꾸고 준영의 가족 이야기가 대폭 줄어든 것이 눈에 띄는 정도다. 연희가 남자의 자취방을 얻는데 돈을 댄다는 영화 속 설정은 소설에 없는 부분이다. 영화는 여주인공의 불온한 캐릭터를 한층 강화하면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그리는데 주력한다. 유하는 이렇게 말한다. “이 영화를 통해 결혼이란 화두를 공론화시키고 싶었고,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본 결혼제도에 대해 담론을 이끌어내고 싶다. 영화 속 이야기는 옆집에서 일어나는 실제 상황이다. 즉 누구에게나 연희는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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