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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빈 감독의 <가프> 괴상하게 아름답고 별난
백승빈(영화감독) 2018-07-10

감독 조지 로이 힐 / 출연 로빈 윌리엄스, 글렌 클로스 / 제작연도 1982년

오랜만에 본가에 다녀오면서 아버지 몰래 엄마의 예전 일기장을 훔쳐왔다. 집에 들를 때마다 장롱 속 유품상자를 비밀스레 뒤져 한두장씩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는 성에 차질 않았고, 매번 큰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의 기분으로 망자를 추억하는 일도 못할 짓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그냥 조용히 가방에 넣어온 것이다. 당시 집 안에 있는 물건 중 가장 낡고 늙고 오래된 그 겨자색 스프링 노트는, 걸어서 극장과 백화점을 오갈 수 있는 도시 한복판에서 평생을 살던 여자가, 이제 막 결혼해 남편의 직장이 있는 황량한 지방 교외에 내려와 살기 시작하던, 1970년대 후반에 주로 쓰였다. 어떤 이야기들이 그 속에 적혀서 나를 자주 놀라게 하고 오랫동안 생각에 잠기게 했는지 이 지면에 자세히 밝힐 수는 없다. 하지만 정체를 짐작할 수 없는 복잡한 마음과 불가사의한 신호들이 밤하늘의 별자리처럼 꾸준하게 떠 있던 그 낡은 일기장 속의 글들이, 지난 10여년간 내게 다빈치 코드였고, 나니아의 옷장이면서 동시에 튜링 머신으로 작동했다는 것 정도는 조심스레 얘기할 수 있다.

‘참 쓸데없는 짓 한다….’ 비디오데크의 일시정지와 리와인드 버튼을 연신 누르면서 영화의 모든 대사를 받아쓰고 있던 열 몇살의 내게 엄마가 말했다. ‘무슨 상관이람?’ 사실 나도 그런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지만, 그냥 그렇게 퉁명스레 대꾸할 뿐. 그렇게라도 영화를 머릿속에 넣어두고 싶었다는 얘기는 어디가 부끄러워서 하지 못했나? 당시엔 존 어빙이 쓴 원작 소설이 있다는 사실도 몰랐으니 영화의 모든 대사를 받아 적는 일만이 그 이야기를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했다. 아무튼 그것은 젊디젊은 시절의 로빈 윌리엄스와 글렌 클로스가 출연한 <가프>라는 영화였고, 얼마 후 원작 소설을 읽고 나선 어이없을 정도로 사랑하는 이야기가 되었다. 괴상하게 아름답고 별난 인간들이 가득한 그 이야기에서 글렌 클로스가 연기한 ‘제니 필즈’라는 캐릭터는 전쟁 부상병들을 치료하는 간호사 출신으로, 평생 간호복을 입고 지낸 열혈 여권운동가이자 암살당해 죽기 직전까지 아들 ‘가프’의 어둡고 복잡한 인생을 강렬히 밝히는 등대 불빛 같은 어머니였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이 이야기의 진짜 심장이 되었다. 원작에선 그 거대한 개성 탓에 캐리커처의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었으나, 영화로 옮겨지면서 글렌 클로스라는(당시) 신인배우의 독특하게 묵직한 존재감에 힘입어 그 심장은 피가 돌고 맥이 뛰는 무엇이 되었다. 그리하여 <가프>는 등장인물 모두가 어떻게 죽는지를 상세히 보여주면서 끝나지만, 영화가 종료되고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덮여도 그 괴상하게 아름답고 별난 인간들의 심장 소리는 여전하고 기운차게 살아 있는 이야기로 남았다. 그 ‘쓸데없는 짓’이 결국 직업이 된 지금의 내게 말이다.

‘가망이 없습니다.’ 엄마의 말기암을 알리던 의사의 목소리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소리처럼 낭만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그 자리에 함께 있던 아버지에겐 그렇지 않았을 것이므로, 몰래 죄를 지은 듯한 그 기분은 지난 10여년간 나만 아는 비밀이었다. 하지만 다시 내가 그때 그 자리로 돌아간다면, 무슨 잘못이라도 한 사람처럼 앉아 고개 숙이거나 입 다물고 있진 않을 것이다. ‘네, 선생님. 존 어빙도 <가아프가 본 세상>이란 책에 그렇게 썼어요. 가프가 본 세상에 따르면, ‘우리 모두 다 가망이 없는 환자들이라 가능한 한 열심히 살아야 한다고’.

백승빈 영화감독. 한국영화아카데미 출신으로 단편 <프랑스 중위의 여자>(2007)와 장편 <장례식의 멤버>(2008)를 만들었고, 옴니버스영화 <무서운 이야기3: 화성에서 온 소녀>(2016)에 참여했다. 신작 장편영화 <나와 봄날의 약속>이 6월 28일 개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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