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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화성의 유령들
2002-04-23

시사실/화성의 유령들

■ Story

서기 2176년 화성은 지구의 식민지가 되었고, 지구법으로 다스려진다. 화성은 여성이 우위에 선 사회이고, 여전히 자연과의 투쟁과 개척이 벌어지는 미개지다. 풍부한 천연자원이 묻혀 있는 샤이닝 캐논 구역은 6만여명이 거주하는 광산도시. 화성의 경찰 멜라니(나타샤 헨스트리지)는 샤이닝에서 체포된 악명높은 범죄자 ‘폐허’ 윌리엄스(아이스 큐브)를 이송해 오라는 명령을 받는다. 멜라니는 대장인 헬레나(팸 그리어), 다른 부대에서 전속된 제리코(제이슨 스테이섬), 막 훈련을 마치고 배치된 바쉬라(클레어 듀발)와 함께 샤이닝 지역으로 향한다. 그러나 멜라니 일행이 도착한 샤이닝 지역은 흥청망청한 광산도시가 아니라, 사람의 그림자조차 찾아 볼 수 없는 유령의 도시다. 사방에는 시체가 널려 있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 피어싱을 하고 문신을 한 채 살육의 축제를 벌인다.

■ Review USC에서 영화공부를 하며 단편영화를 만들던 존 카펜터는, 스티븐 스필버그를 능가할 만한 재원으로 평가받았다. 장르영화와 영화제작의 온갖 테크닉에 통달한 존 카펜터는 블록버스터의 제왕이 되기에 충분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존 카펜터에게는, 보통 사람에게는 없는 또 하나의 재능이 있었다. 지독한 반골정신. 존 카펜터는 자진하여 B급영화계로 향했고, 재능을 유희적으로 낭비했다. 그 결과, 신랄한 자평처럼 존 카펜터는 ‘프랑스에서는 작가, 영국에서는 호러영화 감독, 미국에서는 싹이 노란 놈’이 되었다. 존 카펜터의 최신작 <화성의 유령들>은 그가 왜 메이저에 가지 않았는지, 그 이유를 여실히 보여주는 문제작이다.

존 카펜터의 반골정신은 <화성의 유령들>에서 극단적으로 튀어오른다. ‘빈 것처럼 보이면서도 꽉 차 있고, 꽉 차 있으면서도 빈 것처럼 보이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존 카펜터의 평소 지론처럼 <화성의 유령들>의 모든 인물과 상황은 비일상적이고, 뒤틀려 있다. 지나치게 비관적이면서도, 한없이 가벼운 농담들을 마구 지껄여댄다. 일관성도, 세련됨도 존재하지 않는다. 전작 <슬레이어>가 고전적인 뱀파이어 이야기에 서부극을 겹쳐놓으면서 세련된 장르의 테크닉을 과시한 것에 비하여 <화성의 유령들>은 의도적으로 난삽하고 유치하다. 존 카펜터는 <할로윈> <매드니스>처럼 장르의 임계점까지 몰아붙인 깔끔한 작품과, <빅 트러블> <LA 2013>처럼 풍자정신과 장난기가 마구 난장을 벌이는 영화를 뒤뚱거리며 만들어왔다. <화성의 유령들>은 후자의 경우로, 악당 ‘히어로’의 엉망진창 활약을 그린 <뉴욕 탈출>과 의 21세기형 변주다.

화성은 여성이 지배하는 사회이고, 화성의 원주민은 아프리카의 토인과 펑크족을 합체한 듯한 유령이다. ‘폐허’ 윌리엄스는 흑인판 스네이크(<뉴욕 탈출>의 주인공)이고, 멜라니는 임무 수행을 하러 가면서 마약에 취한다(멜라니에게 들린 유령이 나가버리는 이유도 마약 때문이다. 마치 <패컬티>처럼). 윌리엄스를 구하러 온 동료의 이름은 우노, 도스, 트레스(스페인어로 하나, 둘, 셋)인데 멍청하고 유치한 짓은 골라서 한다. 바쉬라는 연약한 척하다가, 유령이 들린 사람을 ‘싫다’는 이유로 사살한다. 그들은 모두 그릇된 신념과 잘못된 상황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존 카펜터는 그런 그들을 동정하지도, 옹호하지도 않는다. 단지 그들이 자신의 논리대로 움직이게 한다. 결전을 앞둔 시간, 제리코가 멜라니를 부른다. 그리고 던지는 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데 ‘한번 하자’는 것이다. 비웃던 멜라니는 그 어처구니없는 유혹을 받아들인다. 그런 식으로 <화성의 유령들>의 결단과 반전은 뒤죽박죽이다. 논리보다는, 그들의 인간성과 본능에 맡겨버린다. <화성의 유령들>은 그런 묘한 들뜸으로 가득하다.

<화성의 유령들>은 화성으로 무대를 옮긴 서부극이다. 멜라니 일행은 기차를 타고 광산으로 향한다. 신천지의 주민들은 몰살당하고 야만의 원주민 유령이 모든 것을 장악했다. 멜라니와 윌리엄스는 요새에서 진지전을 펼치다가 겨우 도망쳐 기차에 올라탄다. 화성의 주인은 육신을 잃고 유령으로 떠도는 그들이다. 그러나 지구에서 온 이방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도망치던 멜라니는 기차에서 내리고 ‘핵’을 터뜨려 그들을 몰살시키려 한다. ‘주권의 문제’라는 것이다. 화성의 주인은 지구인이고, 주인이 자신의 땅에서 도망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마차를 공격하는 인디언을 ‘학살자’로 지칭하고, ‘보호구역’으로 몰아낸 아메리카 대륙의 역사는 <화성의 유령들> 위에 고스란히 겹쳐진다. 이미 모든 것을 잃어버린 화성의 원주민이, 유령이 되어 구천을 떠돌면서 이방인의 몸을 빌려 현신한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올리버 스톤의 영화에서 인디언의 영혼이 ‘고결한 정신’으로 상징되는 것과는 반대로, 존 카펜터는 모든 것을 뺏긴 자들의 분노와 원한을 직접적인 폭력과 학살로 폭발시킨다.

<화성의 유령들>은 조잡하다. 존 카펜터는 화성의 풍경을 컴퓨터그래픽으로 재현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뉴멕시코에 직접 세트를 지었고, 거기에 4만리터의 붉은 페인트를 부었다. <미션 투 마스>나 <레드 플래닛>에 비해 <화성의 유령들>의 화성 풍경은 거칠고, 바래진 느낌이다. 카펜터가 직접 작곡한 음악은 자극적인 상황을 전형적으로 전달해준다. 회상을 하기 시작하면 바로 플래시백을 보여주고, 개성있던 조역들은 순식간에 머리가 날아간다. <화성의 유령들>은 그렇게 의도적인 조잡함으로 승부하지만, 결코 허탈하지가 않다. 존 카펜터는, 영화로 ‘즐겁게 논다’는 말을 할 수 있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감독이다. <화성의 유령들>을 보는 마음이 즐거운 이유는, 그런 감독의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김봉석/ 영화평론가 lotusid@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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