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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차버린 스파이> 여성 주연의 스파이 액션 코미디
김소미 2018-08-23

오직 '영원한 베스트 프렌드' 만이 살아남는다

‘007 시리즈’ 10번째 작품인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1977)는 로저 무어가 제임스 본드를 연기한 시리즈 중에서 가장 큰 흥행을 기록한 영화다. 해저왕국을 건설하겠다는 목표로 미국, 영국, 소련에 핵전쟁을 일으키려는 악당에 맞서 제임스 본드가 세계 구원에 나선다. 007 인기작의 이름을 살짝 뒤집은 수잔나 포겔 감독의 <나를 차버린 스파이>는 스파이 연인과 헤어진 평범한 여성과 그의 친구가 인류를 구하기 위해 의문의 트로피를 전달하는 과정을 그린다. <19곰 테드>(2002), <배드 맘스>(2016) 등으로 코미디에 적성을 인정받은 밀라 쿠니스와 미국 <새터데이 나이트 라이브> 무대를 홀로 휘젓고 다녔던 케이트 매키넌이 만났다. 영화는 남성 중심인 스파이 장르의 외피를 공들여 답습하는 동시에 B급 코미디물의 계보 안쪽으로도 무난히 안착한다. 의외로 잘 만든 스파이 패러디물로 요약하기 쉬운 작품임에도 이 영화를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은 건, 두명의 젊은 여성 스파이가 만드는 반칙적인 즐거움이 있기 때문이다. 수백번 보아온 장르의 규칙에 당혹스러운 코미디를 한 방울씩 떨어트리는 <나를 차버린 스파이>의 이율배반을 정리해봤다.

<나를 차버린 스파이>는 어떤 영화?

로스앤젤레스에서 30살 생일을 맞은 오드리(밀라 쿠니스)는 1년간 만난 연인 드류(저스틴 서룩스)에게 문자 한통으로 차인 상태다. 오드리가 맥없는 생일 파티를 하고 있는 동안, 드류는 리투아니아에서 작전을 수행하는 도중 익명의 킬러들로부터 연이어 공격을 당한다. 그러건 말건, ‘BFF’(Best Forever Friend) 관계인 오드리와 모건(케이트 매키넌)은 홧김에 드류의 물건을 모두 불태우고 장난감처럼 보이는 금빛 트로피 하나만 남겨둔다. 얼마 못 가 오드리는 드류가 CIA와 연계된 스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갑자기 나타난 드류가 눈앞에서 살해당하면서 졸지에 미션 수행의 대리자가 된다. 모건과 오드리는 세계 평화를 위해 어딘가로 트로피를 배달해야만 한다.

<나를 차버린 스파이>는 얼떨결에 스파이가 된 두명의 젊은 여성에게, 파리, 베를린, 빈, 부다페스트의 유명한 여행지를 스파이 미션의 무대로 선사한다. 첫 번째 장소인 빈으로 가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공황 상태에 빠진 오드리에게 모건은 이렇게 말한다. “유럽도 한번 안 가보고 죽고 싶어? 아님 적어도 유럽은 한번 가보고 죽고 싶어?” 어쨌든 죽음으로 귀결되는 이 비약적인 이분법은, 유기농 마트에서 캐셔로 일하면서 유럽 한번 못 가본 것이 억울한 오드리를 겨냥한 베스트 프렌드의 맞춤형 설득 방식이다.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어떻게 코미디가 되었나?

예상보다 훨씬 스파이 장르의 조건들을 모범적으로 고려한 영화라는 점이 <나를 차버린 스파이>가 지닌 의외의 장점이자, 힘겨운 족쇄일 것이다. 화장실 유머에 마음을 연 관객을 처음 맞이하는 건 리투아니아에서 홀로 킬러들을 처치 중인 드류의 액션 시퀀스로, 키아누 리브스의 <존 윅>(2014) 혹은 제이슨 스타뎀 스타일의 일련의 액션영화를 방불케 한다. 의외로 괜찮다 싶은 드류의 독무대가 막을 내리면 유럽 전역을 옮겨다니며 대형 첩보 스릴러영화의 ‘컨셉’에 도전하는 오드리와 모건의 여정이 이어진다. 곧이어 등장하는 카체이싱 액션은 화려한 스턴트가 일면 과시적일 정도다. “액션 코미디 장르에서 스턴트 장면은 성의가 없다는 편견”을 깨고자 했던 수잔나 포겔 감독은 <미션 임파서블>(1996)에서 스턴트로 활동했고, <007 카지노 로얄>(2006), <제이슨 본>(2016) 등을 통해 스턴트 코디네이터로 인정받은 게리 포웰 감독을 섭외해 액션 신을 꾸몄다.

로저 무어가 활약한 <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는 속고 속이는 의심의 구도로 수려한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며 플롯이 복잡해진 스파이영화의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약 40년 후, 뻔하고 뻔해진 이 심리전의 구도를 차용한 <나를 차버린 스파이>는 프랜차이즈 첩보 스릴러의 액션까지 작정하고 표방한다. 패러디를 더하기 전에 장르의 무대가 될 최소한의 장치는 성실하게 답습하겠다는 태도다. 기본기가 빚어낸 안정적인 긴장감은 이후로 케이트 매키넌의 호쾌한 코미디와 현실적인 제작비 규모로 인해 조금씩 흐트러진다. 전자는 <나를 차버린 스파이>가 의도한 또렷한 장점이고, 후자는 어쩔 수 없이 파생된 웃기고 슬픈 지점에 가깝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주로 촬영된 영화는 총 9개 도시를 보여주는데, 국가별 랜드마크인 도시들로 카메라가 옮겨갈 때마다 사실상 이동이 거의 인지되지 않는 것이 이 소규모 스파이영화의 귀여운 면 중 하나다. 익스트림 롱숏의 항공 촬영 대신 친절한 자막이 지리적 설명을 대신해주는 식이다. 그 속에서 오드리와 모건은 의외로 맹렬한 카체이싱 과정을 살아서 잘 버틴 다음, 결과적으로는 슬랩스틱에 가까운 방식으로 악당을 처리한다. 우아한 빈의 한 카페에 모인 요원들이 거창한 총기 난사를 벌이다가도 정작 상대를 죽일 때는 뷔페 테이블 한가운데 놓인 퐁듀 냄비에 얼굴을 넣어 질식시킨다는 점도 <나를 차버린 스파이>의 감수성을 요약한다. 맥락 없이 등장하는 매력적인 빌런도 있다. 추운 나라 러시아에서 살인 병기로 길러진 체조선수 킬러는 주인공 두 사람과 대비되는 전형적인 냉전 스파이물의 등장인물처럼 보이지만 오드리와 모건의 끈끈한 수다 앞에서 손길을 멈추고 황당한 얼굴로 묻는다. “너흰 서로를 어떻게 그렇게 잘 알아?”

여성 스파이 콤비가 세계를 구하는 법

<인디와이어>는 “물 밖에 난 고기들이 난리치는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를 언급하면서, 신분을 위장한 CIA 요원이 사돈을 의심하는 이야기인 아서 힐러 감독의 1979년작 <지참금 200만달러>(앤드루 플레밍 감독이 <위험한 사돈>으로 리메이크하기도 했다)를 해당 장르의 시초로 언급했다. 이런 식으로 계보를 이루는 작품을 나열하자면 윌 페럴이 주연 및 때때로 감독을 겸한 버디무비들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첩보, 액션, 코미디 등 주요 장르를 경유하면서도 <나를 차버린 스파이>의 사소한 특징을 완벽히 커버하는 예시가 없다는 점은, 이 영화가 젊은 여성이 이끌고 가는 이야기로서 분명 새로운 지점이 있음을 암시한다. 멜리사 매카시의 <스파이>(2015)를 마주할 때의 반가움, 그리고 곧바로 이어진 놀라움과도 맥이 닿는다. 여기서 ‘여성 주연 스파이물’이란 전통적인 남성성을 강조하는 스파이 장르에 평범한 두 여성이 뛰어들어 허우적거리는 데 재미의 초점을 맞췄다는 뜻이 아니다. <나를 차버린 스파이>를 비틀고 변주하는 건 시간이 흐를수록 더 거세고 단단해지는 페미니즘의 영향력이다. 오드리와 모건이 나서서 성차별적인 발언을 할 때에도 ‘여성 캐릭터에게 저런 대사가 주어진 적이 있었나?’ 고려하게 된다. 휴대폰의 지문 인식 기능을 사용하기 위해 상대편 요원의 손가락을 수집한 오드리가 립스틱 케이스에 손가락을 넣은 다음 우아하게 돌려서 꺼낼 때의 쾌감은 전에 보기 힘들었던 종류다. 영국 비밀정보부(MI6)의 수장(007 시리즈의 M 격에 해당하는)인 웬디(질리언 앤더슨)가 등장하자 모건이 흥분해서 “와! 여성성을 유지하고도 무려 보스가 되셨네요!”라고 반쯤 조롱하는 건 뼈아픈 농담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나를 차버린 스파이>는 여성 스파이에게 허락된 새로운 상상력의 흔적을 담은 영화다. 다소 짓궂고 고약한 상상력까지 말이다. 모건과 오드리가 이 투박한 여정을 비교적 수월하게 돌파하는 비결에 관해선 얼마 전 개봉한 <맘마미아!2>가 겹친다. 도나(메릴 스트립)의 오랜 친구들인 타냐(크리스틴 바란스키)와 로지(줄리 월터스)가 서로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데 가장 큰 집중력을 발휘하는 것과 같은 순간들이 <나를 차버린 스파이>에도 우정의 중요한 덕목으로 등장한다. 덕분에 오드리는 “한번도 무언가를 끝내본 적 없는” 오드리는 미션 컴플리트의 기쁨을 맛보고, 배우를 꿈꾸던 모건은 악당 살해를 겸한 서커스 공연의 주인공으로 데뷔하기에 이른다. 성장 서사라는 뻔한 양념마저 연대하는 여성 스파이들 앞에선 귀한 맛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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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누리픽쳐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