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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성리> 박배일 감독 - 카메라를 들고 할머니들의 삶으로 들어갔다
이주현 사진 최성열 2018-08-23

“현장에 있는 그 자체가 행복했다. 평화운동을 몸소 실천하는 할머니들과 한 공간에서 같이 밥을 먹고 얼굴을 맞대고 있을 때. 그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소성리에 갔지만 결국 내가 그들에게 힘을 받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 행복했다.” 소성리에서 보낸 3개월 동안 아름다웠던 기억을 묻자 박배일 감독으로부터 돌아온 대답이다. <밀양전>(2013), <밀양 아리랑>(2015)을 통해 밀양 송전탑 투쟁에 앞장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전했던 박배일 감독이 2017년 여름 사드(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기지로 선정된 경상북도 성주군 소성리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갔다. 밀양과 소성리 작업을 거치며, 미디어 활동가이자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역할을 더욱 치열하게 고민하게 되었다는 박배일 감독을 만났다. 고향인 부산에서 다큐멘터리 작업을 하고 있는 박배일 감독은 인터뷰를 위해 서울까지 먼 걸음을 했다.

-영화를 본 소성리 할머니들의 첫 반응은 어땠나.

=우리는 영화를 영화로 보지만 할머니들은 자신들이 살아온 시간을 마주하면서 그 시간을 다시 살아내는 것 같은 느낌으로 보시더라. 처음엔 너무 일상만 나와서 이게 영화인가 하고 봤는데 사드 얘기가 나오고부터는 긴장이 돼서 앉아서 못 보겠다고 하셨다. 또 농사짓는 장면이 나오면 농사짓는 방법이 잘못됐다고 지적한다든지, 농사짓는 저 손이 누구 손이라고 얘기한다든지, 금연 할머니가 “문재인이 사드 안 가지고 가기만 해봐라”라고 말하는 장면에선 영화를 보던 누군가가 “사드 안 가지고 가면 어떡할건데?”라고 대꾸하기도 했다. (웃음)

-소성리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나 계기는 뭔가.

=대선이 끝나고 소성리를 바라보는 외부인들의 시선, 그러니까 ‘너희는 (사드 찬성론자인 홍준표보다 낮은 득표율인) 20%만 문재인 후보를 지지했으면서 무슨 사드를 반대하느냐, 사드 안고 죽어버려라’ 하는 반응을 접했다. 그 20%의 사람들에게 위로와 격려는 못할망정 그런 말을 한다는 게 도무지 내 감성으로는 이해되지 않았다. 그때 소성리에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다른 계기는 ‘미디어로 행동하라’라는 프로젝트인데, 이 프로젝트를 통해 활동가들이 2017년 6월 말부터 4박5일 동안 소성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 내게는 그 도구가 카메라였고 다큐멘터리였다. 그걸 계기로 소성리에 더 머물며 장편을 찍었다.

-전작인 <밀양 아리랑>이 좀더 운동 차원이 부각되는 작품이라면 <소성리>는 영화적 고민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이명박, 박근혜 정권 들어서 언론 상황이 좋지 않았다. <밀양 아리랑>을 찍을 때가 딱 그때였다. 그러면서 영화가 해야 할 역할이 많아졌다. 밀양 주민들의 말도 대변해야 하고, 지금의 운동이 한국 사회에서 어떤 맥락에 놓여 있는지도 보여줘야 하고, 그게 좋은 영화적 만듦새로도 나와야 했다. 그래서 <밀양 아리랑>은 백과사전처럼 완성된 측면이 있다. <소성리>를 만들 땐 분위기가 달랐다. 언론이 다양하게 사드와 성주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래서 영화의 역할에 대해 고민했고,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소성리에는 다리가 하나 있다. 다리 이쪽은 주민들과 연대자들이 투쟁을 벌이는 공간이고, 다리 건너 저쪽은 주민들의 실제 삶이 있는 공간이다. 언론에선 사드와 직접적으로 결합된 이쪽 공간을 주로 보여준다. 그건 다리 너머 주민들의 삶으로 넘어가지 말자는 암묵적 합의다. 그런데 영화의 역할은 다리 너머 일상을 보여주는 것이고, 사드가 이들의 일상을 어떻게 균열시키는지 보여주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고민의 결과가 지금의 <소성리>라는 만듦새로 나온 것 같다.

-밀양 송전탑 투쟁은 길고 치열했기 때문에 <밀양 아리랑>에는 몸과 몸이 부딪히는 충돌 장면이 많다. 반면 <소성리>에는 물리적 충돌 장면이 거의 없다.

=사드 자체를 이야기하려던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밀양 송전탑 투쟁 때도 정말 하고 싶었던 건 ‘지금 이대로 살게 해달라는 구호’의 본질을 들여다보는 거였다. <소성리>를 기획할 때도 주민들이 외치는 구호, ‘사드 가고 평화 오라’에서 그 평화가 뭘까 생각했다. 이들이 말하는 평화는 일상적으로 살아가는 것이고, 사드는 그 일상을 균열낸다. 사드를 설명하고 사드 반대의 논리를 이해시키는 게 아니라 사드가 어떻게 이들의 일상을 균열시키는지 영화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인가, 영화 초반 40분 동안 사드에 대한 얘기를 언급하지 않는다. 사드에 관한 이야기라 생각했던 사람은 영화의 초반 전개가 의아할 수도 있겠다.

=내가 이걸 왜 보고 있는 거지, 하고 당황스러워하는 분들이 많았다.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사드가 왜 잘못됐는지 설득할 수 있는 논리를 얻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영화를 보는 분들이 있는데, 그런 목적이라면 <김어준의 뉴스공장>을 들으면 된다. (웃음) 대체로 그런 부정적 반응을 보이는 분들이 남성이라는 게 재밌었다.

-왜 영화를 받아들이는 남녀의 반응이 다를까.

=작업하면서 어떻게든 남성의 이야기를 집어넣으려고 했고, 소성리의 이장님도 길게 인터뷰를 했다. 그런데 자기 삶을 이야기하는 여성과 남성의 언어 차이가 컸다. 결국 비슷한 맥락이지 않을까 싶은데. 언어가 다르다는 건 무엇을 소화하고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얘기다. 여성은 있는 그대로 감각하고 감성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고, 남성은 이유와 논리를 찾으려 하는 것 같다. 영화는 이래야 해, 이런 영화에는 이런 내용이 필요해, 하고 고정적으로 사고를 하는 것 같다. 그에 반해 여성들은 유연한 반응을 보인다.

-밀양과 소성리의 할머니들을 찍었다. 왜 하필 할머니들인가.

=밀양의 투쟁은 할머니들의 투쟁이었다. 경찰이나 용역과 대치하는 현장의 앞줄에서 몸으로 싸운 분들이 할머니였다. 소성리는 좀 다르다. 다 같이 싸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인 이유는, 언급한 것처럼 남성의 언어와 여성의 언어가 달랐고 그 언어의 결을 통일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여성들이 자기 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이 세상은 좀더 균형이 잡힌다고 생각한다. 기득권 남성에 비해 많은 것들을 박탈당하고 살아가는 여성들이 자신의 권리를 찾아가는 일에 지지와 연대를 표하고 싶어서 나는 영화를 만든다. 지금까지 장애인, 노동자, 여성의 이야기를 영화로 계속 찍어왔다. 세상엔 정말 특이하고 특별한 소재가 많지만 거기엔 관심이 없다. 내 관심은 여성과 노동자들이 열심히 힘을 내서 살아가는 모습에 있고, 그 힘이 우리 사회에서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가에 있다.

-투쟁의 현장에서 오랫동안 카메라를 들었다. 언론 및 미디어 운동가들의 카메라와 다큐멘터리의 카메라는 어떻게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나.

=무엇과 비교해서 달라야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상황에 따라 다큐멘터리 작업은 여러 형태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다큐멘터리 감독, 독립영화인이라는 직업인으로서 내가 하는 노동에는 영화인의 정체성만큼 미디어 활동가의 정체성이 있다. 투쟁의 현장에 처음 들어갈 땐 미디어 활동가로서 들어간다. 그런데 내 활동의 최종 아웃풋은 영화여야 한다. 그리고 그 영화가 어떤 모양새여야 하는지 영화감독으로서 고민해야 한다. 현장에 계속 있으려면 영화쟁이로서의 고민도 깊어야 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영화는 영화적이어야 한다. 사실 <밀양 아리랑>을 찍을 땐 고민이 많았다. ‘나는 영화를 찍으러 밀양에 왔는데 왜 영화는 못 찍고 활동만 하고 있지?’ 하는 고민들. 그런데 지금은 내가 하는 노동의 속성을 이해하게 됐다.

-현재 준비 중인 작품이 꽤 많은 것으로 안다.

=프로듀서로 참여하는 작품이 두 작품 있다. 유성기업 노조 파괴 이야기를 다룬 정종민, 김설해, 조영은 감독의 <사수>와 문창현 감독의 <기프실>. 내 작품도 두개 있다. 하나는 <라스트 신>이다. 올해 문을 닫은 부산의 국도예술관을 중심으로 독립예술영화관의 현재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또 하나는 내가 사는 곳인 부산의 사상을 배경으로, 자본이 노동자와 공동체를 어떻게 밀어내며 몸집을 불리는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상>이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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