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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터스>와 <소성리>에 오늘날의 액티비즘을 묻다

다큐멘터리는 무엇으로 액션하는가

<소성리

이일하 감독의 <카운터스>와 박배일 감독의 <소성리>는 비슷한 시기에 개봉했다는 공통점만 제외하면 묶어 이야기할 일이 별로 없을 것 같은 두편의 다큐멘터리다. 그리 이상적인 방식은 아니지만 소재의 유사성이 서로 다른 작품을 무리 없이 묶는 일차적인 바탕이라 할 때, <카운터스>와 <소성리>가 다루는 소재는 혐한 발언을 하는 재특회(재일 특권을 허용하지 않는 시민모임)와 이에 맞서는 카운터 조직,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 별다른 교차점 없이 평행선을 이룬다. 공통점이라고 해야 어딘가에 반대하거나 저항하는 사람들을 다룬 것인데, 그것은 다큐멘터리가 대부분 그러하므로 딱히 공통점이라고 말할 순 없다. 그런데 두 작품을 비슷한 시기 나란히 두고 보니 공통된 의문이 하나 생겼다. ‘오늘날의 액티비즘은 어디에 있는가’가 그것이다. 두 작품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날의 액티비즘을 보여준다. 전작의 연장선에 있는 동시에 변화된 시도를 하는 점도 공통된다. 투쟁의 현장 속에서 감독이 느끼는 곤란함과 이를 뛰어넘기 위해 선택한 방식은 무엇인가. 두편의 다큐멘터리를 통해 하나의 질문을 감당해보려고 한다.

현존하는 비존재 <소성리>

박배일 감독은 전작 <깨어난 침묵>(2016) 상영 직후 관객과 만난 자리에서 <밀양 아리랑>(2015) 개봉 이후에 느꼈던 회의감에 관해 말했다. <밀양 아리랑>이 3천명 남짓한 관객수로 극장 개봉을 마무리하게 되자, 영화가 제작되고 관객을 만나는 이유와 소용에 관해 근본적인 물음을 갖게 된 것 같았다. 감독의 고민은 <깨어난 침묵>의 두드러진 형식적 실험으로 드러난 듯 보였다. 관객은 째깍대는 초침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침묵에 휩싸인 누군가의 얼굴을 한동안 마주하게 된다. 외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인터뷰 사운드는 끝내 인물의 입술과 만나지 못한 채 분리된다. 현장 장면은 활동가들이나 감독이 촬영한 것이 아닌, 대부분 당사자들의 손에서 기록되었다. 이는 주체와 대상이라는 구도를 넘어서는 하나의 방식일 것이나, 한편으로는 액티비스트가 오래 머무를 곳은 현장이 아니라, 편집기 뒤임을 자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는 액티비즘 다큐멘터리의 실패 선언인가, 변화해야 한다는 자각인가, 무력감의 고백인가. 그러므로 <소성리>는 회의와 체념 이후 다시 현장에 서게 된 액티비스트의 다음 행보가 담긴 영화다.

<밀양 아리랑>의 초반부에는 마을 주민들과 어울려 밥을 먹는 감독의 모습이 짧게 등장한다. 젊은 활동가들이 서툴게 농사일을 돕는 모습도 포착된다. 이는 다큐멘터리 제작자 및 활동가들이 마을 주민과 긴밀하게 관계 맺고 있음을, 적어도 그렇게 되도록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반면 <소성리>에서 대상과 관계 맺는 감독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더 정확하게는 관계에 관한 강조가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대상을 조명하는 동시에, 대상과 관계 맺는 감독을 보여주며 진정성을 획득하곤 하는 다큐멘터리의 오랜 방식과 절연한다. 카메라는 주민들의 동선을 따라가며 이들을 비출 뿐이다. 촬영 방식은 현장다큐멘터리에서 필수적인 핸드헬드 대신에 어딘가에 고정된 채로 놓여 있는 것이 대부분이다. 핸드헬드가 보장하는 즉흥적인 현장성 혹은 겸허한 태도와 멀어진 채, 카메라는 이미 마을 주민의 동선을 꿰고 있음을 과시하며 고정된 채로 어딘가에 놓여 있다. 찍히는 대상으로서의 인물들 역시 자신이 찍히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다는 듯이 카메라나 제작진을 거의 신경 쓰지 않은 채 본인의 일상을 산다. 이것은 관계가 아예 없었다기보다는 소통의 순간이 일부러 삭제되었다고 보는 편이 옳다. 마치 들리지 않는 레디 액션에 맞춰 마을 주민들은 자신의 일상을 수행하는 것도 같다. 반면 관계의 흔적 몇 가지는 남겨진다.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다. 대상이 카메라 뒤의 감독에게로 다가올 때다. 이웃과 나눠 먹던 음식을 카메라 뒤의 감독에게도 나눠주기 위해 다가올 때, 어린 꼬마가 카메라를 향해 다가와 인사할 때 카메라의 차가운 얼굴은 일순간 부드러워진다. 그러나 그것이 카메라가 지닌 얼굴 자체를 뒤바꿀 정도는 아니다.

이러한 수동성은 그동안 감독이 카메라를 들고 대상에 적극적으로 다가서던 태도와 상반된다. 때로 감독의 카메라는 몰래카메라처럼 보일 정도로 어울리지 않는 상황 속에 바짝 다가서곤 했다. 이를테면 <밀양전>(2013)에서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순간을 고백하며 마을 주민 두사람이 풀숲에서 부둥켜안고 울 때, 카메라는 그 장면을 보여줄 수도, 보여주지 않을 수도 없다는 듯, 약간 떨어진 곳에 놓여 있었다. <소성리>의 카메라는 흡사 인물과 수평적인 위치에 놓인 CCTV처럼 보인다. 과거에 카메라가 투쟁의 현장에 들어가 거기 있음을 강조한 것과는 반대로, <소성리>에서 카메라는 투쟁의 현장을 목격하기 위해 거기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카메라는 마치 거기 없는 것처럼 거기 있고 싶어 한다. 카메라가, 혹은 카메라 뒤의 감독이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고 할수록 그 존재감은 도리어 커진다. 범박하게 정리하자면 카메라는 이제 부재하는 것으로 존재한다.

삶에 깃든 죽음

중반 이후 카메라는 그동안 지켜온 저 스스로의 규칙(고정숏)을 깨고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낸다. 카메라는 숲을 걷는 누군가의 1인칭 시점숏을 대체하며 핸드헬드로 마구 움직인다. 이것은 주민들의 평화롭고 단조로운 일상이 사드로 인해 깨어지는 불안함을 표현하는 인서트일까. 고정숏은 변화할 순간을 되레 강조하는 장치일 뿐인가. 규칙이 깨어지기 이전, 영화에는 전조라고 할 만한 인서트를 곳곳에 배치한다. 영화에서 주민들간의 대화 장면을 제외하고 감독과 주민 사이에 이뤄진 인터뷰는 모두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으로 처리되어 있다. 인터뷰를 포함해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개입된 것들을 영화는 저 스스로 의도적이라고 표시한다. <밀양 아리랑>에도 사운드의 분리나 개입의 경향이 있었지만, 그때그때의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효과음으로 봐도 무방했다면, <소성리>에서 사운드는 공통된 하나의 분위기를 형성한다. <깨어난 침묵>에서 인터뷰의 내용과 화면을 분리했던 방식의 연장이나, 그보다 더 추상화된다. 발화자의 모습이 명징하게 보이지 않은 상황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발화자에게서 떨어져 나온 목소리가 어떤 풍경에서, 장소에서 흘러나올 때, 그것은 풍경과 장소의 말처럼 들리지 않는가.

돌이켜보면 박배일 감독은 항상 투쟁이 일어나는 공간을 중요시했다. 장소의 이름을 강조해온 제목들을 생각해보라. 변화한 것은 있다. 전작에서는 그곳에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가 강조되어 왔다면, 이번에는 구술이 증언하는 누군가의 죽음이 더 중요해졌다. 질문이 생략된 대답은 모두 누군가의 죽음을 말한다. 어릴 때 죽은 아들, 죽은 남편의 이야기도 있고, 6·25 전쟁 때 맞닥뜨린 이름 모를 공산주의자(‘빨갱이’)의 죽음도 있다. 감독은 한 인터뷰에서 인서트로 삽입된 장면에 관해 학살의 장소들이라고 언급했다(인디스페이스 관객기자단이 만드는 <인디즈>와의 인터뷰 ‘다큐멘터리로 연대하기’). 실제 장소가 아니라고 해도, 삽입된 사운드와 말은 그곳을 죽음과 연루된 장소로 만든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어느 가족>의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국제영화제에서 ‘왜 일본 작가는 상실만 그리는가’라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고 한다. 그는 삶과 죽음이 이원론적으로 분리된 것으로 이해하는 서구의 사고방식과 달리 동양의 사고방식에서 죽음은 삶에 내재한 것임을 강조한다(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저서 <영화를 찍으며 생각한 것>). 박배일 감독의 전작에서 삶과 죽음은 이원론적으로 분리된 것처럼 보였다. 삶을 사는 것은 마을 주민들이고, 이들을 죽이는 것은 외부의 힘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파괴하고 짓밟기 때문에 송전탑, 경찰, 한전 등 외부의 침입은 나쁜 것이었다. 반면 <소성리>에 이르러 삶뿐만 아니라 누군가의 죽음이 강조되며, 마을 주민들과 대립하는 것을 삶과 죽음으로 명확히 가를 수 없게 된다. 여전히 죽음의 자리에 사드를 놓는 것도 가능하지만, 죽음은 마을을 떠도는 혼령이기도 하다. 이들을 불러들이는 것은 결국 죽음을 우리의 수호자로 끌어오겠다는 다짐이다. 카메라는 우리의 편으로서의 죽음을 기다리며 거기에 있는 것 같다. 이제 투쟁은 삶을 거는 대신, 죽음과 기억과 장소와 혼령을(혹은 혼령도) 걸고 투쟁한다.

영화 속에서 사드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사드를 둘러싼 말들이 어른거린다. 서북청년단의 말과 거기에 반대하는 말은 명확하게 갈리지 않으며, 드러나는 것은 오직 두 가지 입장이 엇갈린다는 것 자체다. 카메라의 위치는 말들에 대한 반응숏으로 삽입된 주민의 모호한 표정을 닮았다. 그것은 <소성리> 바깥에서 이 사건을 바라보는 다수의 표정, 바로 당신의 얼굴이기도 하다. <소성리>는 명확함이 아니라 모호함을 택한다. 그것은 되도록 많은 사람을 끌어당기기 위함이다. 부재하는 존재들까지도.

<카운터스>

액션하는 스피치 <카운터스>

<소성리>가 모호한 표정을 보여준 자리에서 <카운터스>는 여전히 다큐멘터리는 명징해야 하며 명징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영화가 주장하는 바는 한결같다. 비주류를 향한 주류의 혐오에 반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재특회의 창설자 사쿠라이의 모습을 꽤 가까이에서 보여주면서도 이러한 입장을 잃지 않는다. 반대로 카운터스 내부의 과격한 행동단체인 오토코구미의 대장 다카하시가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 사용하는 폭력과 이로 인한 내홍을 보여주면서도 오토코구미를 지지하는 태도를 잃지 않는다.

<카운터스>를 보는 동안 관객에게 요구되는 것 중 하나는 기존 개념어를 ‘카운터’ 해보는 것이다. 영화에서 기존 개념은 의심의 대상이다. 이를테면 ‘표현의 자유’와 같은 허울 좋은 말이 어떻게 쓰이는지 보라. 재특회 창설자 사쿠라이는 카운터스가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으며, 법을 제정하려는 움직임은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훼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가 단지 혐오 당사자들간의 문제인 것은 아니다. 와타나베 교수가 자신의 학생들에게 ‘혐오 발언을 금지해야 하는가’라고 질문을 던졌을 때, 한 학생이 금지에 반대하며 내건 근거도 바로 표현의 자유였다. 반면 다른 학생은 폭언과 표현은 다르다고 선을 긋는다. 내가 의심하고 싶은 것은 ‘표현’이라는 단어보다 ‘자유’에 관한 것인데, 재특회와 카운터스의 싸움에서 자유의 반대는 억압이 아니라 또 다른 자유이기 때문이다.

무언가에 반대하는 자들의 딜레마는 자신이 반대하는 이들을 닮아간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이에게 이들은 그저 욕하고 싸우는 도긴개긴처럼 보인다. 그것은 영화를 보는 관객에게도 마찬가지다. 영화가 카운터스와 혐오세력을 따로 표시하지 않는 이상,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그저 누군가가 싸우는 형상일 뿐이다. 이에 반해 카메라가 둘간의 구분을 뚜렷하게 새겨두는 방식이 있다. 요약하자면 움직이는 것과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카메라가 재특회를 담을 때, 거기에는 어떤 역동성도 발견할 수 없다. 역동성은 오직 카운터스를 통해서만 온다. 카운터스를 담을 때, 역동성과 산발적인 움직임이 두드러진다. 카메라의 대조적인 움직임은 각각이 주장하는 자유의 성질과 조응한다. 재특회 회원들은 주로 도로 안, 공원 안 등 지정된 장소에 모이거나 행진한다. 이들의 질서 정연함은 이들이 법적으로 보호받고 있음을 일러주는 동시에 이들이 주장하는 자유와 민주주의 역시 경직되었음을 말한다. 카운터스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구태여 주장하지 않지만, 자유롭게 산포된 이들의 형태 자체가 민주주의 혹은 자유와 동의어처럼 보인다. 그리하여 이곳에서 맞붙는 것은 경직된 자유와 자유로운 경직이다. 아무리 자유를 외쳐도 그것을 담고 있는 태도와 형식이 경직되어 있다면 그것은 자유가 아니며, 금지를 외치더라도 그것이 점하는 형식이 자유롭다면 그것은 고착되지 않은 것일 수 있다.

카운터스의 역동성은 사후 편집을 통해 더욱 강조된다. CCTV의 은밀하고 정제된 움직임에 가까웠던 <소성리>의 카메라만큼이나 <카운터스>의 카메라가 비인칭적으로 여겨졌다면 그 이유는 편집이 현장에서 촬영된 화면의 물질성을 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비하의 의미로 읽히지 않기를 바라며 <카운터스>의 편집방식을 SNS 업로드용 동영상 편집방식에 가깝다고 말하고 싶다. 새로운 말을 수시로 업데이트하는 SNS처럼 영화의 형식이 내용보다 수다스럽다. <카운터스>의 편집방식에서 SNS를 생각하게 된 이유는 카운터스가 조직을 이루던 당시 SNS가 중요한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방식을 통해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삶’이라는 소요다. 서로 다른 입장이 뒤엉키며 분탕질하는 ‘소셜네트워킹’ 방식은 그 자체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몸부림처럼 여겨진다.

카메라가 있는 곳이 곧 현장이다

영화가 ‘삶’의 편임은 다카하시의 죽음을 다루는 방식에서 두드러진다. 오토코구미의 대장 다카하시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영화를 보는 동안 한 차례도 예고되지 않은 채 철저히 숨겨진다. 그의 죽음은 심지어 엔딩 크레딧 이후 보너스 영상처럼 밀려나 있다. 일차적 이유는 아마도 다카하시의 죽음이 영화의 편집을 대부분 끝낸 뒤에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영화의 클로징 자막은 다카하시가 현재 수감 중임을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다카하시의 죽음을 에필로그처럼 삽입하는 것이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해도 이를 엔딩 크레딧 이후로 가져간 것은 특기할 만한데, 마치 다카하시의 죽음으로 서사를 귀결하거나 하나의 방점을 찍지 않겠다는 의지로 읽힌다. 죽음을 알리는 자막과 다카하시의 장례식 장면을 보여준 뒤, 영화는 카운터스가 계속 투쟁 중임을 알리며 시퀀스를 끝맺는다. 다카하시의 죽음이 아니라 계속된 삶의 투쟁으로 끝맺는 것이 오토코구미의 정신이자 다카하시의 정신을 기리는 것이라 믿는 듯이.

영화가 지속해서 삶을 택하고 강조하는 이유는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는 것만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바꿔야 할 것 중 가장 중요한 것이자, 재특회와 카운터스를 가르는 결정적인 기준은 법이다. 재특회와 카운터스는 도긴개긴처럼 보여도 하나는 합법이고, 다른 하나는 불법이 되어버린다. 법의 테두리 안에 있기 때문에 재특회는 공원 안에서 혹은 도로를 행진하며 혐오를 외쳐대고, 카운터스는 법의 테두리 밖에 있기에 산발적으로 대응할 수밖에 없다. 카운터스를 공원 바깥으로 밀어내는 것은 결국 법이기에, 혐오금지법 제정으로 카운터스의 움직임이 모이는 것은 예정된 귀결이다. 이 과정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이는 국회의원 아리타다. 수차례 협박과 위협을 감내한 그는 ‘몸으로 부딪혀 행동하는 사람들의 힘이 법을 만든 거’라며 현장으로 공을 돌린다. 영화가 전환하도록 유도하는 숨은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이 현장이다. <카운터스> 속에는 현장과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식의 현장들이 있다. 조금 확장하면 현장다큐멘터리와 그렇지 않은 다큐멘터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가 있는 곳이라면 그 어디든 현장이다. 액티비즘이 있는 곳도 바로 거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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