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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②] 할리우드 아시아계 배우들의 역사, 1920년 하야카와 셋슈 ~ 2018년 존 조
장영엽 2018-09-05

할리우드 ‘대나무천장’을 부숴라

<조이럭 클럽>

누군가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와 <서치>에 대한 영미권 매체들의 반응이 다소 호들갑스럽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할리우드에서 아시아계 감독들이 아시아계 배우들을 주·조연으로 캐스팅해 어떤 선입견도 포함되지 않은 그들만의 이야기를 하게 되기까지의 역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현재 아시아계 영화인들에 쏟아지고 있는 뜨거운 응원과 지지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는 할리우드의 지난 역사를 살펴봐야 한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무비 스타가 된 아시아계 배우는 아마도 일본 출신의 하야카와 셋슈일 것이다. 무성영화 시대의 빅 스타였던 그는 아시아 남성 중에서 할리우드의 첫 섹스 심벌로 평가받는다. 20세기 초 하야카와가 백인 여성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자 인종차별이 만연하던 당시의 미국 사회에는 큰 파장이 일어났다고 한다. 1918년 하야카와 셋슈는 영화사 하워스 픽처스를 설립해 아시아계 영화인에 대한 편견으로 가득하던 당시의 미국영화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하지만 당시 가장 높은 개런티를 받던 할리우드 스타였음에도 하야카와 셋슈는 이미 견고했던 할리우드의 대나무천장(bamboo ceiling·아시아계 미국인의 고위직 상승을 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을 뚫지 못했다. 그에게 주어지는 역할이란 여전히 제한적이고 서양인들의 편견으로 가득한 인물이었다. 더구나 전후 혼란스러운 분위기를 틈타 아시아계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감이 사회적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하야카와는 1922년 미국을 떠나 유럽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이후 할리우드로 돌아온 그는 1957년 <콰이강의 다리>의 일본군 포로수용소장 역으로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하야카와 셋슈와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또 다른 아시아계 톱스타로는 안나 메이 웡이 있다. 중국계 미국 배우 안나 메이 웡은 마를렌 디트리히와 함께 <상하이 익스프레스>(1932)에 출연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펼쳤으며 당대의 패션 아이콘으로도 유명했다. 안나 메이 웡에 대해 아직까지도 회자되는 사건은 1930년대 화제의 미국영화 <대지>(1937)와 관련된 캐스팅 논란이다. 중국 대륙을 배경으로 중국인들의 삶을 다룬 펄 벅의 소설 <대지>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에 안나 메이 웡은 공공연하게 출연 의사를 밝혀왔다. 할리우드영화에서 중국인 캐릭터를 연기할 수 있다는 건 흔치 않은 기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 <대지>의 제작진은 주인공 왕룽 역에 백인 남자 배우를 캐스팅하길 원했고, 당대의 할리우드에서는 인종간 결혼 금지법에 따라 백인이 아닌 여성이 백인 남성의 상대역을 맡을 수가 없었다. 안나 메이 웡이 <대지>에서 제안받은 역할은 왕룽의 ‘첩’이었고 그녀는 단번에 거절했다. 안나 메이 웡 대신 <대지>의 주연을 맡은 여자배우 루이제 라이너는 왕룽의 아내 오란을 연기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플라워 드럼 송>

<대지>는 ‘옐로페이스’(백인 배우들이 아시안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을 일컫는 말로, 동양인을 연기하기 위해 그들의 얼굴을 노랗게 분장하는 데에서 비롯된 용어)의 전형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21세기 할리우드에서 일어나고 있는 화이트워싱 논란은 이 옐로페이스를 둘러싼 문제를 계승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 20세기 내내 미국에서는 아시아계 배우들이 연기해야 할 대부분의 역할을 백인 배우들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틈을 노려 아시아계 역할을 주로 연기한 백인 배우도 등장했다. 스웨덴계 미국 배우 워너 올랜드가 그다. 올랜드는 중국인, 또는 중국계 미국인 역할로 이름을 날렸는데 그가 맡은 역할 중에는 미국인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아시아계 캐릭터 찰리 챈(하와이 호놀룰루 출신의 중국계 미국인 탐정)과 푸 만추(동양인에 대한 서양인들의 선입견이 극대화된 악당이지만, 특유의 매력으로 영미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악당 캐릭터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가 있었다.

아시아계 배우들이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에 대거 출연한 첫 작품은 1961년 제작된 뮤지컬영화 <플라워 드럼 송>이다. 독일 출신의 감독 헨리 코스터가 연출을 맡은 작품으로, 차이나타운에서 펼쳐지는 네 남녀의 좌충우돌 연애담을 보여준다. 몇몇 설정에 있어서는 여전히 할리우드의 아시안 스테레오타입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비판이 있었지만, 자유로운 연애관을 가진 아시아계 이민자 2세와 전통을 중요시하는 구세대의 갈등 등 현존하는 아시안 커뮤니티의 이슈를 볼 수 있는 작품이 그간 드물었다는 점에서 <플라워 드럼 송>은 “문화적으로, 역사적으로, 미학적으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으며 미국 의회도서관의 영구 보존 작품으로 선정됐다. 이 작품으로부터 50여년이 훌쩍 넘은 지금도 아시아계 배우들이 노래하고 춤추는 할리우드 뮤지컬영화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이 씁쓸하다.

1970년대의 할리우드에서는 홍콩 출신의 액션 스타 이소룡의 활약이 눈에 띈다. 그는 1966년 방영된 미국 드라마 <그린 호넷>의 일본인 조수 카토로 출연해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관심을 끌었지만, 언어와 인종의 장벽을 뚫기에는 역부족이었다. 1972년 미국에서 큰 인기를 끈 드라마 <쿵후>(미국 서부를 떠돌며 악당을 물리치는 쿵후 고수를 주인공으로 한 작품)는 이소룡이 구상한 작품이었으나 중국인 주연배우를 원치 않았던 제작사의 입김에 출연이 불발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주연을 맡은 처음이자 마지막 작품, 그리고 마셜아트 영화의 역사에 영원히 남을 고전 <용쟁호투>(1973)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이소룡은 숨을 거뒀지만 그의 존재감은 성룡, 이연걸, 견자단 등 후대 아시아계 액션배우들이 등장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줬다.

<킬링 필드> 행 응고르(왼쪽).

1990년대에는 아시아계 영화인들의 활약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웨인 왕 감독의 <조이럭 클럽>(1993)과 리안 감독의 <결혼피로연>(1993), M. 나이트 샤말란 감독의 <식스 센스>(1999)가 할리우드에서 상업적, 비평적 성공을 거뒀으며 아시아계 미국인들이 처음 목소리 연기로 주연을 맡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뮬란>(1998)이 개봉했다. 하지만 이들의 활약은 할리우드 속 아시아계 영화인들의 거대한 무브먼트로 이어졌다기보다는 미국 엔터테인먼트 업계 속 다양성의 중요함을 새삼 깨닫게 하는 이벤트성 이슈로 기능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2000년대에 접어든 지금, 놀랍게도 아시아계 배우들이 영미권 시상식에서 거둔 주목할 만한 성과는 아직도 20세기 중반에 머물러 있다.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배우 부문의 상을 수상한 이는 세명뿐이다. <사요나라>(1957)로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일본계 미국 배우 우메키 미요시, <킬링 필드>로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캄보디아 출신의 미국인 행 응고르, <간디>에서의 열연으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인도계 영국인 벤 킹슬리가 그들이다. 100여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할리우드에 기여해 온 아시아계 배우들의 활약상에 비하면, 할리우드가 그들에게 제공한 열매는 너무 적다.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스>와 <서치>라는 뚜렷한 성취를 내놓은 뒤 맞이하는 2019년 미국 영화 시상식은 다를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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