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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 움직이는 그림(moving picture)이라는 오래된 미래
송경원 2019-01-02

해보지 않고는 몰라

이래도 될까 싶었다. 다짜고짜 만화 프레임을 집어넣고 말풍선 내레이션이 끼어들고 새로운 스파이더맨이 등장할 때마다 코믹스 커버가 타이틀로 등장한다. ‘BOW’, ‘BooM’ 같은 타이포그래피 의성어가 그래픽으로 화면 한자리를 차지하고 위기를 알리는 스파이더 센서가 간단한 선 몇개로 처리된다. <스파이더맨: 뉴 유니버스>(이하 <뉴 유니버스>)를 보는 내내 적재적소의 만화적 표현에 감탄하면서도 이런 식의 파격적인 접근이 제대로 이해될까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 중간에 킹핀의 에피소드가 짧게 처리되는 순간 문득 그게 다 쓸데없는 ‘지식과 관습의 저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스쳤다.

겹쳐지는 세계

<뉴 유니버스>는 고갈되어가던 시리즈에 새로운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코믹스의 인기 캐릭터이던 흑인 소년 마일스로 옷을 갈아입어 활력을 더함과 동시에 히어로 팀이라는 트렌드도 재치 있게 반영한다. 이 모든 신선한 변화의 동력을 한 단어로 정리한다면 ‘겹침’이라고 이름 붙이고 싶다. 킹핀의 음모로 평행우주가 하나로 섞이게 된 상황을 무대로 각기 다른 세계에서 온 6명의 스파이더맨이 팀을 이룬다는 설정부터 그렇다. ‘겹친다’는 사건을 뼈대로 디테일한 장식을 봐도 각종 오마주와 패러디, 이스터에그가 난무한다. <스파이더맨> 1, 2, 3편을 빠르게 정리하고 지나가는 오프닝 신을 비롯해 스파이더맨 시리얼 박스처럼 새털 같은 요소까지 뜯어 보면서 즐길 수 있는 요소를 꾹꾹 눌러담았다.

그렇다고 모든 것이 새롭냐 하면 그건 아니다. <뉴 유니버스>의 새로움은 익숙함을 전제로 한다. 사실 발상은 평범하다. 히어로 팀은 이제 거스를 수 없는 대세이고, 제4의 벽을 깨고 말을 거는 건 <데드풀> 덕분에 익숙하다. 애니메이션의 조형적 요소가 영화로 확장되는 건 <레고 무비>가 이미 선보인 바 있다. <뉴 유니버스>에 한번도 보지 못한 상상력 같은 건 없다. 하지만 이 모든 이질적인 요소를 한솥에 넣고 조리해냈을 때 위화감 없이 섞인다는 점이 이 영화의 비범함을 증명한다. 이건 하나의 톤으로 고르게 정리하는 ‘통합’과는 조금 다르다. 여기서 굳이 ‘겹침’이라는 번거로운 단어를 고른 건 난잡한 듯 조화로운 혹은 산만한 듯 힙한 영화의 분위기를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이건 하나로 통합된 세계가 아니다. 순간적으로 겹쳤다가 영향을 미치고, 공존과 병립을 허락하면서도 끝내 변화하는 방향성에 관한 이야기다.

영화와 애니메이션, 두 평행우주의 교차점에서

쉴 새 없이 떠드는 피터 파커처럼 하고픈 말이 넘치지만 여기선 한 가지 질문에만 집중하겠다. <뉴 유니버스>의 불균질한 연출방식이 거슬리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영화, 애니메이션, 만화의 연출법을 수시로 교차하고 겹쳐놓는데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만드는 비결이 무엇일까. 말했다시피 이 영화의 거의 모든 구성 요소는 익숙하다. 다만 그건 따로 분리돼 있을 때 이야기고, 하나의 내러티브 안에서 차례로 연결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마일스의 우주에 넘어온 다른 스파이더맨들이 오래 버티지 못하는 것처럼 하나의 세계에 다른 연출법을 섞는 건 기본적으로 흡수 통합을 전제로 한다. 애니메이션에 영화적 요소를 빌려올 수 있고, 영화에 애니메이션의 작화를 도입할 순 있지만 최종적으론 뼈대로 선택한 세계에 통합되는 것이다. 영화와 애니메이션은 부분적으로 서로 닮을 순 있고 때때로 교차하기도 하지만 근본적으론 다른 방향으로 뻗어가는 평행우주다. 그렇게 받아들여져왔다.

그런데 <뉴 유니버스>는 이런 물리 법칙(혹은 믿음)을 가볍게 무시하는 것 같다. 스파이더맨이 제4의 벽을 수시로 넘나드는 것처럼 <뉴 유니버스>는 영화와 만화, 애니메이션이라는 고정관념의 벽이 마치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양 손쉽게 관통한다. 여기서 관통이란 표현을 쓴 건 이질적인 요소가 뒤섞여 있지만 하나로 정리되는 대신 겹쳐지고 공존하는 쪽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뉴 유니버스>가 애니메이션인가? 당연히 그렇다. 아니, 아직까지는 그렇다. 나는 이 영상을 애니메이션이라고 쉽게 단언하고 싶지 않다. 엄밀히 말해 <뉴 스파이더맨>이 다양한 양식을 공존시키는 방식은 거의 현대미술에 가깝다. <뉴 유니버스>는 베이퍼웨이브(대중문화의 향수에 기반한 미디어아트), 글리치 아트(깨진 이미지 조각의 모음)가 연상되는 기법을 동원해 자신의 상태를 끊임없이 고백한다. 이미지와 조형의 차원에서 볼 때 <뉴 유니버스>는 콜라주를 동원한 실험 영상과 맥이 닿아 있다. 장면마다 의미를 분석한다면 그렇게 접근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 문득 지식의 함정에 빠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전문적인 용어를 모르면 이 영화를 이해할 수 없는 걸까. 오마주와 패러디를 모르면 이 작품을 즐기지 못하는 걸까. 그렇지 않다. <뉴 유니버스>는 아무 사전지식 없어도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어쩌면 가장 스파이더맨스러운 것을 가장 스파이더맨스러운 방식으로 연결한다. 만화인지 애니메이션인지 영화인지 구분하고 분석하는 시도는 집어치우자. <뉴 유니버스>는 독자적인 방식으로 지금 여기 우리 앞에 존재한다. 어쩌면 가장 솔직하고 원초적인 형태의 우주. 어쩌면 가장 솔직하고 원초적인 형태의 우주. 2차원 이미지에 생명을 부여하고 추상을 물질화하는 애니메이트의 기적.

만화적 영상의 존재론

서사적으로 <뉴 유니버스>의 구멍을 지적하는 건 쉬운 일이다. 우선 스파이더맨 팀의 풍성한 팀워크와 성장 서사에 비해 킹핀이란 악역은 편편하게 제시된다. 10초도 채 되지 않는 코믹스풍의 회상으로 처리하는 킹핀의 사연은 분량으로만 보면 면피용으로 보일 지경이다. 덧붙여 6인의 스파이더맨 중 누아르, 햄, 페니 3인방은 작품의 톤과 따로 놀 뿐 아니라 매우 짧고 기능적으로 삽입돼 있다는 비판을 피해가기 힘들다. <뉴 유니버스>를 하나의 통합된 우주로 이해해야 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캐릭터들이 마치 콜라주의 조각처럼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애초에 이 캐릭터드은 CG를 2D화한 마일스의 세계와 질감을 달리한다. 마일스의 세계와 거의 유사한 질감으로 표현되는 피터 B. 파커와 그웬은 서사적으로도 상당한 분량을 허락받고 필요하기도 하지만 나머지 캐릭터는 어쩌면 그럴 필요가 없는 게 아닐까. 정보량이 물리적으로 충분하지 않긴 하지만 그렇다고 얄팍하다고 말할 수 없는 건 이들 캐릭터가 간단한 선 몇개로 처리되는 스파이더 센서의 표현과 본질적으로 별반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보는 순간 이해되고 굳이 감정적 공감을 요구하지 않는 일종의 조형적 접근. 흑백(누아르), 카툰(햄), 셀(페니), 과장된 사이즈(킹핀) 등 조형적으로 이들은 지극히 비현실적인 만화의 세계에 속한다. 그래서 물리적인 정보량이 아니라 작화의 구별로 존재한다. 구태여 하나의 색깔로 통합하는 일 없이 병렬적으로 겹쳐놓는 것만으로 입체감이 부여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뉴 유니버스> 속 각기 다른 우주의 작화와 스타일은 칸칸이 구분된 만화의 프레임처럼 나열돼 있다. 그리고 이를 힙합, 베이퍼웨이브 등의 음악이란 사슬로 연결한다(이에 대해선 따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소년 만화의 왕도에 가깝다고 해도 좋을 진부한 서사는 창의적인 이미지의 입체적인 연결과 겹침, 콜라주를 거친 뒤 비로소 생명을 얻는다.

애니메이션은 본래 추상을 구체화하는 예술이다. 정지된 화면에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는 비결은 두 가지. 하나는 캐릭터와 이야기를 통한 공감, 나머지 하나는 이미지 그 자체의 형태와 구성이 주는 직관적 충격이다. 사진이 사실을 찍는 데서 출발한다면 그림은 감정의 형태를 조각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최초의 포착 그대로 2차원에 머물기도 하고 거기에 입체감이 추가되어 3차원으로 연결되기고 하며 간혹 추상의 세계로 넘어가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가 100년 동안 쌓아온 연출, 애니메이션이 100년간 축적해온 문법들은 때로 견고한 장벽이 되어 상상력과 가능성을 옥죄는 방향으로 작동한다. 그런 관습은 흔히 ‘~적’이라고 표현된다. <뉴 유니버스>에 이르는 길은 서로를 배척하지 않고 입체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만 뼈대를 지배하는 관습은 영화나 애니메이션보다는 차라리 만화에 가깝다. 스파이더맨에 관한 상상이 여러 형태로 공존하는 이 살아있는 이미지들을 만화적 영상의 존재론이라 해도 과히 틀리지 않을 것 같다.

장 뤽 고다르가 <네 멋대로 해라>(1959)에서 점프 컷을 시도했을 때 그는 사람들이 깜짝 놀라고 쉽게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편집의 방향을 바꿔 충돌하는 차를 보여주면 당황할 것이라고 짐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사람들은 놀람을 즐기는 한편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전혀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 영화가 100년 동안 쌓아온 연출, 애니메이션이 100년간 축적해온 문법은 때로 절대적인 것인 양 착각하기 쉽지만 견고해 보이는 벽은 의외로 쉽게 관통된다. 다만 시도하지 않아 어디까지 쉽게 받아들여질지 가늠이 되지 않을 뿐이다. <뉴 유니버스>는 대중적인 호흡 안에서도 애니메이션과 영화가 가보지 않은 길의 여러 갈래 문을 두드린다. 그것만으로도 이 작품은 특별하다. 문득 마일스와 피터 B. 파커의 대화가 떠오른다. (관객이) “준비가 되었다는 걸 어떻게 알죠?” “그건 아무도 몰라. 그냥 믿고 직접 해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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