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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차성덕 감독의 <까마귀 기르기>
차성덕(영화감독) 2019-01-15

홀로서기

감독 카를로스 사우라 / 출연 아나 토렌트, 제랄딘 채플린, 모니카 랜달, 플로린다 치코, 헥터 엘터리오 / 제작연도 1976년

좁은 극장 입구로 삼삼오오 관객이 모여든다. 인파에 떠밀려 나는 그만 잡고 있던 손을 놓친다. 공포가 엄습한다. 울음이 터지려는 순간 몸이 붕 떠오른다. 시야가 열리며 사람들의 머리 꼭대기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아빠 어깨 위에서 극장 안으로 향하는 행렬을 내려다본다. 영화에 관련된 내 최초의 기억이다. 무슨 영화를 보았는지는 잊어버렸지만 이 장면만은 아직도 생생하다.

배울수록 영화는 어렵고 멀게 느껴졌다.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지 끊임없이 자문하면서 고군분투했다. 그날도 그런 숱한 날 중 하루였다. 지하철에 유난히 사람이 많았다. 갑자기 숨이 턱 막혔다. 극장에서 아빠 손을 놓친 어린애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다만 그때와 다른 건, 나를 들어 올려줄 아빠는 여기 없단 사실이었다. 이러다 끝내 영화로 들어가는 문을 찾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렇게 휘청휘청 휩쓸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내 ‘운명’이 끝날 수도 있단 생각은 절망적이었다. 역을 빠져나와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시네마테크 앞이었다. 날이 견딜 수 없이 뜨거웠다. 바로 시작하는 영화표를 끊고 극장에 앉았다. 그렇게 나는 <까마귀 기르기>를 만났다.

스페인 국적의 거장 카를로스 사우라의 <까마귀 기르기>는 어린 소녀 아나(아나 토렌트)의 성장담이다. 엄마 마리아(제랄딘 채플린)를 병으로 여읜 아나는 엄마를 방치한 아버지 안셀모(헥터 엘터리오)를 증오한다. 아나는 아버지의 물에 독약(이라 믿는 가루)을 탄다. 그리고 그날 밤, 아버지는 복상사로 명을 달리한다. 고아가 된 아나는 이모와 함께 살게 된다. 슬픔에 빠진 아나는 엄마의 환영을 보게 되고, 이모가 엄마의 자리를 대신하려 노력하면 할수록 마음엔 어긋난 미움이 자란다. 아나는 이모 또한 죽기를 바란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모에게 아나는 독이 든 우유를 건넨다. 아침이 밝는다. 그러나 바람과 달리 이모의 목소리가 아나의 아침을 깨운다. 아나는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깨어진 환상 위에서 삶은 계속되리라는 것을. 극장에 불이 켜졌다. 사람들이 다 빠져나간 극장엔 나 혼자였다. 나는 울고 있었다. 왜인지 눈물은 쉽사리 멈추지 않았다.

밖으로 나오니 밤이었다. 쉽사리 걸음을 뗄 수 없어 발밑 그림자를 마주 보았다. 영화에 흐르던 노래 <Porque te vas>(그대는 왜 떠나시나요?)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대는 왜 떠나시나요, 그대는 왜 떠나시나요.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혼자서 길을 찾을 수 있을 만큼 내 키가 자랐단 사실을, 더이상 아빠의 손을 찾지 않아도 된단 사실을 말이다. 한 줄기 바람이 지나갔다. 마음에서 뭔가가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유난히 크고 밝은 달이 거기 있었다. 말로 정리할 수 없는, 삶에 대한 어렴풋한 예감 같은 것이 가슴에 가득 차올랐다. 그것은 마냥 따뜻하지만은 않았지만 아주 단단한 어떤 것이었다.

차성덕 감독. <미쓰 홍당무>(2008)와 <비밀은 없다>(2015)의 스크립터를 거쳐 단편 <사라진 밤>(2011)과 장편 <영주>(2017)를 연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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