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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한국영화⑲] <나랏말싸미> 조철현 감독 - 갈등, 질투, 화해와 협업으로 완성되는 팽팽한 파트너십
김소미 사진 오계옥 2019-01-16

그동안 메가폰을 잡지 않았을 뿐 조철현 감독은 지난 30년 가까이 한국영화계의 성실한 파수꾼으로 이름을 새겼다. 한국영화배급주식회사, 오픈시네마, 씨네월드, 타이거픽쳐스, 영화사 두둥을 거치며 한국영화 제작과 외화 수입에 힘썼고, 그가 자막 번역한 외화의 수만 800편이 넘는다. 특히 기획, 제작, 각본에 두루 참여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들(<황산벌>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평양성> <사도>)을 살피면 역사극의 베테랑이라 할 만하다. 조철현 감독이 이번엔 송강호, 박해일, 전미선 세 배우와 함께 오랫동안 준비해온 훈민정음 이야기를 스크린에 옮긴다. <나랏말싸미>는 한글 창제를 둘러싸고 세종과 신미대사 그리고 소헌왕후의 우아하고도 첨예한 협업을 그려낼 작품이다. 촬영 중반을 훌쩍 넘긴, 지난해 12월 중순 조철현 감독을 만나 데뷔작의 면면에 대해 물었다.

-세종대왕이라는 익숙한 위인에게서 의외의 면모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 <나랏말싸미>의 재미 중 하나가 될 것 같다.

=광화문에 세종대왕 동상이 있는 것처럼, 이미 역사에서 정평이 난 인물을 가능한 한 더 신선하게 조명하는 것이 <나랏말싸미>를 쓰면서 고심한 부분 중 하나였다. 우선은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위인을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백성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소리글자를 창제하겠다는 거대한 목표 앞에서 지쳐 있고, 자기 환멸에 빠져 있는 상태의 세종을 보여주는 것이 영화의 시작이다. 일상에 찌들고, 자기 능력의 한계를 체감하고 우울해하는 등 교과서에서 본 상투적인 모습이 아닌 우리와 똑같은 인간으로 받아들여지기를 바랐다.

-한글 창제의 주역으로 신미대사(박해일)는 비교적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인데,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중국의 압박, 신하들의 반발 같은 요소는 기존 사극에서 숱하게 봐왔기에 진부하게 느껴졌다. 신미대사는 <조선왕조실록>에 67번 정도 언급되지만 단 한번도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멸시 속에서 묘사된 인물이라 눈길이 갔다. 철저한 유교사회이자 억불정책이 거셌던 조선에서 승려는 나쁘게 표현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랏말싸미>는 영화 초반부 팔만대장경 원본을 가져가려는 일본 대사들과 신미대사가 산스크리트어로 담판을 지으면서 세종과 인연을 맺는 과정을 보여준다. 불교 경전을 이루는 인도의 고어인 산스크리트어는 아시아 소리글자들의 기반이 된 언어인데, 언어학을 광범위하게 연구했던 세종이 이를 알아보고 신미대사를 한글 창제의 파트너로 삼는다.

-핵심 파트너이면서 한편으로는 끊임없이 긴장 관계를 형성하는 인물 구도가 흥미롭다.

=감독으로서 바람은 마지막 장면까지 두 인간의 날 선 기싸움이 힘을 잃지 않았으면 하는 점이다. 이른바 ‘브로맨스’는 경계하고 있다. 세종과 신미대사는 동료이면서 경쟁자이기도 한 다층적인 관계를 형성해나간다. 신미대사 집안이 세종 집안에 의해 몰락한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원수 집안의 자식들이 만난 모양새다. 끊임없는 갈등, 질투 그리고 화해와 협업을 통해 두 사람 모두 인간적으로 성숙해진다. 조선에서 왕과 중은 각각 가장 고귀한 신분과 가장 천한 신분 아닌가. 이 두 사람이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이상한 상황인데, 둘은 상대를 폄하하거나 찍어누르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팽팽하게 대립을 유지하려 한다. 송강호, 박해일 배우 모두 시나리오가 요구하는 것에 비해 감정 표현을 절제하는 것이 보였다. 배우들이 만들어낸 격조가 있달까. 나도 모니터를 지켜보면서 결국 배우들의 해석이 맞다고 결론내렸다.

-<사도>(2015)에서 영조를 연기했던 송강호가 이번엔 세종으로 변신했다.

=처음엔 송강호 배우가 이 영화를 안 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했다. 한 사람이 가까운 시기에 조선시대의 두 왕을 연기한다는 것. 쉽지 않은 일이다. 의상·분장 테스트 촬영부터 지금까지 과연 세종만의 어떤 기질과 이미지가 영화 속에서 특별하게 전달될 수 있을지 송강호 배우와 내가 굉장히 신경 쓰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결과적으로 <나랏말싸미>의 송강호는 <사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이다. 위대한 배우란 이런 걸까 싶을 정도로.

-박해일을 캐스팅한 건 신미대사 하면 얼핏 떠오르는 이미지보다 좀더 젊은 느낌으로 캐릭터를 설정한 것 같은데.

=워낙 같이 작업해보고 싶었던 배우다. 송강호, 박해일 배우가 평소에 친분이 있던 터라 세종 캐스팅 이후 영화 이야기를 할 때 사석에서 박해일 배우를 잠깐 만난 적 있다. 송강호 배우에 대한 전적인 신뢰가 작용했는지, 기회를 달라는 내 부탁에 덥석 응했다. 삭발도 전혀 문제가 안 된다고 흔쾌히 답할 정도였다. 곡성의 한 절에서 중요한 장면을 4일 정도 찍었는데, 차가 다니는 도로에서 산사까지 3km 정도 이어지는 산길을 박해일 배우가 매일 아침 혼자서 롱패딩을 입고 걸어다녔다. 스님들이 절과 세속을 걸어서 오가는 과정을 배우가 직접 실천하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전미선 배우가 연기한 소헌왕후는 어떤 모습을 보여줄까.

=<사도>의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스스로 이야기가 가장 진전되었다고 느꼈을 때가 인원왕후-영빈-혜경궁 홍씨로 이어지는 여성 캐릭터들이 자리잡은 순간이었다.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에 또 다른 그룹이 자기 주체성을 드러냄으로써 삼각축이 완성됐다. <나랏말싸미>에서도 소헌왕후가 한글 창제의 핵심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의 아버지도 역적으로 지목당해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신미대사와 세종 사이를 효과적으로 중재하기도 한다. 남성들의 일대일 관계는 자칫 세상사를 이분법으로만 보게 만든다. 소헌왕후로 인해 더욱 팽팽한 트라이앵글이 형성되고, <나랏말싸미>는 이렇게 외부적 갈등이 아니라 내부 인물들끼리 어떤 관계를 형성하느냐가 영화의 핵심을 이룬다.

<나랏말싸미>

감독 조철현 / 출연 송강호, 박해일, 전미선 / 제작 영화사 두둥 / 배급 메가박스중앙(주)플러스엠 / 개봉 2019년 여름

● 시놉시스_ 한문과 한자 언어에 기반한 지식 독점에 의해 기득권이 유지되던 조선. 온 백성이 평등하게 지식을 나누는 사회를 꿈꾸며 새로운 소리글자를 창제하려는 세종(송강호)은 깊은 고뇌에 빠진다. 이 시기, 팔만대장경의 원본을 가져가겠다는 일본 사신들에 맞서 싸우기 위해 소헌왕후(전미선)가 언어 능력이 출중한 신미대사(박해일)를 불러들인다. 조선에서 가장 귀한 자인 왕과 가장 천한 자인 중의 만남. 한글 창제를 둘러싼 이들의 파트너십이 치열하게 펼쳐진다.

● 유려한 빛이 스며드는 조선의 궁궐과 사찰_ 조철현 감독은 “기존의 사극과 차별화를 꾀하면서 작품 내적으로는 일관성을 유지하는” <나랏말싸미>의 미장센에 기대를 걸어도 좋다고 말한다. 특히 조선시대 궁궐과 사찰 특유의 창을 활용해 빛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예정이라고. 바깥에서 보면 하얀 창호지에 불과하지만 실내에 앉아 있는 인물을 통해 빛의 깊이를 체감하는 경험을 할 수 있다. “순광 속에서는 편안한 풍경처럼 인물이 비쳐지는 데 반해 역광속에서는 공간과 인물이 분리되는 느낌이 자연스럽게 드라마틱한 긴장감을 형성한다.” 로케이션을 이동할 때마다 조금씩 변주되고 반복되는 빛의 미장센은 영화적인 방식으로 역사를 이야기하고 싶다는 조철현 감독의 바람을 잘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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