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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버나움> 나는 고발한다. 고로 존재한다

존재의 영화적 증명

어떻게 하면 빈곤의 이미지에서 동정을 구하지 않고 사람들을 찌를 수 있을까. 빈민을 다룬 최근 영화들을 보면 각국 영화 제작자들이 같은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불쌍한 이미지가 넘쳐서 사람들이 더는 그에 자극받지 않기 때문인지, 사람들이 빈민을 보고 싶어 하지 않기에 다른 전략을 쓰는 것인지 불분명하다. 빈민을 다룬 영화를 볼 때, 관객은 무의식적으로 다른 보기 방식을 적용한다. 현실을 잊는 대신, 현실에서 나의 위치를 그대로 가지고 들어가 영화를 본다. 영화를 보는 이유는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이 담기기 때문이며, 극영화인 이상 날것 그대로를 보여주진 않을 거란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즉, 현실에 대한 예감과 극화에 대한 신뢰가 동시에 작동한다. 영화 제작자가 고민하는 부분도 이것이다. 주인공에 대한 타자화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어떻게 그리고 무엇을 보여줄 것인가.

<가버나움>이 취한 전략은 두 가지다. 소년의 말, 소년의 자세다. 이 영화는 자인 알 라피아가 연기한 자인 캐릭터와 연기에 상당 부분 기댄다. 첫 장면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건 좌우로 넓은 프레임을 아래위로 꽉 채운 채 서 있는 자인(자인 알 라피아)의 자세다. 자인의 몸은 가난한 난민 소년의 이미지를 깨고 들어온다. 물론 그의 몸은 작고 말랐다. 하지만 약간 비스듬히, 심지어 삐딱하게 보이는 그의 자세는 단단한 아우라를 뿜어낸다. 그가 생애 처음으로 연기한 실제 시리아 난민이라는 사실은 그의 스타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다만 이를 모순적으로 인식하게 한다. 나딘 라바키 감독이 자인을 캐스팅한 이유도 그가 실제 ‘난민처럼’ 보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에게서 어떤 카리스마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때로 영화는 그의 스타성을 일부러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운영을 멈춘 놀이기구에 몸을 구겨 넣고 멍하니 앉은 자인의 모습은 마치 화보 같다. 그는 종종 이처럼 아무것도 하지 않고 무언가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자인의 꾹 다문 입과 매서운 눈빛이 빛을 발하는 순간은 그가 무언가를 행할 때가 아니라,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다. 아니 무언가를 행할 때조차도 그의 얼굴은 행위 사이에 포즈를 만들어 그의 생각을, 그의 개성을, 고로 그의 존재를 증명한다.

자인의 말에 관해서는 조금 긴 우회로를 택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자인의 말에 힘을 싣는 것은 배우의 힘이라기보다는 영화적으로 계산된, 오직 캐릭터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자인이 공개적으로 부모를 고소하면서 시작된다. 자인은 그가 ‘개새끼’라 칭하기를 고집하는 누군가를 찌른 혐의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다. 관객은 ‘그가 왜 범죄자가 되었을까’와 ‘왜 부모를 고소했을까’라는 두 가지 질문을 안고, 마치 증거 자료처럼 제시된 자인의 삶을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막상 제시된 이야기의 내용은 관객의 기대를 배반한다. 이야기의 중심은 자인이 아니라 자인의 11살 난 동생 사하르(하이타 아이잠)의 사연이다. 부모는 생계를 위해 사하르를 매매혼으로 팔아넘기려 한다. 자인과 사하르는 극렬히 저항하나 이를 막지 못한다. 자인은 사하르를 대신해 고발자의 자리에 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거기까지. 이후 전개되는 이야기는 사하르와 자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자인이 가출하면서 만난 불법체류자 라힐(요르다노스 시프로)과 그가 낳은 한 살배기 아기 요나스(보루와티프 트레저 반콜)의 이야기로 옮겨간다. 영화에서 가장 자극적이며 슬픈 사연인 사하르의 이야기는 잠시 보류된다. 영화의 두축을 이루는 이야기는 자인이 연루되었다는 점을 제외하면 어떤 연결 지점도 없이 평행하다. 그런데 이 영화가 두 이야기를 별개로 다루려는 것 같지는 않다. 법정 증언자 중 하나로 라힐을 세우면서 사하르의 이야기가 중단된 자리에 라힐의 이야기가 들어오도록 배치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이야기의 포인트는 라힐이 아니라 자인이다.

일자리를 구하는 데 실패한 자인은 그 과정에서 만난 에티오피아 난민 라힐의 집에 기거하게 된다. 불법체류자인 라힐은 아기가 있다는 사실을 들키면 일자리에서 쫓겨나게 될까봐 아기 요나스를 가방 속에 숨기고 몰래 보살펴왔다. 이후 라힐이 실종되면서 자인이 요나스의 생계까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자인은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듯 얼음에 설탕을 섞어 요나스와 나눠 먹거나, 어머니에게 배운 대로 약을 탄 물을 팔기도 한다. 요나스가 실수로 먹는 상황을 방지하기 위해 한쪽 발을 묶어두는 것도 어머니가 그의 어린 동생에게 했던 대로 따른 것이다. 이러한 상황의 의미는 자인이 어머니와 같은 입장에서 아기를 길러낼 수 있을지 체험해보는 것도 같다. “나 외엔 누구도 나를 비난할 수 없다”는 어머니의 법정 증언에 조금이라도 마음이 동했다면, 자인을 통해 그녀의 과거를 간접체험한 때문일 수 있다.

그러나 자인의 이런 경험은 부모(들)를 이해하는 것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의 것으로 남는다. 라힐이 요나스의 첫돌을 축하하기 위해 케이크를 집으로 들고 왔을 때, 아직 불을 끌 수 없는 요나스를 대신해 자인이 촛불을 끈다. 이때 자인은 처음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는다. 생일을 알지 못했기에 한번도 축하하지 못했을 자인은 그 순간에야 비로소 태어난 것 같다. 이때 자인과 요나스 사이의 비슷한 운명의 끈이 생성된다. 라힐이 체포되었다는 사실을 알 리 없는 자인은 “너희 엄마는 더 나빠”라고 요나스에게 말한다. 자인은 시장에서 꽃 뭉치를 팔며 스웨덴으로 이민 가길 꿈꾸는 또래 소녀 메이소운(파라 하스노)을 만나 교류하기도 한다.

법정 증언 전에 자인은 생방송으로 진행되는 시청자 전화 연결 프로그램을 통해 자신의 부모를 고발한다. 어머니가 또다시 임신한 사실을 안 뒤다. 그의 사연이 주목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동정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는 센세이셔널한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이때 그가 비난한 이는 자신의 부모만이 아니라, 아이를 돌보지 않는 모든 부모다. 그의 말에 교도소에 있던 다른 소년들은 일제히 환호한다. 자인의 말은 처음에는 자인과 부모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나온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동생의 삶을 지켜보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키우는 경험을 한 자인은 죽은 아이, 살아남은 아이, 갓난아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대변해 말한다. 영화는 한 아이와 한 가정의 사연에 집중할 거란 예상을 깨고 나아가면서 착취적인 재현에서 벗어난다. 그러면서도 자인이 가진 캐릭터의 힘을 굳건히 지킨다. 12살이 되도록 출생신고가 되지 않은 자인은 아직 태어나지 않은, 없는 존재다. 적어도 서류상으로는 어머니 배 속의 태아와 유사하다. 부모를 향한 고발은 태아를 대신해 태어나지 않겠다고 말하는 강렬한 선언이다.

그가 선언을 통해 태어나기를 포기하는 순간, 사회적인 존재 증명에 성공하며 비로소 태어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해피엔딩처럼 보이는 마지막은 태어남의 비극에 대한 보류일까. 아이러니한 것은 또 있다. 부모를 고발한 자인의 말이 관객을 끄는 강력한 홍보 문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만약 <가버나움>을 둘러싼 불편함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면, 우리가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이 그것을 어떻게 정의하든 결국 영화적 쾌락에 거는 기대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영화는 캐치프레이즈에 가까운 소년의 말로 이를 이용하는 동시에, 반성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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