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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 한석규 - 독을 마시다
이화정 사진 오계옥 2019-03-12

대중의 눈에 비친 정치인 구명회는 매사 빈틈없는 이상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아들이 낸 교통사고로 피해자가 생기면서 그의 ‘본색’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단순히 ‘뒤가 구린 정치인’으로 규정하기엔 이 남자의 판단과 행동은 복잡미묘하다. 그의 본심은, 본성은 무엇일까. 한석규는 미동 없는 침착한 표정 하나로 구명회의 온갖 뒤틀린 ‘악행’을 표출한다. 애써 큰 힘을 쓰는 것 같지도 않은데 <우상>의 구명회는 연기의 기술이 아니라 그간 한석규가 고수해온 연기의 철학, 방법론을 통한 내공이 여실히 드러나는, 그에게 마침맞은 캐릭터다. 시나리오를 읽고 난 후 “독을 마신 기분”이 들었다는 그에게 <우상>의 쓴맛을 넘기며 생각한 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우상>의 어떤 점이 마음을 끌었나.

=뭔가 쑤셔대는 영화였다. 이수진 감독의 전작 <한공주>(2013)를 보고 너무 힘들지 않았나. <우상>은 거기서 더 나간 것 같다. 쓰디쓴 독! 넘기는데 너무 고통스러운 독을 마시는 거다. 희망, 사랑을 통해 주제를 전달하는 영화도 있지만 이 작품은 정반대의 방법으로 주제를 전달하는 영화다. 특히 “몹쓸병에 걸렸는데 아프지 않으니까”라는 영화의 대사가 마음을 움직였다. 이 영화의 모든 등장인물이 다 환자다. 이수진 감독처럼 집요한 사람이 허투루 하지 않고 정성을 다해 등장인물을 물고 늘어졌다. 병든 그 인물들에게서 아픈 현재가 보였다. 감독이 이 고통을 통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말이 있구나 싶더라.

-구명회라는 인물은 단순히 ‘악인’으로 정의될 수 없는 입체적 인물이다.

=구명회는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달리지만 계속 변화한다. 그런데 그가 달리는 방향이 진화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는 퇴화의 방향이다. 바이러스에 감염됐는데, 자기 나름대로 몸속에 들어온 병균에 ‘액션’을 취하려 한다면, 구명회가 하는 행동은 일종의 상황에 대처하는 ‘리액션’이다. 몸이 아프면 병원에 가면 되지만, 2019년을 사는 현대인인 그는 생각에 병이 들었다. 그걸 누가 체크해줄까.

-구명회는 악행을 저지르는 실체를 벗어나 대중 앞에서는 다른 모습으로 포장된다. 배우의 시간을 돌아볼 때, 대중에게 이상화된다는 측면에서는 공감 가는 지점이 있었을 것 같다.

=구명회 같은 정치인이나 우리 같은 연예인은 늘 포장된 채 사는 직업군이고 화면에 나오니 그런 모습이 더 자주 보인다. 자기도 모르게 서서히 빠져든다. 그런데 몰랐느냐? 모르지 않았다. 자기가 그걸 택한다. 조금씩 조금씩 자신을 파묻는 거다. 그래서 이 작품이 말하는 바가 섬뜩하게 다가온다. 글로 봤을 때도 그 점이 더없이 강렬하더라. 나 역시 항상 그 부분이 각별히 마음을 잡는다. 뭐가 중한지를 알려고, 늘 생각하려고 하는 거지. (웃음) 핵심은 부끄러움인 것 같다. 부끄러운 짓 하지 말자는 생각을 늘 한다.

-중식(설경구)이 감정적으로 움직인다면, 구명회는 늘 합리적 판단에 따라 자신의 입지에 최소한의 타격을 주는 방향으로 움직인다. 그의 판단은 그래서 작고, 행동은 미세하다. 그 감정의 변화를 캐릭터로 표현해야 했다.

=결국 연기를 통해 그걸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점점 환자가 되어가는 한 인간. 무언가에 취해서, 홀려서.

-이수진 감독이 그 모습을 두고, “한석규 배우는 가늘고 유연한 긴 침 같다. 어느샌가 깊숙이 들어와 있다”라고 했다.

=선이 얇으면서 다양한 스타일의 연기. 내 연기의 화두를 스스로 그렇게 잡았다. 연기 시작할 때부터 디테일을 잡되 어떻게 하면 뭘 더 ‘안 할지’에 집중했다.

-한석규라는 배우의 기존의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 기존과 확연히 다른 자연스러운 연기가 그 방법론에서 나왔겠구나 싶다.

=물론 내 방법이 정답은 아니다. 그런데 20대 때 보고 느끼고 비판하면서 한 연기의 출발이 그거였다. 그게 ‘새로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도 어떻게 하면 안 할까. 어려운 건 내 속에서 다 삭이고 어떻게 하면 쉽게 말할지를 고민한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도 겉으로 드러나는 리액션은 쉽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가 쉽게 전달하는 이야기, 그 속은 얼마나 심오한지 생각하게 된다.

-올해는 <우상>에 이어 <천문: 하늘에 묻는다>(가제)도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최근 들어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는 셈이다. (웃음)

=따져보니 24년 동안 24편의 영화를 찍었다. 공백기도 있었지만, 평균 1년에 한편씩 찍은 셈이다. 20~30대 때는 영화를 왜 하느냐고 자문하면 무언가를 남긴다는 생각이 컸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남기긴 뭘 남기나 싶다. (웃음) 지금 다시 영화를 왜 했는지, 왜 지금도 하고 있는지 생각해보면 한국영화에 대한 믿음 때문인 것 같다. 영화라는 결과물은 그냥 나오지 않는다. 한편의 영화에는 그 시대가 담겨 있다. <우상> 역시 그런 부분이 반영된 결과물이고. 한때는 잊어버리기도 하고, 지치기도 하고, 또 자만심이 생겼을 때도 있었지만, 늘 새로운 영화, 뉴 코리안 시네마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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