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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캡틴
김혜리 2019-03-20

*<캡틴 마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캡틴 마블>

머리칼이 불꽃 모양으로 일렁이고 눈은 한쌍의 화이트 홀처럼 빛나고 팔다리는 열기를 뿜어낸다.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저 슈퍼 파워의 진부한 만화적 묘사로 보였던, 각성한 캡틴 마블(브리 라슨)의 이미지는 놀라운 해방감을 자아낸다. 이 이미지는 “만약 내가 자유로워진다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여성 일반의 잠재된 자문에 대한 강력한 외마디소리 답변이기 때문이다. 캐롤 댄버스(브리 라슨)가 캡틴 마블로 도약하는 계기는 외적으로 주어지는 에너지가 아니라 언제나 내면에 품고 있던 뇌관에서 안전핀을 뽑는 결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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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마블>이 전환점을 맞이하기까지 캐롤(브리 라슨)은 이중의 가짜 정체성에 갇혀 있다. ‘남성성이 곧 인간성’이라고 암시하는 교육을 믿고 여성적 파워를 억누르고 있는 동시에, 지구인으로서 정체성을 제거당한 채 크리족의 모범적 전사가 되고자 노력한다. 관객 역시 크리족의 세계관에 따라, 할리우드 상업영화의 관습에 길든 대로 귀가 뾰족하고 피부가 푸른 고블린 형상의 스크럴족이 각 행성에 침투해 사회를 전복하는 테러리스트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스크럴족의 지도자 탈로스 장군(벤 멘델슨)이 진술하고 곧이어 사건 전개가 입증하는 진실은 딴판이다. 스크럴족은 크리족 세력의 침공으로 고향을 파괴당하고 정착지를 찾아 떠도는 난민일 뿐이다. 연대상 뒷날 <토르: 라그나로크>(2017)에서 아스가르드인들도 맞이하게 될 운명이다. 대사로 짐작건대 크리족이 스크럴족을 혐오하는 이유는, 접촉하는 다양한 대상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는 그들의 능력에 있다. 슈프림 인텔리전스라 불리는 반박 불가한 절대 이성이 지배하고 첨단 군사력을 보유한 크리족은, 엘리트주의를 신봉하는 파시스트 사회의 특성을 보인다. 스스로를 고귀한 영웅의 종족이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스크럴족의 유동적 정체성은, 유일무이해야만 하는 진실과 정의를 교란하는 부도덕한 속성으로 간주된다. 타자와 동화하고 비슷하게 둔갑해서 토박이와 이주민을 분리하기 어렵게 만드는 스크럴족은, 크리족의 관점으로 볼 때 태생적으로 세계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종족이므로 절멸시키는 것 외에 대응책이 있을 수 없다. (이 모든 스크럴족에 관한 설정은, 과거 반유대주의를 위시한 이민에 반대하는 주장을 상기시킨다.) 크리족의 과학자 마벨(아네트 베닝)은 반역자의 낙인을 감수하고 본인의 신념을 새로운 조국으로 선택했고 마벨의 이름을 계승한 캡틴 마블도 아마 C-53행성만의 영웅을 넘어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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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라는 점을 빼고 뭐가 특별한가?”

<캡틴 마블>에 많은 관객이 던지는 질문이지만 슈퍼히어로로서 캐롤이 지닌 차별성의 대부분은 역으로 여성이라는 점에서 비롯된다. 젠더는 하나의 차이점이 아니라 수많은 특질의 발원이자 특질들이 연결되는 방식이고, 세상을 파악하는 다른 시점과 감각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능력보다 능력의 컨트롤이 중요하다는 가르침을 받는 슈퍼히어로는 캡틴 마블이 최초가 아니다. 단 남성 영웅들에게 이 규칙은 대체로 “큰 힘에 따르는 큰 책임”이라는 도덕적 규율로 작동했다. 반면 캐롤은 제어되지 않은 힘은 곧장 그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흉기라고 배운다. 캐롤은 거대한 힘이 직접적으로 본인을 해치고 아군에 피해를 끼치고 커리어를 망칠 거라는 경고를 받는다. 토르는 당연한 권리로 묠니르를 물려받고, 캡틴 아메리카는 국가가 만들어준 방패를 받지만 그것을 살살 쓰라는 주의사항이 따라오지는 않는다. 군수기업가 토니 스타크는 아이언맨 슈트를 개발한 다음 막대한 자산을 활용해 더 강력한 슈트를 더 많이 생산해도 그것 때문에 영웅의 자격을 의심받지 않는다. 헐크는 “참아야 한다”는 주문을 가장 많이 되뇌는 히어로지만 엄밀히 말해 브루스 배너와 헐크는 분리된 자아라고 할 수 있다. 대뜸 ‘최강’이라고 설정만 했다고 여타 어벤저스보다 우월하고 타노스를 위협하다니, 여성 히어로의 무임승차 아니냐는 불평도 있을 법하다. 그러나 캡틴 마블은 태초부터 품고 있던 힘을 고삐에서 풀었기에 존재 전체가 전인미답의 에너지 덩어리이고 따라서 특별한 무기와 아이템이 필요 없는 영웅일 수도 있다. 또한 캐롤의 파워는 기원담인 <캡틴 마블>이 진행되는 동안 계속 자라난다. 싸울수록 강해진다. 우연히도 영화에는 우주선 등 공간 안쪽에서 바깥으로 밀려나간 캐롤이 안간힘을 다해 문에 매달리는 장면이 은유처럼 서너 차례 등장한다. 밖으로 떨쳐내려는 힘에 매번 저항한 캐롤은 본인의 슈트만으로 대기권 안팎을 드나들며 자유자재로 전투를 벌이고, 결말에 이르면 마침내 슈트도 헬멧도 벗어던진 평상의 차림으로 우주공간에 유유히 존재한다. 록밴드 티셔츠와 청바지, 항공 점퍼. 캐롤 댄버스의 평상복은 정말 평상복이다. 지구인의 복장이 필요해진 캐롤은 옷 가게에 진열된 여성복 중에서도 제일 간편한 착장을 훔쳐 걸친다. 크리족 스타포스 부대 유니폼에서 유래한 캡틴 마블의 슈트는 기존 여성 전사들의 그것에 비하면 몸을 조이기보다 보호하고 가슴 윤곽을 드러내는 데에 미련이 없는 디자인이다. 안젤리나 졸리, 스칼렛 요한슨, 갤 가돗 등 할리우드는 소위 ‘여신급’의 초현실적 외모를 가진 배우들을 액션 히로인으로 캐스팅해왔다. 그들과 비교해 (세 배우의 캐릭터를 깎아내리고자 함이 아니라) 브리 라슨의 접근 가능한 부류의 아름다움과 카리스마는 보통 여자들 안의 힘을 일깨우는 데에 적합하다. 영화의 마스코트인 고양이 구스와 귀여운 광경을 연출하는 캐릭터가 캐롤이 아닌 닉 퓨리(새뮤얼 L. 잭슨)라는 사실도 작지만 인상적이다. 전투기에 동승한 구스가 조종석에 올라오자 캐롤은 덤덤히 밀어낸다. 혀 짧은 소리로 고양이를 어르는 쪽은 닉 퓨리다. 캐롤은 상대가 동물이건 사람이건 호감을 사려고 애쓸 줄 모르는 인물이다.

지구로 돌아간 캐롤은 혈연을 찾는 데에 관심이 없다. 그를 맞는 가족은, 금지된 전투기 조종을 함께 꿈꿨던 친구 마리아(라샤나 린치)와 11살 딸 모니카(아키라 아크바)다. 캐롤에게 ‘말썽쟁이 중령’으로 불리는 모니카 램보는 코믹스 세계에서는 또 다른 캡틴 마블의 이름이기도 하다. 초능력이 없으면 제 손으로 우주선을 지어서 캐롤 이모와 랑데부하면 된다고 자신하는 이 소녀에 관해 마블의 복안이 있을 법하다. 본편이 끝난 다음 첫 번째 쿠키는 다가오는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캡틴 마블이 어떻게 조커로 합류할지 예고한다. 아주 짧은 상황이지만, 암중모색 중인 히어로들 사이에서 결정을 내리고 있는 인물은 블랙 위도우(스칼렛 요한슨)다. 마블 스튜디오의 수장 케빈 파이기의 거대한 화이트보드 한쪽에 ‘미래는 여성’(Future is female)이라는 메모가 붙어 있대도 그리 놀랍진 않을 것이다.

<콜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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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어머니

<콜레트>에서 작가 콜레트(키라 나이틀리)의 어머니를 연기하는 피오나 쇼는 우리에겐 <해리 포터> 시리즈의 야박한 이모 페투니아 역으로 친숙하지만 실상은 올리비에상을 두 차례 수상한,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배우 겸 연출자다. 캐스팅의 무게가 말하듯, 실존 인물 아델 외제니 시도니 콜레트는 비범한 19세기 여성이었다. 동성애를 포함해 자유로운 사랑을 지지하는 급진적 철학과 공화주의를 신봉하는 상인 가정에서 자랐으나 22살에 폭력적인 지주와 중매로 결혼한 그는 결국 퇴역군인과 사랑에 빠졌고 남편이 죽자 애인과 재혼해 콜레트를 낳았다. 자연 속에서 주체적 개인으로 자라도록 독려한 시도의 교육은, 콜레트의 사상과 문체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평가된다. 영화에서 시도는 사위 윌리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회의적 거리를 두는 모습을 보인다. 오페라 <라 토스카>를 깎아내리는 윌리의 장광설에 “직접 보고 판단하겠네”라고 대꾸하는 도입부 장면이 단적인 예다. 결혼의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딸에게 이혼을 포함한 과감한 선택을 권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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