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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룬 파로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에 대해

이미지의 (불)가능성

(사진 씨네21 사진팀)

‘홀로코스트’와 ‘아름다움’을 결합할 수 있을까? 부당하기 짝이 없는 질문 같지만 바보처럼 답변의 과정을 일일이 캐묻기로 하자. 두 단어를 함께 거론하는 것은 (불)가능한가?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정당성은 어떻게 입증될 것이며, 불가능하다면 그 금기는 무엇을 근거로 성립할 수 있는가. 후자의 견해를 따른다면 우리는 상식적이고 단호한 결론에 도달한다. 아우슈비츠의 참극은 반인륜적인 집단 학살로, 인류 역사의 전무후무한 블랙홀이다. 그곳에서 발생한 것은 “삶과 죽음의 바깥(한나 아렌트)”에 있는 영역이며 침묵조차 버겁게 만드는 육중한 사태다. 이를 ‘아름다움’이라는 공허한 미적 언어와 연관 짓는 것은 비열한 상상이자 포르노그래피적 극화라는 것이다. 수용소의 재앙이 사고와 언어, 표상의 일대 위기를 가져왔다는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언급은 전후의 서구 예술 체계가 직면한 문제의식을 집약한다.

평균적인 교양과 의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이런 견해에 동의하지 않기란 쉽지 않다. 차마 반론을 제기할 수나 있을까? 타인의 죽음을 미학으로 다루려는 작업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짚어낸 명제에 대해서? 그러나 이미지의 재현과 표상에 제한을 두는 관점을 영상 매체에 관한 실천적 명제로 설정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우리는 끔찍한 순간을 떠올리고 마주하는 데 언제나 곤혹스러움을 느끼지만, 영상은 결코 금지를 수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끔찍한 이미지는 언제든지 출현한다. 지금이 아니라면 다음에 되돌아올 것이다. “증명할 수 없지만 아우슈비츠는 필름카메라에 담겼다”라고 말하는 장 뤽 고다르의 확증 없는 확신은 이런 맥락에서 주의 깊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은 언젠가 마주할 수밖에 없는 ‘추한’ 표상과의 잠정적인 대면의 시간을 설정하는 저항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아우슈비츠와 영화의 관계를 둘러싼 역설이 발생한다. 아우슈비츠는 모든 표상을 금지하려던 기획이지만, 카메라는 대상이 무엇이건 가시적으로 나타내 보이는 매체이다. 그러므로 표상의 금기라는 맹목적 진단에 균열을 일으키는 두 명의 영화작가가 출현한다. 하나는 앞서 언급한 고다르이고, 다른 하나는 하룬 파로키이다. 전자가 <영화사> 1A 파트에서 조지 스티븐슨의 <젊은이의 양지>에 나오는 두 남녀가 호수에서 애정을 나누는 장면을 홀로코스트의 학살 이미지와 결합한다면, 후자는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의 한 장면에서 아우슈비츠에서 촬영된 한 장의 사진 속에 담긴 어느 유대인 여성의 표정을 포착하면서 이것이 남성들의 시선에 대응하는 매력적인 여인의 반응이라는 내레이션을 덧붙인다. 고다르의 표현을 빌려 이런 몽타주의 용법을 ‘역사적 몽타주’로 분류할 수 있을 테지만 여기서는 파로키가 제시하는 이미지와 텍스트의 결합에 대해 집중해서 말하고 싶다.

하룬 파로키는 카메라를 의식하는 사진 속 여인의 시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시선을 통해 그녀는 자신을 다른 장소에 옮겨놓는다. 가로수, 신사, 상점의 쇼윈도가 있는, 이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으로 말이다.” 죽음의 수용소에서 찍힌 잔혹한 기록을 거리에서 마주친 남녀가 눈짓을 교환하는 평범한 상황과 연결하는 파로키의 논리를 선뜻 이해하기는 힘들다. 여인의 시선이 담긴 스틸샷을 촬영한 주체는 나치 병사일 것이다. 이 사진은 피사체를 살해한 자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기록이다. 그런 이미지를 평화로운 일상의 풍경과 나란히 병치하는 상상의 근거가 무엇인지, 둘의 결합이 어떤 의미를 산출해내는지 즉각적으로 판단하기 어렵다. 또한 사진 속 여성이 짓는 찰나의 표정이 특정한 의미로 작용하는지도 분명치 않다. 필름 사진에 우연히 나타난 얼굴에서 남성적 시선에 대응하는 피사체의 매혹적인 면모를 읽어내는 것은 타당성을 증명해낼 수 없는 자의적 해석처럼 느껴진다. 표상 장치인 영화의 역량을 (다소 과장되게) 역설하기 위함이라 해도, 죽음과 일상의 이미지를 이런 식으로 조직하는 논리는 불가피하게 당혹스러움을 안겨준다.

<하룬 파로키-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전시 포스터.

주목해야 할 것은 영화가 선택한 이미지의 모순적인 측면이다. 파로키는 시선을 훔치면서 보존하는 카메라의 이중적 성격을 들여다본다. 여인이 찍힌 사진은 그녀의 생명을 약탈하는 순간이면서 동시에 대상의 표상을 보존해낸 기록이라는 것이다. 파괴와 보존이라는 이중의 작용이 일정한 시차를 두고 이미지의 표면과 이면에 기묘하게 새겨진다. “이미지는 두 개의 관점이 세 번째 관점의 시선과 마주할 때 전제되는 복합성에 따라 펼쳐진다”라고 지적한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의 문장을 빌려, 이 장면에서는 서로를 마주하는 두 개의 시선이 발생하고 그들을 교차하는 세 번째 시선이 암시된다. 즉 유대인 여성을 담아낸 카메라의 시선과 카메라에 대응하는 여성의 시선, 그리고 이들을 매개하는 파로키의 카메라가 건네는 시각이 하나의 이미지를 통해 접속하는 것이다.

이미지에 붙들린 시점과 맥락의 불확정성은 이 장면에만 귀속된 것은 아니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에서 유대인 여성의 초상은 몇 번이고 반복해서 영화에 배치되는데, 이와 유사한 지위로 다뤄지는 이미지가 1944년 연합군의 항공사진이 포착한 수용소의 기록이다. 파로키에 따르면 누구도 이 범상한 풍경사진에 주목하지 않았지만, 촬영된 지 수십 년이 지난 뒤 CIA의 연구를 통해 그것이 수용소의 모습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한다. 고다르의 주장은 예시적이었다. 아우슈비츠는 필름에 담겨 있었다. 우리가 발견하지 않았고, 영화적 표상으로 수립하지 않는 이중의 실패를 치렀을 뿐이다. 이 대목에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건 이미지에 남겨진 시대착오적인 잔상이다. 카메라가 관측했지만, 우리가 발견하지 못한 것. 공간 내부에 잠재해 있었지만 반응하지 못한 것을 영화의 내부로 침투시키며 파로키는 우리의 현재와 이미지의 흔적을 수평적으로 배열한다. 그러니 파로키가 보여주는 이미지의 변주는 잊혀진 기억을 되살리기 위함이 아니라, 표상에 고착되어 있는 고정된 맥락을 수정하기 위해서, 그리하여 표상의 중단이라는 사태에 저항하기 위해 시도되는 것이다.

더불어 파로키는 아우슈비츠 여성의 초상을 우리가 머무는 일상의 장소와 연결하면서, 이곳이 아닌 다른 장소에 존재하는 여성들의 초상과 결합한다. 그 대상은 알제리 여성들의 맨얼굴이다. 영화는 알제리 여성들의 초상이 사진으로 기록된 맥락을 설명하면서(1960년대 프랑스는 신분등록을 위해 베일을 벗은 맨얼굴의 여성들을 카메라 앞에 세웠다고 한다.) 하룬 파로키의 손을 빌려 그녀들의 사진 일부를 가린다. 파로키의 손은 여성들의 입을 가리고 눈을 보여주는데, 이때 다음과 같은 내레이션이 들려온다. “그들의 입은 시선에 익숙하지 않지만, 그들의 눈은 낯선 시선을 마주하는 데 익숙할 것이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

손으로 사진 속 여성의 입을 가리는 파로키의 액션은 단지 이름이 없고, 표상으로 가시화되지 않은 주변적인 존재들에게 ‘익숙한’ 얼굴을 되돌려주는 시도가 아니다. 촬영한 자에게 배타적으로 권리가 주어지는 이미지의 법과 규범을 월경하여 촬영된 이들에게 이미지의 기억을 제공한다는 해석도 충분치 않다. 파로키의 손짓은 오히려 스스로 구성한 몽타주의 조건을 다시 한번 갱신하고자 한다. 아우슈비츠 여성의 표정과 병치된 알제리 여성들의 얼굴을 눈과 입으로 나누어 (재)몽타주하는 것이다. 이처럼 파로키가 창안하는 몽타주는 확정적인 의미의 영역에 안착하지 않고 친숙함과 낯섦, 가시성과 비가시성이 혼합된 형태를 이룬다. 다시 말해 파로키에게 두 이미지의 몽타주란 연결과 절단을 결합하는 역설적인 원리이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가 시도하는 몽타주는 (고다르의 영화 제목을 빌려) ‘여기’와 ‘저기’의 돌연한 마주침으로 성립하고 증식한다. 영화에서 특별히 엇비슷한 횟수로 반복되는 몇 개의 시퀀스가 나온다. 모델의 얼굴에 화장을 덧칠하고 지워내기를 반복하는 손, 피사체를 앞에 두고 그림을 그리는 손, 현미경으로 대상을 관측하는 연구원들의 눈, 사진 이미지를 관측하는 파로키의 눈의 활동이 그런 장면들이다. ‘저기’에 카메라 렌즈에 무심코 노출된 타인의 얼굴과 몸이 있다면, ‘여기’엔 그것들을 관찰하고 분리하고 조정하는 우리의 눈과 손이 있다. 반복하는 신체(그것이 인간이든, 기계장치든)의 운동으로 영화적 세계를 지탱하는 이런 몸짓의 리듬과 변형은 지가 베르토프가 말한 노동(자) 이미지의 ‘시각적 유대’를 해체적으로 재구성한다.

서로 다른 층위에 놓인 그들의 신체와 우리의 몸짓을 하나의 충돌적인 관계망으로 엮어낸다는 점에서 파로키의 몽타주는 필연적으로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제스처에 속한다. 이것이 파로키적 이미지의 비가시성이 겨냥하는 바이다. 쇼트 내부에 존재하지만, 시각적으로 드러나지 않는 대상을 지시하면서 동시에 외화면 영역에 머무는 몽타주의 가능성을 인식의 내부로 끌어들이는 것. 이때 프레임 내부에 집중하는 시선의 탐구와 화면 바깥 세계의 이미지를 향한 관측이라는 두 방향의 시각적 지향이 함께 발생한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이 진정 ‘두 눈’의 사려 깊은 관찰을 필요로 한다면 이런 이유에서다.

조각난 쇼트의 형태는 시각의 분리적 조건을 상기시킨다. 얼굴이 손의 개입을 통해 눈과 입의 반응이 나뉘고, 가장 멀리서 본 것(항공촬영으로 포착한 아우슈비츠 수용소)과 가장 가까이서 본 것(자신의 손을 뷰파인더 삼아 수용소에서 촬영된 여성의 표정을 확대해서 보는 파로키의 시선)이 공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가 서구 시각의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응시의 맹점을 뚜렷하게 고찰(크리스타 블륌링거)”하려는 것은 이 때문이다. 포커스 아웃된 형체로 먼저 제시되지만, 후반부에 이르러 같은 장면에 도달했을 때 선명한 윤곽으로 관측되는 흑인 모델의 몸을 마주하는 경험처럼 다른 시야의 체계는 이미 우리가 머무는 세계 내부에 잠재해 있다. 이런 시각성에 관한 자문은 영화의 근본적인 시각의 틀, 다름 아닌 수평과 수직이라는 프레임의 규격에 대한 교정으로까지 확대된다. 즉 숏/리버스 숏을 산출하는 기본적인 규칙, 시공간의 물리적 연속성과 시선을 주고받는 응시/반응의 보편적 구도를 거스르면서, 영화의 수평선(‘Land’로서의 지리적 조건)과 수직선(‘Fly vision’으로서의 광학적 조건)로 수렴하지 않는 몽타주의 논리를 발명해내는 것이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

서치라이트의 빛이 너무 강렬하다면, 온갖 기계장치들의 소음이 너무 과도하다면 리얼리티는 잠식되어버린다. 이것이 아우슈비츠에서 탈출한 두 명의 생존자들이 가스실의 존재를 고발했음에도 수용소의 이미지가 동시대 영상의 규범에 포섭되지 않은 이유이다. 그러므로 리얼리티를 초과하는 결합과 상상이 필요하다. 이는 표상에 덧입혀지는 두 가지 삶의 형태, 현실의 삶과 이미지의 삶이 존재함을 상기시킨다. 아우슈비츠를 비춘 항공사진과 유대인 여성의 표정을 붙잡은 스틸샷은 현실의 조건 속에서 패퇴했지만, 이미지의 조건에서 몇 번이고 우리를 각성시킬 것이다. 파로키가 배치하는 이미지의 계열에는 미적인 추체험과 정치적 저항이 한 몸으로 격돌하고 있다. 들뢰즈의 말을 빌려 질서를 구성하는 미디어의 이미지와 정보에 반대하는 것, 그것이 파로키의 영화가 수행하는 작업이다.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는 ‘진정한 동시대성은 시대착오에서 일어난다’고 말한다. 파로키가 구성한 복수형의 이미지는 시간의 영역 안에서 시차를 발생시키며 반성과 성찰의 조건을 제공한다. 1944년에 촬영되었지만, 그동안 우리가 전혀 인지하지 못하던 수용소 이미지의 각인은 얼마나 선행적이었는가. 혹은 뒤집어 말해 우리가 뒤늦게 확인한 이미지의 현전은 얼마나 회고적인가. 시차가 있음으로 그동안 드러나지 않던 이미지의 외곽이 표상의 체계에 진입한다. 그러니 우리는 홀로코스트에서 살해된 여성의 초상과 일상적인 시간의 아름다움을 결합하는 몽타주가 끔찍한 상상이거나 주관적이고 특권적인 예술가의 허영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이미지가 불러일으키는 시대착오적 현존의 가능성이 성립하고 있(었)음을 가시화하는 영상의 긁힌 자국이다.

눈앞에 놓인 대상을 약탈하면서 보존하는 카메라의 이중적 기능을 돌아보고, 비가시적인 형태로 사라진 이미지의 뒤늦은 재귀를 그려내는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의 영화적 궤적은 영상의 근본적인 조건으로부터 탈출하는 경로를 상상하게 한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는 스크린을 바라보는 주체의 부동성을 근본적인 조건으로 삼는다. 레프 마노비치가 영사 장치에 대해 논의한 대로 “뒤러의 원근법 기계, 카메라 옵스큐라, 사진, 영화와 같은 스크린 기반 장치에서 주체는 움직이지 않는다.” 영화는 세계를 고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체계의 감금을 수반한다.

파로키가 구성한 이미지의 궤적은 그런 부동성의 조건을 뛰어넘는 탈주적 동선을 따른다. 여기서 탈주적 동선이란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에서 언급되는 아우슈비츠에서 탈옥한 두 포로의 행적을 지시하는 표현이면서, 수용소의 사진을 뒤늦게 확인한 두 명의 CIA 연구원들을 그들과 결합하는 숏의 논리이자, 로베르 브레송의 <사형수 탈옥하다>에서 탈출에 성공하는 두 명의 탈옥수 이미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은유이다. 파로키는 2000년작 <교도소 이미지>에서 <사형수 탈옥하다>를 장 주네의 <사랑의 노래>와 함께 인용하며 이렇게 말한다. “시네마는 언제나 교도소에 매력에 빠져 있었다. (...) 주네와 브레송의 영화에서 발췌한 장면에서는 교도소가 성적 위반의 장소, 또는 인간이 자신을 사람이자 노동자로 만들어야 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사형수 탈옥하다>의 주인공은 구금의 장치를 탈옥의 도구로 바꾼다”. 영화의 뒤늦은 지각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언제나 출구를 모색해왔다. 영화와 시간과 역사의 빈칸이 관통하는 다종적인 경로를 통해 이 영화는 서로 다른 시대에 놓인 이미지의 교집으로 영화의 현재적 조건을 탐색하는 작업에 다다른다. 그들은 어둠에서 벗어난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카메라는 도입부에 나온 인공 수로에 돌아온다. 도입부에서 파로키는 이런 내레이션을 들려준 바 있다. “불규칙하지만 분명한 규칙이 존재하는 수로의 움직임은 우리의 눈을 가만 시선을 속박하지 않고 사고를 자유롭게 한다.” 불규칙하면서도 규칙이 관측되고, 우리의 시선을 가두면서도 속박에서 해방하는 모순적 조건의 틈새에서, 모든 것을 무릅쓰고 영화는 되돌아올 것이다. 감금으로부터 탈출하는 영화의 역량은 파괴되지 않고 돌아올 것이다. 이미지라는 무한정한 (불)가능성의 몸을 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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