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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케이티
2002-04-30

시사실/케이티

■ Story

6대 대통령 선거가 끝난 뒤 박정희는 김대중과의 표 차이가 95만표에 불과했다는 점에 위기감을 느낀다. 1972년 10월, 교통사고 후유증을 치료하기 위해 도쿄로 간 김대중은 박정희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자 망명 아닌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1973년 봄, 김대중이 일본에서 벌이는 정치활동을 막기 위해 한국 중앙정보부(KCIA)는 그를 제거하기 위한 일명 ‘KT작전’에 들어간다. 한편, 일본 자위대 소령 도미타는 상부로부터 위장된 흥신소를 차려 한국의 작전을 도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외교관으로 신분을 감춘 KCIA 요원들과 도미타는 그랜드 팔레스 호텔에서 김대중을 납치해 미리 준비해둔 선박 금룡호로 옮기는 데 성공하지만….

■ Review <케이티>가 외형상 한·일 합작품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사실상 ‘메이드 인 재팬’이라고 봐도 무방할 듯싶다. 나카조노 에이스케의 소설 <납치>가 원작이고, 감독·각본·촬영·배우 등 주요 스탭 대부분을 일본쪽이 맡았다. ‘뒤늦게’ 공동제작 파트너로 뛰어들고, 일부 배역에 참여하긴 했지만 한국이 작품의 창의성에 관한 지분까지 나눠가졌다고 보긴 어렵다. 사카모토 준지 감독은 “처음 영화를 기획했을 때 한국과 공동으로 제작한다거나 한국에서 개봉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했다.

그래서 김대중 납치사건을 다루기로 한 건 단순한 소재주의가 아닐까, 라고 미리 짐작해볼 법하다. 더구나 민감한 구석이 여전히 남아 있는 정치적 사안이 아닌가. 뜻밖에도 <케이티>는 정공법을 택했다. 사건의 배후를 지목하는 영화의 시선에 주저함이 없다. 김대중 납치사건이 왜 벌어졌고, 어느 선까지 개입됐고, 어떤 연유로 최종단계에서 작전이 중단됐는지 등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데 크게 부족함이 없다는 뜻이다. 비록 추리와 개연성이라는 드라마적 장치가 충분히 가동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어찌보면, 20년이 다 되어가는 사건의 허구와 실재를 얼마나 잘 배합했는지 따지는 건 지극히 국내적인 관심사이자 한물간 세대의 흥밋거리에 불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캐릭터와 스타일은?

엉뚱하게도 미시마 유키오의 자결사건으로 시작하는 첫 시퀀스는 지적 스릴러를 염두에 뒀다는 사카모토 준지의 말과 어울린다. 미시마 유키오는 노벨문학상 후보에 올랐던 뛰어난 작가이지만 대표적인 극우파 지식이기도 했다. 그는 1970년 11월 동료 4명과 함께 자위대 총감부에 난입해 총감을 인질로 삼은 뒤 ‘자위대의 국군화’와 ‘천황 옹호’를 주장하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실재했던 이 사건의 현장에 가공의 인물인 자위대 소령 도미타(사토 고이치)가 등장한다. 국화꽃을 놓고 돌아서는 그는 미시마 유키오의 ‘정신적 승계자’인 셈이다. 도미타는 한국어에 능숙하다는 이유로 3년 뒤 한국 중앙정보부를 도와 암호명 ‘KT’작전에 뛰어든다. 도미타에게 명령을 내린 상관은 박정희와 일본 육사 선후배 사이다. KT작전은 한·일 양국 극우 조직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도미타는 지적 스릴러를 정치적 누아르로 변주하는 흥미로운 캐릭터다. 그는 선과 악을 본능적으로 구분할 줄 알면서도 조직의 비정한 생리에 충실한 문제적 인간이다. 도미타는 북한 공작원과 접촉한다는 의심을 받는 이정미(양은용)를 업무상 관찰하다 사랑에 빠져든다. 운동권 대학생으로 비상계엄하의 중앙정보부에 연행돼 갖은 고문을 받은 뒤 일본으로 건너와 고단하게 살고 있는 이정미를 점점 이해하게 된 까닭이다. 적을 사랑한 공작원? 어딘가 위태로워 보이는 인물인데 어느 순간 정치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한다. “이런 일본은 싫다”고 하더니 “우리 일본자위대는 미군의 2군이고, 일본도 한국도 미국의 손바닥에서 놀아나고 있는 옐로멍키”라며 자조한다. 조직에 충성하다 회의하기 시작하고 끝내 제거되는 인간형은 꽤 누아르적이다.

삐딱해서 의미심장한 캐릭터는 또 있다. KT작전이 벌어지는 와중에 김대중 인터뷰와 암살음모 기사를 이런저런 매체에 싣는 가미카와 기자(하라다 요시오)다. 그는 세상사에 심드렁한 태도를 보이면서도 “이기지 않아도 되는 전쟁이 있다”며 도미타를 ‘오염’시킨다. 당시 김대중 인터뷰를 1면 머릿기사로 실었던 <라이카이타임스>라는 작은 신문의 기자를 모델로 삼은 인물인데, 세상을 책임지려 하지 않는 아웃사이더의 분위기를 풍기면서 사건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해석하는 캐릭터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하필 음습한 포르노 극장에서 KT작전에 대한 정보를 건네는 제보자와 접선하는 가미카와의 모습은 자신의 캐릭터와 잘 어울린다.

이들에 비해 KT작전의 실무 책임자 김차운(김갑수)을 비롯한 나머지 인물들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김차운은 정치적 신념이 있다기보다 입신양명을 위해 냉혹하게 일을 처리할 뿐이라는 식이다. 김차운이 민비시해 사건을 들어 도쿄 한복판에서 벌이는 납치극의 정당성을 역설하거나 다른 요원이 도미타를 지목해 “일제 36년의 한을 잊었나, 일본 같은 건 믿을 수 없다”라고 외치는 등 건조하게 진행되던 비장미를 싸늘하게 만드는 장면이 간혹 등장할 정도다. 또 건달처럼 등장했다가 김대중의 경호원이 된 김갑수(쓰쓰이 미치타카)는 재일동포의 정체성을 질문하려는 비중있는 캐릭터이지만 불필요한 사족이 되고 말았다. 실제 사건을 치밀하게 재구성하는 한편으로 조직에 이끌려 파괴되는 개인의 운명을 복합적으로 다루려는 ‘욕심’은 껄끄러울 정도로 불협화음을 내기도 하지만, 영화적 품격을 높이는 데 효과를 본 건 분명해 보인다. 이성욱/ <한겨레21> 기자 lewoo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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