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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리의 영화의 일기] 유령작가
김혜리 2019-03-27

<더 길티>

한명의 인물로 단일한 공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야기를 끌고가는 방식은 종종 시도된다. 그러나 선택한 하이 컨셉이 단순한 형식 유희를 넘어 내용과 조응하는 정당성을 획득하고 영화 전체를 지탱하는 경우는 드물다. 구스타브 몰레르 감독의 <더 길티>는 드문 성공의 예다. <더 길티>의 솔로 주인공은 야간 비상구조 콜센터에서 야근중인 경찰 아스게르(야코브 세데르그렌). 업무규정 위반 혐의로 콜센터에 임시 배치된 그에게 납치당했다는 여성의 전화가 걸려온다. 능력과 직감을 자신하는 아스게르는 현장요원과 연결하는 임무를 넘어 피해자를 직접 구하려 한다. <더 길티>는 인물을 움직이는 사건 자체도 충분히 긴장을 자아내지만 결말에 이르러 관객이 이해하게 되는 것은 주인공의 캐릭터라는 점에서 전화 통화만으로 이뤄진 또 다른 영화 <로크>(2013)와 친구다.

03/10

가려진 여자들의 스토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내용이 제목 그대로였던 <히든 피겨스>(2016) 이후로, 업적을 인정받기는커녕 제대로 알려지지도 못했던 여성들이 대중영화에 소재를 제공하고 있다. 이중 한 부류는 남성이 대외적 ‘브랜드’를 독점한 상황에서 저작권을 부정당한 여성의 역사다. 일찍이 팀 버튼의 <빅 아이즈>(2014)가 남편의 이름으로 그림을 발표해야 했던 화가 마거릿 킨(에이미 애덤스)을 다루었고 <메리 셸리>(2017)는 익명으로 출간한 책이 서문을 쓴 남편 퍼시 셸리의 작품으로 한때 통용됐던 메리 셸리의 이야기였다. 올해 바통을 이어받은 영화는 탁월한 문학적 재능을 노벨상 작가 남편을 키우는 데에 털어넣은 여성(글렌 클로스)의 초상화인 <더 와이프>, 그리고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 시도니 가브리엘 콜레트(1873~1954)의 전기물 <콜레트>다. <더 와이프>는 창의력의 출처가 드러나고 나서도 노벨상의 행방이 어떻게 됐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실존 인물 콜레트는 출세작 ‘클로딘 시리즈’의 단독 저자로서 법적 권리를 첫 남편 앙리 코티에 발라르(이하 애칭 윌리)로부터 되찾고 많은 소설들을 발표해 1948년 노벨상 후보에 올랐다. 말년에 쓴 <지지>가 브로드웨이 무대에 오를 때 콜레트가 직접 배우 오드리 헵번을 주인공으로 낙점했다는 일화는 우리가 체감하는 것보다 콜레트가 훨씬 가까운 시대의 인물임을 깨닫게 한다.

시골 처녀 콜레트는 15년 연상의 출판업자 윌리(도미닉 웨스트)와 결혼해 파리로 이주한다. 윌리는 일종의 출판 프로듀서로 문화평론과 낱말풀이, 대중소설을 직접 쓰기도 하고 여러 무명작가에게 외주를 주어 본인의 이름으로 발표하는 ‘팩토리’를 운영한다. 콜레트의 소녀 시절 추억담과 필력에서 가능성을 본 윌리는, ‘문학공장’에 아내를 영입하고 대중의 입맛에 맞는 편집을 더해 <학교에서의 클로딘>을 연작의 첫 작품으로 발간한다. 이 책이 불러온 반향은 윌리를 고무시키고 급기야 그는 집필용 별장을 (물론 콜레트의 글로 번 인세로) 사서 아내의 글쓰기를 독려하는 데에 이른다. 말하자면 ‘자기만의 방’을 마련해주되 거기에 감금한 셈이다. 이렇듯 윌리는 자랑할 만한 행동을 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어쩌다 이 비범한 여자가 저 남자에게 매료됐는지 납득이 불가능한 인물도 아니다. 영화 <콜레트>와 윌리 역의 배우 도미닉 웨스트는 적어도 콜레트가 왜 이 바람둥이 트렌드세터를 사랑했는지 힌트를 준다. 특히 넓은 세계를 동경하는 조숙한 젊은 여성에게 매혹적으로 보였을 법한 부분을 잘 파악하고 표현한다(무엇보다 윌리는 잽싸게 사과할 줄 안다). <콜레트>가 저작권을 도둑맞은 다른 여성의 이야기와 다른 점은 콜레트가 희생자라기보다 긴장관계의 공범에 가까웠다는 사실이다. 콜레트는 남편이 자기 소설의 저자로 알려진 현실에 불만을 느끼지만 그가 열어주는 길이 필요하다는 점도 인식한다. 말하자면 윌리는 콜레트에게 문화적 초기 자본을 제공한 셈이다. 윌리의 여성 편력 앞에 콜레트는 질투로 결혼 및 동업을 끝내기보다 스스로 개봉결혼의 자유를 활용하는 쪽을 택한다. “당신이 어떤 남자인지 아니까 거짓말만 하지 말아요. 나를 모든 일에 포함시키고 동등하게 대해요.”

그러나 윌리는 배우자의 성적 자유를 허용하는 결혼 안에서도 기어코 거짓말을 한다. 다른 남자와의 외도는 불편하게 여기고, 아내가 먼저 관계를 맺은 여성을 구태여 사귀는 치졸한 면도 보인다. 결혼 생활이 지속될수록 윌리의 애정은 클로딘이 상징하는 순진하고 어린 과거의 콜레트에 고착돼 있음이 드러난다(그는 콜레트처럼 입고 행동하는 젊은 여성을 애인으로 삼는다). 그러나 살아 있는 콜레트는 새로운 생각을 해면처럼 빨아들이며 변모한다. 영화 전체를 통해 콜레트의 모습은 다채롭게 변하지만 윌리의 복장과 매너는 거의 고정돼 있다는 사실도 시사적이다. 콜레트의 ‘복수’는 다분히 문학적이다. 그는 표지에 누구의 이름이 박혀 있든, 도저히 남자가 알 수 없는 제재- 어린아이에서 성인이 되기 전 시기 여성의 성적 각성- 를 도저히 남자가 쓸 수 없는 문장으로 묘사해 은연중 저자의 인장을 새겨넣는다. 현실에서 남편과의 갈등을 클로딘의 행위로 해소하기도 한다. 이 영화의 부차적 재미는 세기말 파리의 셀러브리티 문화다. 콜레트는 연극판 <클로딘>의 주연배우와 똑같은 헤어스타일과 복장으로 미디어에 노출됐다. 부부는 클로딘이 인기를 얻자 향수, 분첩 등 돈이 되는 물건에 클로딘의 로고를 넣어 캐릭터 사업을 벌이는 데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콜레트가 윌리를 떠나기로 결심하는 과정은 결혼보다 동업 관계의 파국처럼 보인다. 윌리는 같이 번 돈이 어떻게 얼마나 지출되는지 콜레트와 공유하지 않았고 경제권을 독점했다. 한편 소설은 양육권 분쟁의 대상이 된 부부의 아이처럼 묘사되기도 한다. “당신은 우리 아이를 죽였어. 책이 없으면 우리는 끝난 거야.”

03/12

<콜레트>는 키라 나이틀리가 <슈팅 라이크 베컴>을 찍기도 전인 17년 전에 기획됐다. 감독 워시 웨스트모어랜드의 남편이자 <스틸 앨리스>(2014)를 공동연출한 리처드 글랫저(그는 <스틸 앨리스>가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줄리언 무어에게 안긴 무렵 타계했다)가 콜레트의 소설을 읽고 제작을 원했고 두 감독은 프랑스 곳곳을 여행하며 구상을 구체화했다고 한다. 널리 알려져 마땅한 흥미로운 예술가 이야기를 안정된 연기로 재현했다는 미덕이 있지만 애석하게도 <콜레트>는 그리는 대상과 달리 고유한 문체를 갖지 못한 영화다. 구성은 나열식이고 블로킹과 촬영은 평범한 편이며 파티 신에서는 단역배우들이 큐사인을 기다렸다가 움직이는 게 아닌가 싶은 뻣뻣함이 느껴진다. 과도하게 투명한 은유는 콜레트의 행보를 지레 해석해서 관객에게 제시한다. 예컨대 결혼 전 윌리가 선물하는 에펠탑 스노볼은 “세상을 뒤집어보라”는 메시지고 신혼의 콜레트가 벗어던지는 불편한 드레스의 의미도 뻔하다. 파티장에 장식용으로 진열된 살아 있는 거북이는 콜레트의 다른 모습일 테고 여성 가수의 목소리에 립싱크를 하는 남성 가수의 공연은 콜레트와 윌리의 관계를 대놓고 빗댄다. 그리는 대상에 대한 감독의 경외감이 큰 나머지 관객에게 혹시 오해받을까 주석이 길어져 본문의 풍미를 해치는 아쉬운 케이스다. 어찌 보면 모든 예술가 영화는 감독과 대상, 두 예술가의 접전이다.

<콜레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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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

필모그래피에 유독 시대극이 많은 키라 나이틀리는 코르셋에 이력이 난 배우다. 단 <콜레트>에서 나이틀리의 의상은 콜레트가 성숙해 가면서 점점 다양하고 편해진다. 운동복, 발목이 드러난 드레스, 한쪽 가슴을 노출시킨 채 공연에 입고 나오는 이집트풍 의상까지. 예컨대 작중 인물 클로딘에게 동일시한 여학생풍 세일러복은 남편의 취향을 위한 차림처럼 보이지만, 콜레트의 카리스마가 완성된 시기에 이르면 특정 옷이 상징하는 바는 무의미해진다. 이혼을 결심할 즈음 콜레트는 오늘은 세일러복, 내일은 남성용 스리피스 바지 슈트를 입을 수 있는 여자다. 영화 밖에서도 키라 나이틀리는 코르셋에 시달렸다. 아직 정체성이 수립되지 않은 10대 후반부터 예쁘지만 연기력은 없다고, 풍만하지 않다고, 턱이 너무 강하다고 지적을 받았고 <캐리비안의 해적>에 합류하자 스타성이 부족하다고, <네버 렛미고>에 캐스팅됐을 때는 작품을 감당 못할 거라고 악담을 들었다. 파파라치 후유증으로 1년여를 쉬기도 했다. “난 시얼샤 로넌이나 헤일리 스타인펠드처럼 다 갖고 태어난 배우가 아니에요. 하지만 무엇이 부족하고 어떻게 발전해야 하는지는 알아요.” 30대가 된 나이틀리의 인터뷰는 명랑하고 여유롭다. “나에겐 이제 ‘됐고!’ 버튼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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