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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와 슬기> 박영주 감독 - 비극이 된 거짓말
김성훈 사진 최성열 2019-03-28

* 영화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영화 <선희와 슬기>는 거짓말을 거듭하다 급기야 자신의 삶을 버리고 슬기라는 새로운 사람이 된 선희(정다은)의 사연을 그린 이야기다. 유복하지만 자신에게 관심과 애정을 주지 않는 부모 때문에 학교 친구들에게 관심받고 싶어 거짓말을 하는 선희가 한편으로는 이해되면서도, 같은 실수를 또다시 저질러 슬기로 사는 새로운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는 무척 안타깝다. <소녀 배달부>(2014), <1킬로그램>(2016) 등 단편영화로 국내외 여러 영화제에서 인정받은 신인 박영주 감독은 첫 장편영화인 <선희와 슬기>를 통해 거듭된 거짓말로 어리석고 나약한 모습을 드러내는 한 인간을 집요하게 그려낸다. <선희와 슬기>는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뉴커런츠 부문과 제42회 예테보리국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학창 시절 거짓말을 하던 친구를 보면서 구상한 이야기라고 들었다.

=여중, 여고를 나왔다. 중학생 때 같은 반이던 한 친구가 생각났다. 성격 좋고 활달해 반에서 인기가 많았던 친구다. 그에게 친한 무리가 있었는데, 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되자 그 무리에서 따돌림을 당했다. 집이 잘살고 유명한 사람과 잘 안다고 거짓말한 게 들통났다고 했다. 그 일로 그는 기가 완전히 죽어 지냈는데 우연히 내가 그의 옆자리에 앉게 됐다. 그는 내게 ‘곧 학교를 그만둘 거고, 서울에 남자친구가 있는데 오토바이를 몰고 다닌다’ 같은 거짓말을 했다. 그 말을 할 때 갑자기 생생해지던 그의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 얼굴을 보면서 대체 거짓말이 뭘까, 누가 봐도 뻔한 거짓말을 왜 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 친구는 왜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했나.

=보통 사람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과의 차이를 메우면서 살아가지 않나. 하지만 그는 거짓말을 해서라도 다른 사람이 되고 싶어 했다. 그게 애잔하게 다가왔다.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에서 참고한 영화가 있나.

=<마담 보바리>(감독 클로드 샤브롤, 1991)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감독 엘리아 카잔, 1951) 같은, 거짓말을 소재로 하거나 거짓말이 캐릭터를 변화시키는 영화를 거의 다 챙겨 보았다. 대체로 부와 명예를 갖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영화 속 인물들과 달리 내가 지켜본 친구들은 부와 명예를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 다른 사람과의 괴리감을 채우고 싶어 거짓말을 했다.

-선희 또한 친구들의 관심을 받으려 거짓말을 반복한다. 그때 친구들의 시선을 의식하는 선희의 시점숏이 많이 등장하더라.

=관객이 선희가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감정을 고스란히 전달받길 원했다. 영화 초반부, 정미(박수연) 무리에 둘러싸인 선희의 모습을 담아내는 게 중요해 카메라가 선희 친구들의 어깨너머에서 선희를 바라보는 시점숏을 공들여 찍었다. 그때 대사보다는 선희의 클로즈업숏을 통해 선희가 느끼는 불안, 동경, 슬픔, 당황 등 다양한 감정을 담아내려 했다.

-정다은의 어떤 면모가 선희와 어울린다고 보았나.

=<여름밤>(2016)이라는 단편영화를 보고 그가 가진 순백의 얼굴에 매료됐다. 당시 (정)다은이 중학교 3학년 때라 너무 어려 함께 작업하기 힘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만나서 대본을 함께 읽어보니 이야기 속 상황을 잘 이해했다. 특히 말할 때와 그러지 않을 때 모습이 달라 거짓말을 할 때와 그러지 않을 때 모습이 대비되는 선희와 잘 어울렸다. 기대대로 잘 표현해준 덕에 촬영 현장에서 그에게 특별한 주문을 하지 않았다.

-선희가 동경하던 정미는 어떤 모습으로 묘사하려고 했나.

=정미는 선희에 비해 훨씬 성숙한 소녀다. 자신이 먼저 다른 친구들을 칭찬하거나 관심을 보여 소통할 줄 안다. 어쩌면 선희는 정미의 그런 모습을 보면서 닮고 싶어 했을지도 모른다.

-선희의 코앞에서 정미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영화의 중반부 장면은 극적으로 연출돼 영화적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정미의 죽음을 너무 리얼하게 묘사하면 마음이 아파서 영화적으로 연출할 수밖에 없었다. 정미의 죽음은 선희가 가출하고 정체를 감춘 채 슬기로 살아가게 되는 계기가 되는 까닭에 중요했다. 나쁜 의도 없이 오간 말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한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선희가 거짓말을 거듭하며 다른 사람(슬기)이 되어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영화의 엔딩을 보니 그의 미래가 너무 어두워 슬프더라.

=그 엔딩 말고 다른 대안을 생각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계속하는 것만이 선희가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 보였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비극이다.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는 어리석고 나약한 면모가 인간적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욱 연민이 생기고 공감됐다.

-주인공 이름을 선희와 슬기로 지은 특별한 이유가 있나.

=선희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평범한 이름이다. 슬기는 슬기롭지 못한 선희의 모습과 대비돼 선택한 이름이다.

-개인적인 질문을 하자면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계기가 무엇인가.

=대학 시절 문예창작과를 다니며 시나리오를 썼다. 시나리오는 영화로 만들어져야 의미가 있는 매체이지 않나. 아무도 내가 쓴 시나리오에 관심이 없어 직접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학창 시절 특별히 좋아한 영화가 있나.

=<빌리 엘리어트>(2000)를 되게 좋아했다. 문예창작과를 다니던 시절에는 우울한 이야기도 많이 썼다. 그때 만든 단편 <소녀 배달부> 덕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전문사 과정에 입학할 수 있었다.

-영상원 전문사 과정을 다니며 만든 단편 <1킬로그램>이 2016년 칸국제영화제 시네파운데이션 부문에 초청된 바 있다.

=29살 때 뭘 해도 되는 게 없었다. 감독 지망생으로 10년을 보냈고, 시나리오 공모전은 전부 떨어지고. 하고 싶은 건 있는데 사람들이 못할 거라고 하니 주눅이 많이 들고, 우울한 시절이었다. 친구들과의 관계, 진로 등 여러 고민을 하던 어느 날, 편혜영 시인의 소설집 <밤이 지나간다>에 실린 단편소설 <해물 1킬로그램>을 읽고 울컥해 작가님께 동의를 구한 뒤 영화로 만든 작품이 <1킬로그램>이다.

-<선희와 슬기>로 첫 장편영화를 만든 소감이 어떤가.

=많지 않은 제작비로 20여회차를 찍은 탓에 정말 힘들었다. 추운 겨울에 찍어 스탭도 배우도 고생이 많았다. 한달 전 개봉일이 결정되면서 긴장돼 잠을 못 잤다. 이제는 마음을 비웠다. (웃음) 일반 관객이 영화를 어떻게 볼지 궁금하다.

-차기작은 무엇인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범죄 드라마를 쓰고 있다. 자세한 내용은 비밀이다. (웃음) 앞으로도 사람이 보이는 이야기를 계속 만들고 싶다. <선희와 슬기>는 결말이 비극이지만 관객이 웃으면서 극장을 나갈 수 있는 코미디영화도 꼭 만들고 싶다. 게으르지 않은 감독이 될 거다.

-살면서 한 거짓말 중에서 가장 심했던 거짓말은 뭔가.

=글쎄…. 아버지께서 영화 만드는 걸 적극 후원해주셨다. 매번 아버지께 ‘올해는 잘될 것 같다’고 해서 죄송하다. (웃음) 다행스럽게도 아버지께서 지난해 부산국제영화제에 오셔서 영화를 보시고 “잘 봤다”고 말씀해주셨다. 이번 영화는 잘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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