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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업전야> 만든 장산곶매 사람들이 다시 말하다 - 이용배(제작), 장동홍(연출), 공수창(작가), 김동범(배우)
이화정 사진 백종헌 2019-05-02

그 시대에 영화를 하다 보니 운동이 되었다

배우 김동범, 제작 이용배, 작가 공수창, 연출 장동홍(왼쪽부터) .

‘노동자의 참상을 너무 잘 그렸다’는 이유가 ‘크나큰’ 죄명이 됐다. 1980년대 말, 노태우 정권하에서 온갖 고초 속에 태어난 금기의 영화. 동성금속의 단조반원 한수(김동범)가 비인간적인 노동환경을 경험하면서 각성하고, 마침내 스패너를 들면서 끝나는, 안치환의 절절한 음색이 선도하는 <철의 노동자>가 울려퍼지는 마지막 장면이 곧 현실의 노동자들에게, 대한민국 민주화의 흐름에 ‘크나큰’ 힘을 불어넣은 <파업전야>. 제작자가 지명수배되고, 상영 때마다 공권력의 저지 움직임이 있었고, 그래서 정식 개봉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던 영화지만 비공식 집계로 관객 30만명을 동원하며 대한민국 영화 100년의 역사로 남은 기념비적 작품. <파업전야>가 1990년 3월28일 공개시사 30년 만에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작업을 거쳐 보다 질 좋은 영상과 음향으로 5월 1일 노동자의 날 극장에서 정식 개봉한다. 영화를 제작한 이용배(현 계원예술대학교 애니메이션과 교수), 공동연출자(장동홍·이은기·이재구·장윤현) 중 한명인 장동홍 감독, 시나리오를 쓴 공수창 감독, 그리고 한수 역의 김동범 배우를 만났다. 상업영화 시스템이 아닌 독립영화의 제작방식, 투쟁에 가까운 제작기, 표현의 자유 사수를 위한 위험한 고비들. 당시 환경에서 <파업전야>가 힘겹게 통과해왔고, 그 결과 대한민국 사회에 남긴 것을 단순히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돌아보면 민주화 이전의 먼 이야기지만, 생소한 이야기에서 오늘날과의 접점 역시 찾을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의 관객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만남이 될 것이라 믿는다.

-오는 5월 1일, 제작 30년 만의 정식 개봉을 앞두고 시사회 참석부터 언론 인터뷰까지 <파업전야> 주간이다. 30년 전을 소환하는 시간이다.

=이용배_ 뜬금없다. 원래 1년에 한번, 연말에 만나던 사람들인데 이렇게 자주 만나게 될 줄이야. (웃음) 기자시사 때 극장에서 편안한 좌석에 앉아 큰 스크린으로 화면을 보니 느낌이 사뭇 다르더라.

=공수창_ 그러게, 경조사 때나 만나는 사이였는데. (웃음) 30년 만에 개봉한다는 게 ‘감회가 새롭다’고 말하기도 좀 늦은 것 같다 싶을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다는 생각이 들더라. 어색하기도 하고.

=장동홍_ 전에는 정상적으로 상영할 수 없어서 화면도 어둡고 소리도 잘 안 들렸다. 4K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작업해 좋은 스크린에서 상영하니 밝아서 화면이 잘 보이고, 소리도 전달이 잘되더라.

공수창_ 전달이 잘 안 되어야 우리가 못한 것이 커버될 텐데. (웃음)

=김동범_ 카메라 뒤 제작진과는 또 다르게 나는 무척 재밌게 봤다. 당시에는 스크린에서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어떻게 저렇게 연기했을까 싶어 끔찍했는데, 지금 보니 내용적으로도 드라마가 아직 유효하더라. DVD 출시(2008년) 때는 저때 나의 생활과 현재의 모습에 괴리감을 느끼면서 반성도 하고 그랬는데, 이번엔 내가 맡은 한수 역할이 객관적으로 보이더라. 영화 한편을 제대로 보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이번 기자시사 때 두딸이 참석했다. 첫째가 고등학생인데 한수의 갈등도 이해되고, 마지막에 노동자들을 배신하지 않고 투쟁하러 뛰어나가서 다행이라고 하더라. 지금의 어린 관객도 이 영화를 보고 그렇게 공감할 지점들이 있겠구나 싶어 용기를 얻었다.

시대의 목소리를 들었다

-장산곶매 활동을 하며 처음 나온 작품이 광주민주화운동을 그린 <오! 꿈의 나라>다. 두 번째 작품의 소재로 당시 정권에 반하는, 노동운동을 다루는데 이후 제작부터 상영까지 여러 위험이 따랐다. 당시 내부 의견은 어땠나.

공수창_ 두 번째 작품으로 노동운동을 그려보자는 것은 내부에서 자연스럽게 나온 결론이었다. 당시 우리가 나이 어린 학생이었고 노동현장 경험도 없어서 이 주제를 어떻게 내재화하고 작품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장산곶매 멤버들이 1년 정도 취재하러 다녔다. 파업현장에 가서 사람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듣고, 그동안 우리가 미약하게나마 경험한 게 축적되어 영화로 나왔다. 그게 <파업전야>의 가장 큰 성취가 아닐까. 그게 시스템화, 매뉴얼화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더 발전시키지 못한 점이 아쉽다.

이용배_ 시대와 맞물려 있었던 것 같다. 당시 노동자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 파워를 우리도 느꼈다. 우리도 아침마다 모두 모여 사회학을 공부했다. 당시 영화영상패나 동아리 대부분이 비디오 다큐멘터리 작업으로 세창물산 노동운동이나 여성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뒀다. 공수창 감독의 말처럼 그게 다음으로 강하게 이어지지 못한 데는 시대적인 배경이 있었다. 구소련이 무너지는 등 일련의 일로 사회 분위기도 전체적으로 많이 바뀌었다.

-당시 전국 대학가에서 공권력이 투입되어 상영을 저지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그러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점차 신화화된 작품이다. <파업전야>는 그 시절의 억압이 만들어낸, 가장 기념비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공수창_ 말 그대로 당시 대한민국 사회에서 최전방에 서 있는 영화였다. 그러니 정부와 정면으로 부딪친 거지. 당시 <9시 뉴스>에서 두 번째 이슈로 다룰 만큼 영향력이 있는데, 이걸 공권력으로 탄압해야 하니 난감하지 않았을까. 최전방에서 부딪치다 보니, 상영 저지를 위해 전남대 상영 때는 헬기까지 동원한 것 같다.

김동범_ 영화를 한번 상영하면 말 그대로 ‘벌 떼처럼’ 수천명씩 모이니. 사회주의는 이미 몰락했다, 이념의 시대는 끝났다고 하는데, 이 영화 상영 때는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지는 거다. 그러니 정부에서도 긴장하고 어떤 조치라도 취하려고 한 거지.

공수창_ 인터넷이 없던 시절이라 그런 결집이 가능했던 것 같다. 현장에 오지 않으면 볼 수 없는 영화였으니. 상영 때마다 누가 쫓아온다고 해서 도망가고 그런 일이 비일비재했다. 이용배 감독이 수배됐을 때는 내가 ‘상황실 실장’ 역할을 했다. 한번은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 사무실에서 농성을 했는데, 뜻밖의 전화가 한통 오더라. 자기가 검찰 관계자인데 이 영화를 보러 가고 싶다고. 상영을 저지하려고 검찰에서 상영장을 치고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면서 우리가 관객 신분증 검사를 했다.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우던 우리가 영화를 보러 오는 관객의 신분을 검사하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 거다.

이용배(제작)

이용배_ 지명수배 중인 상황이라 가족과도 연락을 끊었다. 그때도 계속 상영장 언저리에 있었다. 공수창 감독과 통화를 계속 주고받았는데, 얼굴이 노출되면 위험하니 항상 긴장하면서 피해 다닌 거다. 예를 들어 공수창과 동국대 입구에서 만나기로 하면 2번 차량 기둥에 있다가 미행을 따돌리려고 수차례 자리를 옮긴 끝에 만났다. 그렇게 만나서 생활비를 받아 생활했다. ‘잠수 요령’을 정리한 책자 같은 것도 읽고 거기 나온 대로 움직였다. 지인들 집에서 잘 때도 이틀 지나면 장소를 옮겼다. 재워준 사람들 신분이 노출될 수 있어서 내가 어디 있는지는 비밀에 부쳤다. 쌍문동, 이화여대 후문 등 여러 곳을 전전했다.

김동범_ 당시 상영회 자체가 매번 투쟁이었다.

공수창_ 영화 다 만들고 혜화동 로터리에 있던 한마당 소극장에서 시사회를 할 때였다. 경찰이 압수수색을 하러 나왔는데, 경찰이 올 걸 알고 사전에 압수수색 들어오면 다른 필름을 주자고 작전을 짰다. 릴을 뺏기는 것도 아쉬워서 대나무로 가짜로 릴을 만들었다. 경찰이 아무리 뭘 몰라도 가짜인 건 알지 않을까 했는데, 그걸 가져가더라. (웃음) 사실 그날 거기서 내가 통곡했다. 내가 그들을 막아야 하는데 잡혀갈까 봐 걱정되어 용기는 없고, 여러 심경이 겹쳐져서 눈물이 나더라.

이용배_ 더 기가 막힌 건 그 일이 있고 한참 지나서 경찰에서 연락이 왔다. 압수 물품 수사가 끝났으니 가져가라고. 가서 보니 릴을 아무렇게나 간수해서 다 찌그러져 있더라. (웃음) 볼 생각도 안 했을 거다.

공수창_ 지금 생각해보면 다 코미디다.

이용배_ 그다음에 그들도 공부를 한 거다. 영화 관계법, 저작권 같은 것을. 우리를 잡으려면 영화를 공부해야지, 그냥은 법적으로 뭔가 걸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거다.

장동홍_ 릴이든 필름이든 우리한텐 그게 총알이었다. 그걸 뺏기면 큰일이니 사수해야 했다. 영화가 끝나도 상영장 불을 안 켜고, 필름이 무사히 빠져나간 뒤에야 불을 켰다.

이용배_ 또 잡혀도 릴 하나만 잃어버리자는 생각으로, 릴을 한명씩 나눠서 가져갔었다.

장동홍_ 상영 일정이 잡히면 그 전날 밤 학교에 들어간다. 뺏기면 안되니, 전날 들어가서 캐비닛 안에 놔두는 거다. 고려대 상영 때는 그렇게 감춰놨다가 캐비닛 열쇠 가져간 사람을 못 찾아 열쇠 수리공을 부른 적도 있다. 그런데 막상 열어보니 비어 있더라. (웃음) 알고 보니 총학생회 간부가 보안 때문에 거기 숨겨둔다고 하고서는 교란 작전으로 다른 곳에 넣어둔 거였다. 그 양반이 나중에 릴을 가지고 와서 상영할 수 있었다. 진짜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이용배_ 그런데도 그날을 생각해보면 관객이 불평 없이 다들 자리에 앉아 기다렸다. 노래 부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돈 걱정

-만들 때 곡절도 이만저만 많은 게 아니었을 것 같다. 제작비는 ‘영화적 실천에 동의하는 동료, 후배, 선배님들의 후원금으로 충당했다’고 들었다. 지금으로 따지면 일종의 크라우드펀딩 개념인데.

이용배_ 처음부터 끝까지 돈 걱정이었다. 아무리 적게 잡아도 20명정도 현장에 있었으니 밥값도 빠듯하더라.

공수창_ 이용배 감독이 우리한텐 도깨비방망이었다. 당장 내일 찍을 돈이 있는지, 발전기 돌릴 기름은 있는지 이런 고민을 매일 했는데, 그 고민을 직접적으로 떠안은 사람이 이은, 이용배 감독이었다.

이용배_ 동문, 친지 등 아는 사람 한 바퀴 돌기 이런 개념이었다. 말 그대로 십시일반, 주머니에 있는 돈 후려치기지. (웃음) 지금 아내 된 사람에게도 꽤 많은 돈을 뜯어냈다. 한 사람한테 몇번씩 빌리기도 했는데, 많이 빌린 게 50만원 정도였다. 당시 대학등록금이 60만원이었으니 그 돈이 꽤 된 거지. 다행히 다 갚았다.

장동홍_ 그땐 직접 밥을 해 먹으면서 제작비를 아꼈다.

공수창_ 그렇게 모은 총제작비가 3천만원 정도 됐는데, 그 규모면 당시 독립영화 제작비의 10배 정도니 엄청난 금액이었다. 독립영화의 블록버스터, 독립영화의 <아바타>나 <벤허>라고 해도 될 것 같다. (웃음)

장동홍_ 그럼에도 늘 빠듯했다. 특히 촬영한 때가 한겨울이고 그 추운 데서 작업하는데 따뜻한 물이 안 나와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스탭은 그렇다 치고 배우들도 다 꼬질꼬질했다. 파업 중인 노동자들이 ‘우리 그렇게 지저분하지 않다. 좀 씻어라’라고 할 정도였다. (웃음)

-개런티는 기대도 못할 상황이었던 건가.

장동홍_ 배우들에게만 차비 정도 될 일정 액수를 지불했다.

공수창_ 수익금이 있으면 모두 장산곶매 운영비로 썼다. 사무실 빌리고.

장동홍_ 차기작인 <닫힌 교문을 열며> 제작비로 꿍쳐둔 거다.

-캐스팅은 연기를 떠나 이 영화의 취지에 동의하는 배우들로 꾸려야 했다. 충무로, 방송, 연극계, 대학 연극반 등 수없이 많은 배우를 만난 걸로 아는데, 어떻게 캐스팅했나.

장동홍(연출)

장동홍_ 서울대 연극반에 괜찮은 배우가 있다고 해서 만나게 됐고 캐스팅했다. 연기력도 있었고, 우리가 생각했던 노동자의 이미지를 구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김동범_ 4학년 2학기 끝날 때쯤이라 그냥 이걸로 내 연기 생활도 끝나는구나 하고 있었는데, 영화 출연 제의가 들어왔다. 당시 나는 연극도 민족극 위주로 하고 있었고, 대학 3학년 때는 연세대에서 연극하다가 사상이 불순하다고 잡혀가기도 했었다. 노동영화를 만들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런 영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동의했다.

-주인공 한수 역을 연기한 후 김동범 배우는 이 영화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당시 인기가 워낙 많아 이은 제작자가 ‘운동권의 아이돌’이라고 표현하던데. 스스로 어느 정도 체감했나.

김동범_ 아이돌은 무슨. 연극 하는 선배들은 넌 못생겨서 배우 하면 안 돼 했는데, 그때 욕했던 사람들이 지금 포스터를 보더니 그때 일을 까먹은 건지 꽃미남이라고 해주더라. (웃음) 상영 때마다 무대인사를 했는데 상영 스케줄을 따라다니는 팬들이 있었다. 끝나고 같이 술도 마시고 그랬다. 대학가 근처에서 그렇게 술 마시거나 앉아 있으면 다 알아봤다. 한수다, 한수 하면서. 그런 소리는 잘 들리더라. (웃음) 한번은 설악산 비룡폭포에 갔는데 거기서도 알아봐주셔서 솔직히 좀 놀랍더라. 심지어 훈련소 갔을 때 머리를 밀었는데도 알아보시더라. 다들 괜찮겠느냐고 걱정해줬다.

모든 게 억압으로 돌아왔던

-<파업전야>를 둘러싼 공권력의 저지 움직임은 이 작품 한편에서 왔다기보다 장산곶매 활동에 대한 제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전작 <오! 꿈의 나라>를 만든 전적이 있어서 이미 제작 초기부터 억압을 느꼈을 것 같다.

이용배_ 노동자들의 파업을 도와주면 안 된다는 ‘제3자 개입 금지’ 조항 위반, 국가보안법 위배 등 죄목이 여러 개였다. 정부에서 우리를 적으로 만들고 먼저 판을 키운 거다. 쫓기는 입장이다보니 그런 규정이 더 큰 압박으로 다가오더라.

장동홍_ <오! 꿈의 나라>를 동두천 보산동에서 찍을 때,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시나리오를 뺏어갔다. 안기부의 권위가 어마어마할 때라 철수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겁먹은 세컨드 조명 담당이 도망가면서 촬영도 불가능해졌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오! 꿈의 나라> 만든 이들이 <파업전야> 만든다는 리스트가 있었을 테고, 이들이 어떤 인물이고, 그 수괴가 이용배다 이런 기록이 다 있지 않았을까?

이용배_ 재판 때 보니 내 순번이 음란비디오물 취급이라는 명목의 잡범에 속해 있더라. ‘영화법 위반’, 영화법 안에서 신고 안 하고 음란물 제작한 사람과 같이 처벌한 거다.

김동범_ 그런 과정에서 모든 게 억압으로 돌아왔다. 그때 생각하면 후시녹음할 녹음실 빌릴 비용이 없어서 과천에서 합숙하고, 한번에 하기 위해서 입 맞추는 연습을 상당히 많이 했다.

공수창(작가)

공수창_ 주로 작업했던 녹음실에서 안 해준다고 거절당했었는데. 인쇄업자가 책 내용 보고 인쇄 거부하는 게 있나. 그런 상황이었다.

장동홍_ 현상소도 주로 하던 세방현상소에서 못하고 용산의 서울현상소로 갔다. 당시로는 마이너 현상소에서 한 거다.

이용배_ <파업전야> 때만 해도 그나마 녹음실을 대여해주는 데가 있었는데 <닫힌 교문을 열고> 때는 그조차 막혔다. 적들도 영화를 공부한 거다. 그런 곳을 막으면 영화를 완성할 수 없다는 걸 알고, 미리 연락해서 우리 영화는 못하게 한 거다. 국내 현상소에서 작업을 못하게 되면서 <닫힌 교문을 열고>는 일본 현상소에 가서 최종 작업을 해왔다.

공수창_ 억압하고 억압받으면서 서로 진화한 거지. 시사회를 한양대 대강당에서 했는데 녹음이 안 돼 있어서 무성영화 더빙하듯이 했다. 영상을 틀고 무대 위에서 배우들이 대사를 읽었다. 그 광경을 왜 안 찍어놨을까. 유튜브에 올리면 조회수가 몇백만은 나왔을 텐데. (웃음) 돌아보면 코미디 같은 상황인데 그때는 절실했고 또 절박했다.

김동범_ 과연 이런 집단이 또 나올 수 있을까. 이런 열의를 가지고 하는 작업이 다시 이루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의에 따라 짧은 시간에 열악한 환경에서 만들었지만, 그걸 열악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언젠가 <파업전야> 만드는 과정을 영화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이야깃거리가 될 것 같다.

-외적으로 장산곶매의 활동이 주목받은 한편, 내부적으로는 첫 작품에서 부족했던 영화적 완성도에 대해 고민한 작품이 <파업전야>다.

장동홍_ <오! 꿈의 나라> 때는 각자 단편영화를 만들던 사람들이 모여서, 기계적으로 1~20신으로 나눠서 콘티를 짰다. 그렇게 하니 영화가 될 리 있나. 그런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완성도가 낮으면 관객을 설득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됐다. 그래서 이번엔 책임연출 시스템으로 하자, 충무로처럼 효율적인 감독 시스템을 정립하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오! 꿈의 나라> 때만 하더라도 장편영화를 처음 만든 거라 역량이 고르지 못했는데, <파업전야>는 전작의 경험이 있고, 또 모두 힘을 합쳐서 더 발전된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용배_ 어쨌든 정해진 시간 안에 찍어야 하는데, 밖으로 이 사실이 알려지면 안 되니, 스탭들에게 일정하게 가해지는 외부적인 압력이 있었다. 그래서 한층 더 집중했고, 책임연출도 잘 돌아갔다.

-외부의 압력이 프리 프로덕션을 탄탄하게 하게 해준 거다.

공수창_ 그랬다. 노동운동이 왕성하던 시기였지만, 노동운동을 그린 문학이나 영화가 예술적으로 완성도 있게 나오는 일은 미미하던 상황이었다. <파업전야>는 그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우리가 해보자 합의하에 시작한 프로젝트다. 1년 동안 취재한 이유도 우리끼리 그런 역량을 축적하자는 데 의견이 통일되었기 때문이다.

장동홍_ 운도 좋았다. 인천지역 노동조합 간사의 도움으로 실제 공장들을 돌아봤는데, 우리한텐 그림의 떡이었다. 우리가 거길 빌려서 찍을 수는 없었으니. 그런데 마침 우리가 본 공장 중 하나인 인천 한독금속 사업장이 파업에 돌입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시나리오가 미처 완성되지도 않았는데, 일단 공장 장면은 찍고 가자 해서 급하게 가서 찍었다. 보조출연자의 상당수가 실제로 그곳에서 파업하던 분들이었다.

장동홍_ 공장에서 전기를 끊어서 프레스 기계가 멈춰 있었다. 기계는 한번 세우면 다시 돌리는 데 시간과 돈이 필요했다. 퓨즈를 끌어오고, 노동자들의 도움으로 용광로를 때고 그렇게 공장을 돌려서 촬영했다. 그분들이 안 도와줬으면, 같이 하지 않았으면 찍지 못할 영화였다.

장동홍_ 우리가 밥을 해서 파업하는 노동자들과 밥도 나눠 먹고, 옆에 있었다. 그러면서 그분들에게 진정성을 인정받은 거다. 학교에서 와서 뭣도 모르고 노동자를 이용한다는 ‘학삐리’ 이런 시선에서 벗어난 거다. 현장에 있던 사람으로서 그 부분은 자부한다.

공수창_ 그 시대가 그만큼 의식 수준이 높아진 상황이었다. 어떤 분은 우리를 전위라고 했지만, 우리는 스스로 대중적인 영화 조직이라 생각했다. 우리로서는 그 시대에 대중이 필요로 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든 거다. 그래서 <파업전야> 다음 작품이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다룬 <닫힌 교문을 열고>였고. 그 부분에 대해 논쟁도 질타도 있었는데, 우리 내부적으로는 우리가 운동을 하기 위해 영화를 한 게 아니라, 영화를 하다 보니 운동이 된 거라고 생각한다. 그 시대가 그랬다. 대중이 민주화를 열망하고, 노동운동을 했다. 그런 분위기에 움직여서 영화를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 흐름으로 간 거다.

-2019년에 이 영화를 돌아볼 때,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한편 아쉬움도 있다. 특히 남성적인 시선이 앞서다 보니 남성 노동자들과 달리 소신 있게 나아가는 여성 노동자들을 다루는 방식이나 묘사에 대한 지적도 있다.

장동홍_ 취재 다닐 때 문화운동의 일선에 있던 간사 분이 했던 이야기가 기억난다. 노동운동으로 영화를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만들 거냐, 테마를 어떻게 가져갈 거냐. 현장에서 고민하는 이슈를 다루면 다각도의 의견을 반영한 영화가 나올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그때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이냐고 질문했을 때, 아직까지 각성하지 못한 노동자가 많으니, 그런 다수를 움직이는 영화를 만드는 게 훨씬 더 파급력이 있고, 당장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공수창_ 이 드라마의 극적 구성에 대해 어떤 대안이 나와야 하지 않겠느냐며 대안을 고민하는 의견도 많았다. 그래서 내부에서 좀더 실험적인 것을 해보자는 논쟁도 많았다. 젠더에 관한 문제도 내부에서 일어났고, 이후 변영주 감독은 그런 고민에서 여성영화 집단 ‘바리터’로 진출하기도 했다. 여성 운동가나 노동자 문제를 그리는 데는 미흡했고 많이 못 그린 게 지금은 보인다. 하지만 장동홍 감독이 이야기한 것처럼 제대로 된 노동영화, 제대로 된 틀을 갖춘 걸 읽지도 보지도 못했는데 대안이 어떻게 나올 수 있나.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어떻게 새로운 것을 끄집어낼 수 있나. 기본적인 것부터 짚고 가는 걸 우선시했다.

성취를 이어가지 못한 아쉬움

-2019년 지금에 와서, <파업전야>와 장산곶매의 활동이 각자의 삶에 끼친 영향을 되돌아본다면.

공수창_ 본의 아니게 한 시대의 전위에 선 적이 있다. 우리의 의사와 크게 상관없이, 우리가 전범이 되어야 하는 상황에서 그 역할도 했다. 개인적으로 그런 역할이 싫고 부담된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물론 그렇게 가치관과 철학을 공유한 데 대한 자부심이 있다. 앞으로 내가 다시는 경험하지 못할 소중한 경험인 것 같고, 그게 <파업전야>가 나에게 끼친 중요한 영향이다.

이용배_ <파업전야>의 성과가 있었으니, 제2, 제3의 작품으로 발전시켰으면 역사적인 흐름이 됐을 텐데 우린 그러지 못했다. 고작 <닫힌 교문을 열며>에서 멈췄다는 건 아쉽다. 장동홍, 이은, 장윤현, 공수창 감독 모두 당시 충무로에서도 개별적으로 무언가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각자 충무로에서 데뷔했고 일정하게 성과를 냈다. 나도 애니메이션쪽으로 가서 <파업전야> 때 맛본 성취를 만들어내려고 지난 30년간 내 자리에서 노력해왔다.

김동범(배우)

김동범_ ‘파업전야 김동범’ 하면 내 소개가 끝나버리는. 한동안은 그랬다. 부담도 있었지만, 뗄 수는 없는 수식이었다. 30년이 지나고, 노동자의 날인 5월 1일에 <파업전야>가 개봉한다는 사실에 흥분과 기대가 더없이 크다. <어벤져스: 엔드게임> 같은 영화가 개봉하는 때 우리 영화가 정식 개봉을 하는 것, 그 영화와 같이 걸리는 것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웃음) 이 영화를 안 본 사람은 있어도 모르는 사람은 없는 영화가 됐으면 한다. 분명히 존재하던 시대였고, 그 시대를 다시 느낄 수 있다는 의미에서 파장이 있길 바란다. 개인적으로는 지난주에 인생 최초의 상업영화 오디션도 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데 잘됐으면 한다.

장동홍_ 그야말로 20대 초반의 뻗치는 힘, 정열 하나로 만든 작품이다. 나는 소심해서 짱돌 한번 못 들던 사람인데, 결국 내가 짱돌을 들었구나. 카메라가 내 방식의 짱돌이었구나 싶더라. 내 속의 ‘한수’를 표출했다는 것, 대부분의 장산곶매 구성원도 같은 마음이었을 거다. 그런 힘이 모여서 사심 없이 나온 성과라 이 영화가 더없이 소중하다. 이후 충무로에 진출해 다치기도 하고 그러면서 시니컬해지기도 하고 여러 변화를 겪었는데, 이번 상영이 또 하나의 좋은 좌표가 되지 않을까.

● 장산곶매: <파업전야>는 여러 대학 동아리 출신 사람들이 모여 의미 있는 공동창작을 해보자는 취지 아래 결성한 ‘장산곶매’가 광주민주화운동을 다룬 <오! 꿈의 나라>(감독 이은·장동홍·장윤현, 1989)에 이어 두 번째로 만든 장편영화다. 노동현장에서 직접 실상을 접하며 발로 쓴 생생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기존 35mm 필름 대신 촬영에 용이한 16mm 필름을 사용했으며, 자본의 종속성과 극장 상영 독과점을 비판하기 위한 영화적 시도가 이루어졌다. 관객 10만명 동원이 흥행작으로 꼽히던 당시, <파업전야>는 정식 개봉을 하지 않았음에도 30만명으로 추정되는 관객을 모으며 화제의 중심에 섰다. <파업전야> 신드롬은 이후 장산곶매의 세 번째 영화이자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을 다룬 <닫힌a 교문을 열며>(감독 이재구, 1991)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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