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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이 시간을 봉인하는 방식

가상의 감정이 생생해지는 그곳

화면의 오른쪽에서 왼쪽 방향으로 걸어가는 한 남자의 얼굴에 미묘한 결기가 서려 있다. 미동 없는 느린 걸음으로 그는 카자흐스탄의 익숙한 거리를 걷는다. 그런 남자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최선을 다해 카메라가 그를 쫓는다. 영화의 서막을 여는 느릿한 파노라마 화면의 막바지 즈음, 관객은 이 지긋한 노년기 남성이 ‘황해도 몽금포 부근에서 출생한 촬영감독 김종훈’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것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자이며, 그렇기에 더이상 울지 않는 인물이다. 오직 한장의 사진이 그런 그의 마음을 드러내 보인다. 동료들과 대사관 회의를 가던 도중에 찍은 오래된 기념사진 한장이 그 마음속 징표가 된다.

외상적 디아스포라의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들

다큐멘터리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은 김소영 감독의 ‘망명 3부작’ 중 마지막 작품으로, 한국 사회가 낳을 수 있는 외상적 디아스포라의 가장 아이러니한 순간을 뒤쫓는 영화다. 1956년에 일어난 종파사건 이후 모스크바에서 유학하던 영화학과 학생들은 북한의 1인 독재를 비판하며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 그렇게 그들은 ‘8진’이라 불리는 결사단을 형성한다. 이후 모스크바를 벗어나 시베리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등지의 유라시아 곳곳으로 8명의 학생들은 흩어져서 지금에 이르렀다. 영화는 그들이 북한을 떠나 모스크바에 당도한 과정, 그리고 결사단을 형성하기까지의 경로를 전반 30분 동안 설명한다. 그리고 감정적인 기억을 훑으며 후반부의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영화를 본 후 다시 생각해보니, 이 다큐멘터리가 만들어내는 감각의 논리 중 가장 주목할 대목은 ‘사실적 사건’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 처음 등장해서 이야기의 중심 화자가 되는 김종훈이 내놓는 기념사진은, 그런 면에서 오직 하나의 ‘사실’이기에 중요하다. 이 사진 한장을 중심으로 작품을 다시 들여다보고자 한다. 비견컨대 한대용의 미망인 지나이다 이바노브나가 중심이 된 후반부 전개에서 다소 감상적인 측면이 두드러지는 것은, 초반부의 관점이 변화한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처음에 객관적 증언에서 시작된 영화는, 어느새 주관적 기억을 교차하며 타인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된다. 그리고 영화 끝부분에 이르러, 문 빅토르가 그린 ‘유화’가 등장하는 장면에서 사실 묘사가 매우 유기적으로 확대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8진의 얼굴이 담긴 초상화는 사실적 사건에 대한 변곡지점이 되어서 다큐멘터리의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한 진실의 범위를 확장시킨다.

다시 처음의 장면으로 돌아가자. 영화 속 남자가 관객에게 내민 첫 번째 이미지는 50, 60년대 흑백사진들이다. 그중 ‘정린구와 허웅배, 한대용, 리경진, 김종훈’의 모습이 나란히 담긴 흑백의 ‘기념사진 한장’을 반복적으로 소개하며 영화는 이후의 전개를 진행시킨다. 이때 첫 번째 증인 김종훈의 목소리가 관객에게 소개된다. 사진 속 본인이 직접 등장해서 “뒤에 보이는 건물은 학생기숙사”라고 소개하는 부분은 특히 객관적으로 들린다. 이어서 두 번째 화자 최국인이 등장한다. 인터뷰어로서 김소영 감독이 최국인과 김종훈에게 던지는 질문은 동일하다. 하지만 이는 영화에 직접 드러나지 않는다. 첫번째 질문, “어떻게 모스크바로 유학 오게 되었나요?”에 대한 답의 범위는 매우 넓다. 이에 당사자가 아닌, 김종훈이 답한다. “국인이가 거기에서 무슨 일을 했냐면”이라고 시작되는 대답의 교차 지점, 이가 흥미롭다. ‘타자의 목소리를 통해 전해지는 누군가의 이야기’로 정리되는 이 부분의 관점 교차는 영화를 보는 관객의 몰입감을 무너트린다. 그리고 결코 ‘나의 것’으로 용해될 수 없는 타자의 시선이 영화 전체에 침투하는 빌미를 제공한다. 단순히 소격효과라고 부르기에 애매한, 다소 파격적인 장면은 이후에도 계속된다. 배우 김태훈이 연기하는 한대용 역의 인물이 가상의 이미지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제는 김소영의 인장이라 불러도 좋을 법한, 재현된 이미지의 사용은 실상 호불호를 부른다. 그렇지만 이때 재현된 이미지의 목표에 대해서 우리는 의심하지 않으려 한다. 단편소설 <비상사고>를 소리 내어 읽는 한대용 역할의 배우를 통해 관객은 그야말로 단번에 이 상황이 ‘연극적 체계’로 들어섬을 인지한다. 산문을 영화화한 장면이 아닌, 소설의 서술 체계 그대로를 과장해서 그의 음성은 설명하고 있다. 이즈음 누구라도 초반부 영화가 시도했던 객관적 자료의 소명이 변질되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심지어 재현된 배우의 장면이 김종훈의 주관적 설명보다 더 명징한 사실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이 판단은 유보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던 것이 어느새 역전되어 역사적 사건으로 포장돼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김종훈의 모습도 ‘황해도 출신의 노년기 남성’이 아니라, ‘역사의 목격자’로 변모해 있다. 그는 자신의 동료였던 한대용을 이야기함과 동시에 과거의 시간을 이야기하는 화자가 된다. 그렇게 영화는 사적 영역이 아니라 공적 역사를 이야기하고, 주관적이고도 객관적인 것에 대한 전복을 말하는 다큐멘터리가 된다.

그렇다면 이 영화 후반부에 정말 현실적 감각이 없는가? 그를 말할 차례다. 이 점에 대해 나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답하려 한다. 다양한 진술자의 행적, 그리고 정치적 상황은 단 하나의 장소를 향하는데, 그건 바로 ‘모니노 숲’이다. 하지만 이 장소에 담긴 것은 그리움이자 보이지 않는 생의 목표로, 이는 전적으로 가상의 감정이다. 초반부 스크린을 통해 관찰됐던 김종훈의 느린 움직임, 최국인의 공간이 지닌 반사의 속성은 그곳을 향한다. 모든 ‘경험’에 대한 접근을 차단한 채, 영화 속 인물들은 기억 속 모니노 숲으로 나아간다. 이때 드러난 그들의 행동 중 ‘사건’이 되는 것은 없다. 노스탤지어의 절대적인 세계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굿바이 마이 러브NK: 붉은 청춘>은 시간을 봉인하는 영화다. 온갖 확대된 논의가 도달하는 곳에서, 우리는 어떠한 사건도 되지 못하는 과거의 환영을 바라본다.

과거의 환영이 머무는 곳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장식하는 ‘유리 조각의 공간’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전체 과정과 더불어 논의해야 한다. 엔딩 크레딧이 오르고 난 뒤, 설치미술의 의미는 좀더 명확해진다. 객관적 사진 이미지에서 시작된 영화는 유화의 분할 과정을 거쳐서 마침내 추상적 조각 앞에 멈춰 선다. 영화가 닿고자한 영역, 디아스포라의 가상적 영토에 도달한 것이다. 그곳에 제목이 뜨고 지며 비석에 비문이 새겨진다. 마지막 문구, ‘붉은 청춘’이라 적힌 흰 글씨와 함께 8진의 얼굴이 유리판에 겹친다. 감독의 마지막 질문, “이분들에 대한 꿈을 꾸세요?”라는 음성을 통해 우리는 환영을 읽어야 할 것 같다. 이제 사건은 완벽하게 과거의 것이 되어 있고, 나아가는 것은 나의 상상뿐임을 인정해야 할 단계다. 지금 이 순간, 우리 모두는 죽음에의 체험을 위한 마지막 삶의 단계를 생각한다. 그것이 슬픈지 아닌지에 대해, 나는 단호하게 후자쪽이라고 말하고 싶다. 죽음과 기억이라는 불가능한 이미지의 현존, 그 상념의 교차점을 영화는 껴안는다. 먼 곳의 전쟁을 우리는 바라본다. 냉담하게. 그리고 간신히 진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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