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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남긴 거장의 마스터클래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에 참석하다
김소미 2019-05-30

“저는 떠납니다!”

올해 3월 작고한 아녜스 바르다 감독의 마지막 영화가 한국에 도착했다. 딸인 로잘리 바르다가 제작하고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직접 제69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소개한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영화로 유언을 대신하려는 작품처럼 보인다. 최초의 누벨바그 영화로 평가받는 <라 푸앵트 쿠르트로의 여행>(1955)으로 데뷔한 거장이 전하는 마지막 에세이는 평등하고 유연하게 꾸려졌다. 바르다 입문자에겐 핵심적이고 효율적인 가이드가 될 것이고, 그를 사랑하는 팬들에게는 잊지 못할 마술적 체험과 감흥을 줄 것이다. 또 영화 만들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매 순간 그녀가 하는 말들을 받아적고 싶은 욕망에 휩싸일지 모른다. 한편의 영화를 위해 창작자가 내리는 무수한 결정의 과정을 들려주는 방식으로, 데뷔 이래 꾸준히 지속해 온 영화쓰기(cinécriture, cinewriting)를 선보인 바르다. 그가 스스로 직접 써내려간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라는 지도를 펼치고 그 길을 조심스레 따라가보았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아녜스 바르다 감독이 참석한 비교적 최신의 강연들을 방아쇠 삼아 그의 작품과 생애를 명쾌하고 유려하게 관통하는 영화다. 라이브로 진행되는 강연장에서의 아녜스 바르다는 가끔씩 긴장한 모습을 보이긴 해도 대개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유쾌한 매력을 뿜어낸다. 인간과 사회에 대한 진중한 관심과 아이 같은 천진난만함이 공존하는 그의 언어는 별다른 기교 없이도 청중을 홀리는 독특한 마력을 지녔다. 작업한 순서대로 기계적으로 훑는 것이 아닌, 필모그래피 이쪽과 저쪽을 유쾌하게 가로지르면서 진행되는 거장의 마스터클래스는 제각기 빛나는 조각이었던 개별 작품들을 모아서 거대한 퍼즐을 완성시키는 행위 같다. 현재의 바르다가 과거의 바르다를 다시금 평가하고 정의함으로써 60년 이상 이어온 예술 작업의 비전은 더욱 선명해진다. 여기에 감독의 지난 극영화와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풍성한 아카이브 푸티지가 더해지며 움직이는 도록이 완성형을 이룬다. 자칫 설명적이거나 나르시시즘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예술가의 이 행위가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에서 오로지 각별한 기쁨으로 기능하는 이유는, 바르다가 꾸준히 자기 자신과 주변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온 감독이라서다. 영화에 대한 설명이 곧 자기 삶에 대한 내밀한 회고로 부지불식간에 겹쳐지면서 현실과 재현된 이미지, 영화와 인간 아녜스 바르다가 끊임없이 서로의 액자가 되었다가 내용물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자화상이 중요한 소재로 등장하는 후기 다큐멘터리들(<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시네바르다포토>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 등)과 비교해 형식 실험이 줄어들고, 간결해 보인다는 점이다. 이런 인상은 잘 재단된 영화 속의 몇 가지 강력한 순간과 맞닥뜨리면서 아녜스 바르다가 현재진행형의 혁신가였다는 깨달음으로 변주된다.

바르다의 끝말잇기, 영화의 놀이

“영감, 창작, 공유”를 작품 활동의 세 가지 화두로 제시한 뒤,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이행하면서 자기 작품을 읊는 바르다의 언어는 마치 모노드라마를 하듯 끊김이 없다. 감독의 화법부터 이미 형식적으로 콜라주의 형태를 띤다고 할까. 한 작품에서 나타난 시각적 특성 혹은 주제적 연관성으로 말미암아 낱말카드를 나열하듯 다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는 식이라 그 연쇄반응 자체를 흥미롭게 바라보게 한다. 이는 말(혹은 내레이션)에서 그치지 않고, 강연장 무대에 앉아 있는 바르다의 모습과 교차하는 영화의 이미지에서도 드러나는 구상이다. 이를테면 바르다는 자택이 위치한 프랑스 다게레오 거리 주변의 상점과 평범한 상인들의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 <다게레오 타입>(1976) 속 사람들을, 카메라에 친숙하지 않아서 수줍고 무뚝뚝한 우리 주변의 “말 없는 다수”로 묘사한다. 이어서 남편인 자크 드미 감독과 할리우드에서 체류하던 시절에 찍은 단편 <블랙팬서>(1968)를 언급하며, “분노하는 소수”를 찍은 경험이라고 말한다. 강경한 흑인운동단체인 블랙팬서가 거리에 나선 이미지의 열기는, 1960년대 페미니스트들의 활동과 그 정신에서 영감을 얻은 <노래하는 여자, 노래하지 않는 여자>(1977)에 대한 설명을 부추긴다. 성평등, 성해방에 대한 관심을 집단에서 개인으로 옮긴 결과물로는, 이번 영화에서 배우 상드린 보네르가 직접 출연해 바르다와 다정한 투숏을 선보이는 <방랑자>(1985)가 등장한다. 단독자로서의 여성, 고독하고 화난 여성, 그리고 당시 프랑스에서 유행처럼 번지던 남성들의 무전여행을 성별을 바꾸어 행했을 때의 결과를 보여준 영화다. 특히 <방랑자>에서 10분 간격으로 이어지는 1분 남짓한 트래킹숏에 대한 바르다의 설명은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의 형식에 관한 주석으로도 기능하니 눈여겨봄직하다. 주인공 모나(상드린 보네르)를 매번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따라가는 트래킹숏은 프레임 안에 모나가 사라지고 난 뒤에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사물이나 풍경을 반드시 비춘다. 10분 뒤 새롭게 시작하는 트래킹숏은 직전 숏에서 마지막에 보였던 물건과 상응하는 물건으로 새롭게 시작된다. 이렇게 ‘바르다 코드’를 품은 개별 작품들이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에서 비슷한 직조법으로 한데 엮이는 과정에 동참하는 것은 분명 즐거운 ‘놀이’다.

“영감, 창작, 공유”

처음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떠오른 것은 자신의 작품 세계 전체를 두팔로 끌어안은 아녜스 바르다의 신체 이미지였다. 영화를 감싸는 따뜻한 시선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아녜스 바르다라는 나무줄기를 중심으로 두개의 굵은 가지가 둥글고 공평하게 펼쳐지는 구조가 영화와 닮았다는 느낌이 주효했다.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에는 관객을 놀라게 하는 두 가지 순간이 있다. 약 2시간의 러닝타임 중 한가운데 지점에서 영화가 잠시 정지되고, 분절되는 순간이 그 첫 번째다. 비선형적으로 자유롭게 필모그래피를 훑는 듯했지만 실은 바르다가 자기 영화를 20세기와 21세기 혹은 아날로그와 디지털로 나눠두었음을 비로소 실감하게 되는 순간이다. 영화 역사 100주년을 기념해 장 폴 벨몽도, 잔 모로, 카트린 드뇌브, 알랭 들롱, 로버트 드니로 같은 왕년의 스타들이 출연한 <시몽 시네마의 101의 밤>(1995)이 흥행에 참패한 이후 바르다는 “16mm, 35mm 필름에서 손을 뗐다”. 이어서 그의 21세기 첫 작품이자 발표 직후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한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2000)가 소개되어야 할 시점에 영화는 갑자기 뚝 흐름을 멈춘다. 정지된 영화 위로 “정지된 화상”에 대해 이야기하자고 제안한 바르다는 1950년대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카메라와의 본격적인 만남, 사진작가라는 최초의 정체성,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양쪽으로 뻗어나간 아날로그와 디지털 영화 작업. <아녜스가 말하는 바르다>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이라는 테마를 대칭적 구도로 대분류하고, 그 안을 여러 가지 다른 대칭과 이중성으로 꼼꼼하게 소분류해 나가는 다큐멘터리다.

21세기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며 “영감, 창작, 공유”의 화두를 다시 언급한 아녜스 바르다는 영감의 측면에서 “진짜 사람들”로 수식되는 보통의 수많은 사람에 대한 관심을 확장했고, 창작에 있어선 디지털 촬영 방식을 새롭게 채택했으며, 공유의 무대로 극장을 넘어 미술관으로 향했음을 밝힌다. 그 시작점에 있는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는 작품을 만드는 과정이 창작자에게 미세한 변화를 끌어낸 사례다. 작은 디지털카메라를 든 몸집이 작은 감독은 이 시기를 “난 무섭지 않았고, 아무도 날 무서워하지 않았다”는 말로 요약한다. 이전보다 훨씬 더 가까이, 그리고 거침없이 대상에 다가가면서 작가 스스로도 사람에 대한 더욱 확장된 관심과 애호를 발견하게 된 과정이 구술된다. 성숙을 마친 듯 보였던 노년의 작가에게 2000년대 들어 한 차례 재탄생의 과정이 있었다는 사실을, 감독은 “다큐에서 주제가 아무리 명확해도, 내가 뭘 하고 싶은지는 내가 찍은 게 알려준다”라고 지혜롭게 정리한다. 움직이는 것과 정지한 것, 개인적 체험과 사회적 체험, 평화로운 바르다의 해변과 정치 운동의 현장이 디지털카메라와의 만남을 통해 인간에 대한 한층 뜨겁고 굳건한 믿음을 갖추는 것이다. <이삭 줍는 사람들과 나> 촬영 중에 농장에 버려진 감자 더미에서 하트 모양의 감자를 발견한 바르다는 마치 홀린 듯 그 감자를 집에 가져와 싹이 나고 썩을 때까지 보관했다. 사람을 향한 애정과 예찬으로 물든 감독이 2003년에 이 썩은 감자를 설치미술로 발전시킨 것이 ‘감자토피아’(patatutopia)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열린 첫 전시에서 바르다는 스스로 감자 복장을 하고 나타나 관람객 사이를 돌아다녔다. 한마디로 아녜스 바르다의 후기 다큐멘터리에서 디지털카메라가 의미하는 기동성은 곧 타자의 이미지가 이를 찍는 주체의 거울로 이어지는 전환이 더 빠르고 자유롭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끝으로 불현듯 덮쳐오는 두 번째 놀라운 순간에 대해선 자연과 우연을 닮았다는 것 외에는 여기서 자세히 쓰긴 어려울 것 같다. 노년의 인물이 체감하는 거스를 수 없는 시간의 작용, 그 거센 풍화가 일순 스크린을 휩쓸고 지나간다. 전작 <바르다가 사랑한 얼굴들>에서 자신과 동료들의 모습이 담긴 거대한 벽화를 보면서 퇴근했던 공장 노동자를 기억하는가. “예술은 우리를 놀라게 하죠? 좋은 하루 되세요”라는 말과 함께 싱긋 웃으며 퇴장했던 그 노동자처럼 바르다 역시 산뜻하고 유유한 방식으로 작별을 고한다. 대화적인 영화(감독 스스로는 수다라고 표현하기를 즐기는)의 끝에서 화자인 바르다는 떠나지만, 그녀가 자신의 내면풍경이라 평생 일컬었던 아름다운 해변이 그 자리에 남아서 쉼 없이 파도를 몰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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