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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대상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김군>이 가진 힘에 대하여

경험 너머의 경험

‘엄숙주의에 대한 거부와 반발심.’ 영화의 제작진이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엄숙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영화 <김군>의 중요한 제작 목적이었던 것 같다(<씨네21> 1206호 기획 기사). 광주민주화운동에 관한 ‘도 넘은 왜곡’에 대한 반발이 아닌, 엄숙주의에 대한 반발이라니. 이러한 발언은 광주 시민의 편에 선 영화 속 입장과도 언뜻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발언과 영화에 관한 반응을 두루 살피다보면 이같이 강조해야 했던 이유를 수긍하게 된다. ‘지만원의 주장에 맞선 광주 시민들의 대응’은 <김군>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문제는 이러한 논의가 다시 좌우 프레임 속에 짜맞춰진다는 점이다. 프레임을 벗어나 광주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나의 이미지에서 출발해 장르적인 형식으로 광주를 보여준 <김군>의 시도에 우리는 더 주목해야 한다.

이미지와 실제의 격차

엄숙주의에 대한 강조는 좌우로 대변되는 익숙한 프레임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제스처다. 영화 속에서 명확히 재현되거나 언급되진 않지만, 5·18을 재현하는 기존 방식들에서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는 엄숙주의는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투쟁하다 희생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는 데 있어 진지한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반대편에는 조롱주의가 있다. 언뜻 엄숙주의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엄숙주의의 대상이 되는 사건과 인물에 대한 무차별적인 조롱이다. 당시 광주 시민이 북한의 지령을 받고 남침한 북한군이라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이들의 조롱은 엄숙주의 만큼이나 진지한 데가 있다. 엄숙한 조롱주의의 표상이라 할 지만원은 자신의 주장을 증언하기 위해 5·18 기록사진 속 얼굴 하나하나를 헤아리며 제1광수, 제2광수 하는 식으로 카운팅한 뒤, 얼굴의 윤곽선을 따다가 이들의 윤곽선과 일치하는 북한 시민의 얼굴과 하나하나 비교한 사진을 증거로 내민다. 광주 시민들의 주장은 ‘북한군이 틀림없다’는 지만원의 확신에 찬 주장과 명확히 대조된다. 김군의 사진에 대한 광주 시민의 반응은 ‘~한 것 같은데’, ‘~처럼 보이는데’ 하는 식으로 불확실한 추측으로 제시된다. 여기에서 잠정적인 결론이 예고된다. 허구는 확실하고, 팩트는 불확실하다.

<김군>이 진실과 거짓을 가리는 데 힘을 소모하지 않는 이유는 지만원의 주장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굳이 힘주어 설명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 지만원의 주장은 오늘날의 세태를 정확히 반영하기에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오늘날은 어떤 것이 진실인가보다 어떤 주장이 더 재미있는가가 중요한 시대다. 연예인을 둘러싼 스캔들이 진실인지 아닌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닳고 닳은 이야기여도 여전히 재미있다는 것이 중요하다. 어린이집 교사의 실수는 익숙한 어린이집 학대 스토리로 확대재생산된다. 선생은 강자고 아이는 약자라는 프레임 속에, 우리의 해석이 곧 우리가 본 것이 된다. 바야흐로 재미있는 것은 옳다. 지만원의 터무니없는 주장과 허술한 성실함은 진지하고 엄숙한 5·18 이야기보다 적어도 흥미로울 수는 있다.

<김군>이 지만원으로 대표되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자들과 대결하는 텍스트라면, 이때 대결 기준은 팩트가 아니라 재미다. 지만원이 프레임화된 재미를 제공한다면, <김군>은 프레임에서 벗어난 순수한 재미를 내세운다. 그것은 장르화된 이야기를 따라가는 추적의 외형을 띤다. 이 추적극은 추적하는 대상과 이를 좇는 주체가 기본적으로 부재하기 때문에 특별하다. 남는 건 무언가를 찾는다는 행위 그 자체다. 무지에서 각성으로 나아가는 관객의 대리자(<1987>의 연희, <택시운전사>의 만섭)가 없는 역사물이자, 추적 그 자체가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박두만(송강호)과 서태윤(김상경)이 없는 <살인의 추억>(2003)이다. 카메라 앞에서 질문자로 등장하는 배우 김예은, 조연출 안지환은 각성하지도, 추적의 열망을 재현하지도 않으며, 결론적으로 관객의 대리자가 아니다. 관객의 자리는 영화 속에 단일하고 명확한 자리로 고정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관객은 영화를 보는 동안 추적의 주체로서의 자신을 분명히 상상한다.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것은 아니나 분명히 존재하는 관객의 자리는 예능 프로그램 <프로듀스 101> 시리즈에서 ‘국민 프로듀서님’들로 지속해서 호명되는 시청자의 자리를 연상시킨다(강상우 감독은 이 프로그램의 팬임을 공공연히 밝혀왔다). <프로듀스 101>이 시청자에게 요구하는 것이 출연자에 대한, 혹은 잔인하고도 단순한 피라미드식 토너먼트에 대한 매혹이라면, <김군> 역시 이와 비슷하게, 이미지를 향해 매혹되기를 우리에게 요구한다. 5·18은 무지에서 앎으로 나아가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매혹되어야 할 어떤 대상으로 여기 불려온다. 사진 속 ‘김군’은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는 매력적인 피사체요, 포토제닉한 인물이다. <가버나움>(2018)에서 포토제닉한 얼굴의 아역배우가 실제 난민임을 알게 되었을 때와 비슷한 효과와 모순을 <김군>은 영화의 출발점으로 전제한다. 하룬 파로키의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1989)에서 가장 강렬한 이미지는 홀로코스트 현장에서 포착된 한 여성의 모습이 담긴 사진 이미지다. 사전지식 없이 그 사진을 접하면 거리에서 포착된 여인의 자연스러운 스냅사진 정도로 보인다. 그 사진 속 인물이 이제 막 홀로코스트에 당도한 유대인임을 알게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지와 실제의 격차로 충격을 받는다. 이미지는 어떤 방식으로든 우리를 연루자로 만든다.

상실이 곧 생성이 되고

그러나 <김군>이 강렬한 이미지에만 기댄 영화인 것은 아니다. 영화가 전개되면서 김군의 이미지는 선명해지는 대신 흐릿해진다. 김군을 찾는 과정에서 끼어드는 광주 시민들의 기억과 진술은 김군의 이미지를 흐려놓는다. 김군을 찾고 싶다는 욕망과 이와 충돌하는 실제의 기억들. 그 과정에서 관객은 나와는 전혀 관련이 없고, 내가 잃어버린 줄도 몰랐던 어떤 사람의 부재를 깊이 감지하게 된다. 상상된 부재의 감각은 실제보다 더 큰 감정적 공명을 생성하기도 한다. <1987>(2017)에서 6월항쟁을 겪지 않은 세대가 극영화를 디딤돌 삼아 1980년대에 접속할 때, 그것이 사건을 겪은 이들과 같은 경험은 아닐지라도 거짓이라든가 그에 못 미친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전쟁과 항쟁의 트라우마를 겪어온 이전 세대들과 달리 80년대생들은 트라우마 없는 트라우마를 겪어왔다. 그것은 부모 세대를 통해 간접적이거나 어렴풋하게 경험하게 되는,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상실감이다. <김군>은 그 상실감이 다른 상실감으로 나아가며, 그리하여 상실이 곧 생성이 될 수 있음을 영화적으로 탐구한다.

허구적 상실감을 안긴 <김군>과 달리 같은 날 개봉한 테리 길리엄의 <돈키호테를 죽인 사나이>(2018)는 허구 그 자체의 상실을 경험하게 한다. 현실과 실제를 흐리며 예정된 장소로 달려가는 영화의 방식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더는 돈키호테를 말할 수 없는 시대라는 고백처럼 여겨진다. 얼떨결에 허구의 세계에 접속하게 된 토비(애덤 드라이버)의 멍한 얼굴처럼, 관객 역시 예우의 차원에서 판타지의 세계에 어떻게든 동참하고자 노력한다. 그럼에도 판타지가 나이를 먹어버렸음을 부인할 수 없다. 상실을 애써 부정하는 영화와, 상실을 마주 보는 영화를 번갈아 보며 우리에게 상실을 감각하게 하는 이야기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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