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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⑧] 한국영화 판타스틱 열전: 미지의 영화, 광기의 장르

익숙하고도 낯선

<수녀>

1919년 김도산의 연쇄극 <의리적 구토>를 시작으로 본격적인 창작에의 길에 들어선 한국영화는 수많은 부침 속에서도 몇번의 전성기를 이루며 지금의 시간을 만들어왔다. 그중에는 다양한 장르적 시도로 열악한 제작환경을 타파하며 새로운 영화를 만들고자 했던 감독들과 영화들이 존재했으며 여전히 새롭게 발굴되어 관객과의 새로운 만남을 기다리는 영화들이 있다. 올해 부천영화제에서는 한국영화의 시간 속에서 새로운 형식과 대안을 모색하고자 했던 영화들을 통해 한국 장르영화의 뿌리를 돌아보고자 한다. 특별전 ‘한국영화 판타스틱 열전: 미지의 영화, 광기의 장르’를 통해 그동안 한국영화사에서 제대로 포착되지 못했던 장르적 시도를 보여준 영화 12편을 엄선했다. 서울 한복판에 나타나 파괴를 일삼는 거대 괴수. 물귀신 대신 좀비가 되어 돌아온 남자. 학교에, 오래된 저택에, 낡은 아파트에 출몰하는 원혼들. 무의미한 방황과 복수로 세상 끝을 향해 내달리는 아웃사이더, 익숙하고도 낯선 이들 영화 속 존재들과 함께 오랫동안 한국영화사의 근간을 이루어왔던 ‘리얼리즘’이라는 굳건한 권위를 깨고 수많은 걸작과 정전들이 미처 포착하지 못했거나 외면했던 욕망과 무의식, 이면의 세계를 새롭게 횡단하고자 한다.

<괴시>

그 영화, 기이하다

이번 특별전에서 만나게 될 영화들은 한국영화 첫 번째 전성기이자 다양한 장르적 시도가 분출됐던 1960년대를 중심으로 1940년대부터 최근까지 때로는 실패하거나 드물게 성공하면서 저마다의 매력으로 한국 장르영화의 한축을 이루어왔던 영화들이다. 그중에는 이미 시간을 초월해 정전의 자리에 오른 영화들도 있지만 대부분의 영화들은 제목만으로도 여전히 낯선 기대감을 전해주는 영화들이다.

권혁진 감독의 <우주괴인 왕마귀>(1967)나 한국 최초의 좀비영화로 알려진 강범구 감독의 <괴시>(1980)는 명성에 비해 그동안 좀처럼 만나기 힘들었던 영화다. 1967년 한국 괴수영화의 원조로 잘 알려진 김기덕 감독의 <대괴수 용가리>와 거의 동시에 등장한 <우주괴인 왕마귀>는 감마행성에서 온 외계인들이 실험체로 데려온 괴수가 서울을 침공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일본 <고지라>팀의 기술을 적극 활용한 것으로 잘 알려진 <대괴수 용가리>에 비하면 조악한 세트와 특수효과가 실소를 자아낼 수도 있지만 광화문과 고층빌딩숲 같은 서울 시내 곳곳을 파괴하고 다니는 괴수의 모습은 어설퍼서 오히려 더 정이 가는 ‘토종 괴수’라 할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나름의 신무기로 무장한 공군들의 활약은 미비한 반면 괴수의 몸속에 들어가 괴수를 마음껏 괴롭히는 거지 소년의 활약이 눈부시다는 점이다. 소년이 마음껏 휘젓고 다니는 괴수의 코털과 피부, 고막 등 내부의 표현이 의외로 생생하고 실감나는 점도 인상적이다. 영화는 특히 괴수의 공격을 피해 도망가는 사람 개개인의 사정과 묘사에 많은 비중을 두고 있는데, 짐을 싸들고 이러저리 피하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한국전쟁 당시의 피난민들의 모습을 떠올리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 남아 있는 버전인, 중반 이후 4분 정도의 화면이 소실된 버전이 상영될 예정이다. 그런데 외계인이 지구에서도 ‘드믈게’ 서울을 공격하기로 한 이유가 무엇일까? 기후가 좋아서라는데, 미세먼지로 가득한 요즘이라면 우주괴인 왕마귀는 서울을 피할지도 모를 일이다.

제목처럼 ‘괴이한 시체’, 즉 ‘좀비’를 처음으로 한국영화에 등장시킨 <괴시>는 물에 빠져 죽은 남자가 물귀신 대신 살아 있는 시체로 되살아나 사람들을 습격하는 이야기다. 해충을 퇴치하기 위한 과학자들의 전파실험이 시체의 뇌를 자극해 깨어나게 한다는 것. 한국과 대만 합작 반인반수 괴수영화 <몽녀한>을 만들기도 했던 강범구 감독의 또 다른 괴수물로, 스페인과 이탈리아 합작영화를 원본으로 삼았지만 물에 빠져 죽은 이가 물귀신이 아닌 살이 있는 시체로 돌아오고, 서구의 좀비들과 달리 팔을 앞으로 내밀며 강시처럼 움직이는 모습 등은 로컬적 상황과 상상이 다수 반영된 토종 좀비물이라 할 것이다.

이와 함께 기이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영화가 있다면 바로 김기영 감독의 <수녀>일 것이다. 올해는 한국영화 100년이기도 하지만 김기영 감독의 탄생 100년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 스스로도 밝히고 있듯 <기생충>을 비롯한 봉준호 감독과 박찬욱·임상수·김지운 감독 등 2000년대 이후 한국영화의 새로운 전성기를 이끌었던 감독들에게 직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김기영 감독의 영화 중에서도 <수녀>는 어쩌면 가장 낯선 작품 중 하나일 것이다. 몇개의 베이컨 통조림만 들고 베트남전에서 돌아온 상이군인과 언어장애를 지닌 여성이 결혼한 후 무능한 남편 대신 친정에서 얻어온 대나무로 죽세공업회사를 세워 경제적으로 성공한다는 이야기를 다룬 영화는 ‘수녀’(水女)라는 제목에서부터 설정, 인물관계에 이르기까지 감독의 일련의 영화 ‘여(女) 시리즈’를 떠올리게 한다(하지만 왜 ‘물의 여자’인지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일하는 여성과 무능한 남성, 질병 혹은 장애 등으로 상징되는 신체적으로 결핍된 여성 등 김기영적 모티브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는데, 특히 다리를 저는 남편과 언어장애가 있는 아내라는 설정 자체는 시대극 <고려장>에서도 등장했다. 비교적 덜 알려진 작품이지만 김기영 감독다운 인장이라 할 만한 마지막 장면은 단연 압권이다.

<영심이>

그리고 발견은 계속된다

이번 특별전을 통해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이 최초 공개될 <영심이>와 이미례 감독 또한 재발견의 쾌감을 전해줄 것이다. 한국영화사의 네 번째 여성감독이자 유현목 감독의 스크립터 출신으로 충무로에서 상업영화를 만들었던 이미례 감독은 이전과 이후 감독들과는 다른 행보를 걸었던 감독이다. 데뷔작 <수렁에서 건진 내 딸>로 주목받았던 이미례 감독은 <물망초>를 비롯해 <영심이> 등 하이틴영화를 다수 만들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원인이 되어 영화계를 떠났던 감독. 이번에 상영되는 <영심이>는 배금택의 동명 만화를 원작으로 한 작품으로 한국영화의 한 경향을 이루던 하이틴영화에서 여성 청소년의 시점에서 그의 사춘기적 고민과 욕망, 그리고 여성이기에 노출된 위협과 성차별적인 상황들을 무의식중에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초록색이 주를 이루는 독특한 색감과 경쾌한 편집, 당시 청소년 문화에 대한 예민한 반영 등이 인상적인 작품. 이와 함께 감독 스스로 실패한 시도라 평하고 있지만 B급 장르영화의 패기와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한 박찬욱 감독의 두 번째 장편 <3인조> 역시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이 최초로 공개된다. 이와 함께 올해 개봉 20주년을 맞는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 역시 디지털 복원 버전이 최초 공개될 예정이다.

흥미롭게도 올해는 한국 대중음악에 있어 상징적인 인물인 현인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 그의 영화 데뷔작으로 개봉 당시 실제 “가요계의 왕자 현인, 드디어 스크린에”라는 홍보문구로 소개될 정도였던 <푸른 언덕>도 상영된다. 최초로 음악이 내러티브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음악영화로 기록되는 이 작품은 아쉽게도 36분가량만 남은 불완전 버전이다. 하지만 이준희 음악평론가의 해설과 음반 시연을 통해 현인이 직접 부른 영화 속 주제곡인 <푸른 언덕>을 비롯해 현인과 대중가요에 대한 특별 강연이 함께하는, 일종의 ‘음반 어트렉션’으로 상영될 예정이다. 이와 함께 특별상영 형식으로 상영되는 르네 비에네의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또한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은 홍콩 액션영화를 원작으로 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상황주의 영화로 유명하지만 실제 그 원작은 홍콩영화가 아닌 한국 액션영화 <종도>였다. 영화평론가 유운성이 ‘영화탐정’이 되어 처음으로 밝혀낸 한국영화에 있어 가장 독특한 전용의 사례이자 한·홍 합작영화가 출몰하던 70년대 한국영화계를 방증할 이 영화에 대한 유운성 평론가의 강의 또한 영화제 기간 동안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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