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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라짜로> 당신은 신성함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졌는가
이주현 2019-06-27

제71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 받은 알리체 로르바케르 감독의 <행복한 라짜로>

<행복한 라짜로>는 놀랍고 매혹적인 이탈리아 우화라는 평을 받으며 지난해 제71회 칸국제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이탈리아 감독 알리체 로르바케르는 이미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 <더 원더스>(2014)로 2014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바 있다. 양봉업을 하는 아버지를 도우며 외따로 살아가던 12살 소녀 젤소미나의 이야기를 그린 <더 원더스> 또한 리얼리즘에 입각한 주제와 신비로운 무드를 창조하는 연출이 인상적인 수작이었다. 로르바케르 감독은 세 번째 영화 <행복한 라짜로>에 이르러 이탈리아의 주목받는 신예 여성감독이 아닌 이탈리아영화의 예술적 명맥을 잇는 작가로서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게 된다. 이를 두고 <버라이어티>는 “로르바케르의 영화엔 난니 모레티, 에르마노 올미, 타비아니 형제 등의 정신적 DNA가 흐른다. 하지만 로르바케르는 아무도 모방하지 않는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행복한 라짜로>의 사실적이면서도 환상적인 터치는 어쨌든 이 영화가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은 물론 마술적 리얼리즘의 영향 아래 있음을 말해준다.

순수 너머 절대 선(善)의 영역에 존재하는 자

<행복한 라짜로>는 라짜로라는 신성한 거울을 통해 세속의 풍경을 비춘다. 1980년대 이탈리아 산간벽지 인비올라타. 마을 사람들은 알폰시나 데 루나 후작 부인(니콜레타 브라스키)이 소유한 담배 농장의 소작농으로 일하며 한방에서 10여명이 살을 맞대고 잠을 자는 공동체 생활을 한다. 어른의 키만큼 무성히 자란 초록의 담배밭. 담뱃잎을 따던 사람들은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의 이름을 노동요의 후렴구처럼 쉴 새 없이 불러댄다. 라짜로, 라짜로, 라짜로, 라짜로…. 아이들마저 라짜로의 이름을 돌림노래하듯 장난스레 따라 부른다. 사람들의 부름에 대한 라짜로의 응답은 즉각적이다. 그는 언제나 부지런히 움직이고 열심히 일하는 순수한 청년이다. “라짜로, 할머니를 식탁으로 모셔라.” “라짜로, 상자 좀 옮겨라. 라짜로, 넌 세상에서 가장 빠르고 힘이 넘치는 일꾼이잖니.” 라짜로를 반복적으로 호명하는 행위는 언제나 배경처럼 머물러 있는 라짜로의 존재를 전면에 드러내는 효과를 불러온다.

동시에 그것은 호명하고 지시하는 자의 됨됨이까지 보여준다. 이기적인 인간들의 놀림과 착취는 나이와 상관없이, 배움의 척도와 무관하게, 부자와 빈자 나눌 것 없이 반복적으로 이루어진다. 마을의 별장을 찾은 후작 부인과 아들 탄크레디(루카 키코바니)가 보여주는 놀림과 착취의 행위는 오히려 교묘하고 지능적이다. 대우하는 척 감시하고, 교육하는 척 세뇌하고, 배려하는 척 부려먹는다. 외부와 소통 없이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았던 마을 사람들은 소작이 법으로 금지된 지 오래되었다는 것을 모른 채 평생을 뼈 빠지게 일만 하는데도 빚만 늘어나는 상황을 감내하며 살아왔다. 젊고 반항적인 탄크레디는 무지한 자들을 이용하는 어머니에게 대적해보려 애쓰며 묻는다. “저들이 진실을 알게 될까봐 겁나지 않나요?” 후작 부인은 말한다. “저들은 개돼지나 마찬가지야. 풀어주면 자신들이 비참한 노예임을 알게 되지. 저 애(라짜로)를 봐. 난 농부들을 착취하고 그들은 저 애를 착취하지.”

착취당한 자가 또 다른 자를 착취하는 끝없는 연쇄반응 속에서 라짜로는 먹이사슬의 맨아래에 위치한 듯 보인다. 그럼에도 라짜로는 아무도 이용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의도를 의심하는 법 없는 라짜로는 순수 너머 절대 선(善)의 영역에서 신성하게 존재한다. 거룩한 바보 혹은 성스러운 패배자, 박해받는 순교자 혹은 성자, 우리가 잃어버린 순수와 신성함,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존재가 라짜로다.

성실하고 순수한 일꾼의 모습을 하고 있던 라짜로가 성자로 부활하는 순간 영화도 새롭게 옷을 갈아입는다. 감독의 표현대로 “노골적인 착취의 시대가 아닌 더 새롭고 더 유혹적인 착취의 시대”로 시간여행을 시작한다. 영화의 전반부는 ‘대사기극’의 전말이 폭로되면서 일단락되는데, 알려졌다시피 대사기극은 로르바케르 감독이 실화에서 차용한 이야기다. 1980년대 초반 이탈리아에서 소작이 폐지됐음에도 불구하고 한 후작 부인이 외부와 단절된 채 살아가던 농부들을 노예처럼 착취했다는 실화. 정작 실화는 영화에서 이야기를 추동하는 요인으로만 사용될 뿐이다. 로르바케르 감독이 실화에서 길어올린 것은 낡은 사회 시스템과 인간의 이기적 욕망, 선한 피해자와 악독한 가해자의 이야기 너머에 있는 무엇이다. 라짜로라는 성자의 몸을 빌려 더 넓은 시점에서 과거와 현재, 봉건적 시대와 자본주의 시대를 연결한다. 과거에 머물러 있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 사실적이고도 환상적인 이야기가 씨줄과 날줄로 엮여 아름다운 무늬를 자아낸다.

시대의 진보를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놓친 것,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시대가 변해도 지속되는 악습과 추태는 무엇인가. 역사는, 사회는, 인간은 진보하고 있는가. 대사기극의 전말이 드러난 이후 뿔뿔이 흩어진 인비올라타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자본주의 시스템에 적응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영화는 그 답을 대신한다. 후작 부인 밑에서 일하던 니콜라는 후작 부인의 몰락 이후에도 여전히 가진 것 없는 자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살아간다. 더 낮은 임금으로 일할 사람들을 모객하는 일자리 중개인이 된 니콜라는 가난한 이주노동자들이 더 싼값의 노동력을 제공하게끔 경쟁시킨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라짜로의 존재를 알아보고 그에게 무릎 꿇는 안토니아(알바 로르바케르)의 가족은 좀도둑질과 사기로 근근이 입에 풀칠하고 있는 형편이다(앞서 순교한 성녀들의 사진에 입을 맞추는 존재 역시 젊은 시절의 안토니아다). 개발과 발전과 진보의 영역에서 소외된 자들은 여전히 소외당한 채 살아가고 있으며, 세상엔 변하지 않는 성질의 것도 존재한다는 것을 비추는 세속의 풍경이다. 대사기극을 전하는 신문 기사는 “그녀(후작 부인)는 이들의 사회적 진보를 가로막았고, 강제노역과 빈곤 속에 살게 했다”고 기록하지만, 이들의 진보를 진정 가로막고 있는 것은 어느 개인이 아니다.

무엇보다 이 세상의 선한 존재는 어디에 있는가. <행복한 라짜로>는 어쩌면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하고 있을 선한 존재들, 무수한 라짜로들을 호명하는 의식 같은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 로르바케르 감독은 이 영화가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영웅의 이야기가 아니라 어떤 신성함에 대한 이야기라고 말했다. “여러 영화와 책은 정의를 위해 싸우는 영웅들의 운명을 계속해서 이야기한다. 그들은 세상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하지만 우리의 라짜로는 세상을 바꿀 수도 없으며, 아무도 그의 신성함을 알지 못한다. 나는 신성함이 카리스마는 아니라고 믿는다. 오늘날 성자가 현대의 삶 속에 나타난다면 아마도 우리는 그를 알아보지 못하거나 어쩌면 별 생각 없이 그를 내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어쩌다 신성함의 가치조차 알아채지 못하는 눈먼 사람이 되었을까.

"음악이 우릴 따라오고 있어"

신성함의 기적 혹은 기적 같은 신성함은 라짜로가 절벽에서 추락했다 깨어나는 부활의 장면 이후 본격적으로 펼쳐진다. 늑대와 이야기할 수 있는 성자의 이야기가 내레이션으로 끼어들고 울음소리로만 등장했던 늑대가 진짜 그 모습을 드러냈을 때, 죽은 듯했던 라짜로의 모습 위로 이런 이야기가 얹힌다. “늑대가 그를 발견한다. 그에게 다가간 늑대는 발톱과 이빨을 드러내며 잡아먹으려 하지만 처음 맡는 냄새에 멈춘다. 무슨 냄새였을까. 그것은 선한 사람의 냄새였다.” 이제 라짜로는 추위와 배고픔마저 초월한 존재가 되어 안토니아의 가족을 만나고 오랫동안 찾아 헤맸던 탄크레디를 만난다. 라짜로의 손길과 눈길이 머무는 곳에선 작은 기적들이 일어난다. 쓰레기 더미 속에서도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하는 변치 않는 선함. 그러나 성자의 수난은 끝나지 않고, 마지막 수난에 앞서 영화는 아름답고 먹먹한 기적의 자리를 마련한다. 라짜로와 안토니아 가족이 탄크레디의 집에서도 퇴짜 맞고 아름다운 음악 소리를 따라 들어선 성당에서도 쫓겨났을 때 벌어지는 신성한 기적. “음악이 우릴 따라오고 있어.” 성당에서 음악이 사라지고, 사라진 음악이 길 위를 떠도는 사람들을 따르는 기적. 영화에서 가장 종교적이며 마술적인 색채로 칠해진 아름답고 거룩한 순간은 동시에 영화에서 가장 슬픈 장면이 되어버린다.

투명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던 라짜로의 두눈에 처음으로 그늘이 드리웠을 때, 그럼에도 그 슬픔이 냉소와 분노로 향하지 않을 때 이 영화의 진가가 드러난다. 절대적 선으로 상징되는 라짜로와 신성함의 가치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눈먼 사람들에 관한 기묘한 우화인 <행복한 라짜로>는 투명하게 우리의 부끄러움을 비춘다. 선한 사람의 냄새조차 맡을 수 없게 된 마비된 감각을 일깨운다. 우리가 무시하고 외면하고 내쳤던 무수한 라짜로들을 상기시키며.

● <행복한 라짜로>의 배우들

영화에서 라짜로는 절대적으로 선하고 순수한 영혼을 가진 존재다. 그런 라짜로를 연기하는건 연기가 처음인 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 크고 둥근 눈, 아래로 부드럽게 처진 어깨, 공격적이지 않은 손, 부지런한 발을 가진 그는 1998년 이탈리아 오르비에토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재학 중 영화에 캐스팅돼 <행복한 라짜로>에서 생애 처음으로 연기를 경험했다. 일찌감치 라짜로의 존재를 알아보는 어른 안토니아는 알바 로르바케르가 연기한다. 알바 로르바케르는 감독인 알리체 로르바케르의 언니다. 동생의 영화 <더 원더스>에 이어 <행복한 라짜로>에까지 출연했으며, <아이 엠 러브> <사랑하고 싶은 시간> <테일 오브 테일즈> <도우터 오브 마인> 등으로 잘 알려진 이탈리아 배우다. 알폰시나 데 루나 후작 부인으로 출연하는 니콜레타 브라스키도 반갑다. <인생은 아름다워>의 도라로 유명한 브라스키가 로베르토 베니니의 <호랑이와 눈> 이후 15년 만에 출연한 영화가 <행복한 라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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