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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전> 김진원 감독 - ‘미친’ 설정과 관객의 접점을 고민했다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19-08-22

“12년 전에도 이곳에 왔었는데….” 8월의 한낮에 <씨네21> 스튜디오를 찾은 김진원 감독이 장편 데뷔작인 고어영화 <도살자>(2007)로 인터뷰를 했던 추억을 떠올렸다. 20대 후반에 한국 공포영화의 신성으로 등장했던 그는 꽤 긴 시간이 흘렀어도 호러 마니아들 사이에서 잊히지 않는 이름이었다. 장고 끝에 나온 <암전>은 공포영화를 찍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힌 신인감독 미정(서예지)이 과거에 모교 선배인 재현(진선규)이 만든 영화가 사실은 귀신이 찍은 영화라는 소문을 파헤치면서 점점 광기에 사로잡히는 이야기다. 영화를 향한 지나친 애정이 과욕과 집착으로 이어지는 섬뜩한 과정을 그려낸 <암전>은 호러영화가 필연적으로 지니는 파괴적인 정서에 매료된 김진원 감독의 취향을 선명히 드러내는, 인장 같은 영화다.

-모든 영화는 숙명적으로 극장에서 잠시 암전의 시간을 거친다는 점에서 영화에 관한 공포영화인 <암전>은 제목부터 흥미롭다. 영화에 미쳐버린 사람들의 운명론을 호러적인 방식으로 극대화했다.

=그동안 쓰던 시나리오가 잘 안 돼 정말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마음으로 썼던 이야기가 <암전>이다. 공포영화 감독이라고 주인공을 설정하기는 했지만 애초엔 내 이야기를 하자는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쓰다보니 점점 내 감정을 넣게 되고, 내가 자주 쓰는 말 같은 것을 대사에 쓰게 되더라. 극중 인물들에게 가능한 한 빨리 상업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내 열망 같은 게 전가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못 만든 호러영화들은 대개 주인공이 관찰자 시점에 머무르는 경우가 많고, 결국 후반부에 공허해진다. 그런데 <암전>은 귀신의 존재에 대한 설명을 줄이고 주인공 미정의 심리에 집중하는 영화다.

=미정을 표현할 땐 영화감독이 주인공인 다른 영화들과 차별화되는 새로운 지점을 찾아나가려고 했다. 영화감독의 생활이 지니는 고충이나 애환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 같은 건 피하려고 했다. 상업영화에 그런 선명한 묘사가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지만, 가능한 한 주인공이 어떤 감각을 느끼는지, 그것이 관객에게 어떤 감정을 유발하는지에만 집중하려고 했다. 배우가 집중력 있게 연기를 받쳐줘서 가능했던 부분이다.

-자신과 타인의 삶을 희생시켜서라도 작품을 잘 만들고 싶다는 집착과 광기의 상태를 배우에게 어떻게 설명했나.

=서예지 배우에게 미정을 순례자라고 표현했다. 순례자의 길을 따라 오직 앞만 바라보고 나아가는, 다른 건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사람. <암전>에는 카메라를 통해 무언가를 찍는 행위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한마디로 미정이 바라보는 세계의 모든 것이 시나리오를 위한 인풋으로 치환된다는 의미기도 했다. 미정은 작품을 위한 게 아니라면 세상의 풍경이 아예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영화 속 공간을 미니멀하게 구성하기도 했다.

-젊은 시절의 재현이 동료들에게 공포영화 <엑소시스트>(1973)를 통해 구원받았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공포영화로 구원받았다는 말에 관객이 설득될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 제작사에서도 처음엔 말이 많았던 부분인데 배우가 연기를 통해 미묘한 지점까지 잘 살려줬다. 재현은 ’이상하지만 착한 형’의 느낌을 살리고 싶었다. 속된 말로 또라이지만 좋은 사람이다. 흔히 말하는 진정성 같은 게 느껴지는 그런 사람.

-재현의 그 대사만큼은 감독의 진심처럼 느껴지더라.

=고등학교 3학년 때 정신적으로 무척 힘든 시기가 있었는데 그 시기 내가 재현과 비슷했다. 당시 미술학원을 다녔는데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지하 카페에서 열리는 영화 상영회에 참석하곤 했다. 어느 날 <아키라>(1988)를 보러 갔다가 시간대를 잘못 찾아가서 <이블 데드>(1981) 무삭제판을 보게 된 거다. 그때, 무언가 내게 확 왔다. 그동안의 현실적인 고민이 바보처럼 느껴지면서 연기처럼 사라져버리는 경험이었다고 할까. 지금 생각하면 당시엔 그냥 정신줄을 놓은 게 아닌가 싶은데, 거창한 표현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구원을 받았던 것 같다.

-불타버린 폐극장과 재개발구역에 위치한 재현의 집이 공간적으로 돋보인다. 1인칭 시점의 공포 게임 같은 카메라 움직임이 긴장감을 더하기도 하는데, 형식적으로 새롭게 시도한 부분이 있다면.

=오프닝은 전형적인 귀신 공포, 즉 사람들이 주로 생각하는 익숙한 호러영화의 오프닝을 제시하려고 했다. 그다음부터는 카메라를 픽스하고, 숏 구성도 정면 클로즈업과 리버스숏 정도로 단순하게 꾸렸다. 공간 설명도 최소한으로 줄이고. 미정이 직접 보지 않는 것은 화면에 나오지 않게 하자는 주의였다. 그렇게 미니멀하게 가다가 귀신이 찍었다는 영화에 점점 다가갈수록 카메라가 조금씩 흔들린다. 미정이 재현의 집에 조심스레 들어갈 때 처음으로 카메라가 움직여서 미정을 따라간다. 정적인 영화에서 동적인 영화로 점점 무브먼트가 가미되도록 했다. 클라이맥스에선 카메라가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사건 종료 후 다시 미니멀한 형태로 돌아가는 식이다.

-과거에 재현이 찍은 영화 속 영화 <암전>과 현재 폐극장을 방문한 미정의 상황이 환상처럼 겹치는 구성이 독특했다.

=혼돈을 주고 싶었다. 사실 초기 시나리오는 다소 설명적이었다. 차근차근 인과관계를 설명해주고 주인공이 관찰자에 가까워서 더 납득 가능하긴 했지만 감독으로서 재밌지가 않더라. 자칫 위험하고 도전적일 수 있지만 후반부만큼은 미친 듯이 폭풍처럼 휘몰아치다가 ‘딱!’ 끝나버리는 그런 시퀀스를 넣고 싶었다. 귀신이 찍었다는 영화의 정체가 무엇일지 궁금해하는 관객에게 영화의 실체를 공개하는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을 많이 했다. 어느 시점에 영화가 플레이되는 모습을 스크린으로 보여주는 것 말고 새로운 방식은 없을까 고민하다가 약간 미친 아이디어이긴 하지만 당시의 영화 현장에 환상처럼 들어가는 방식을 고안했다. 폐극장이라는 로케이션 자체가 영화를 상영하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폐극장을 살아 있는 괴물처럼 표현하려고 했나. 공간이 왜곡되거나 움직이는 것 같은 생물성을 고심한 듯 보였다.

=시각적으로 더 강하게 가려고 했는데 현실적 여건으로 마음껏 하지못해 아쉬움이 남는다. 극장 벽면은 괴물의 식도처럼 주름을 내려고 했다. 극장 스크린은 괴물의 크고 네모난 입처럼 보였으면 했고. 그래서 마지막쯤엔 괴물이 침을 흘리듯이 폐극장 벽면에서 피가 흘러내리면서 그 안에서 인물들이 싸우는 그림을 상상했다. 로케이션은 군산에 있는 국도극장을 섭외했는데 규모가 크고 2층 분위기가 살아 있는 옛날 극장의 느낌을 구현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더 크고 모호한 공간으로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깊이’를 알 수 없는 곳처럼 보이게 했다.

-순미 귀신의 외양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순미도 가슴이 좀 아픈데…. (웃음) 원래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다. 기존의 귀신보다는 유령에 가까운 개념을 더 보여주고 싶었다. 바닥에 발을 딛고 있고, 각기춤을 추면서 몸을 뒤트는 것만큼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원래는 폐극장 안에 와이어를 설치하려 했는데, 벽면 상태가 좋지 못해서 나중에 CG 처리로 다리를 지우는 방식을 택했다. 순미의 눈 표현도 고민했는데, 양쪽 눈의 느낌을 다르게 살렸다. 한쪽은 불에 타서 멀어 있고, 한쪽은 늑대처럼 동공이 매우 작은 이미지다. 또 귀신 호러지만 마지막쯤엔 현실에서 물리적 공격을 가하는 설정을 넣어서 이런 장르적인 혼란을 관객에게 설득시키고 싶었다. 아마 호불호가 갈리는 부분일 텐데, 귀신 호러로 쭉 가다가 후반부에 슬래셔 요소가 들어오면서 사이코 호러식의 변주가 들어오는 것이다.

-앞으로 계속 김진원의 고어영화를 볼 수 있을까.

=오해를 풀고 싶은데 난 앞으로 고어만 할 생각은 없다. <도살자> 당시엔 한국에 고어가 없었기 때문에 도전했던 것이고, 지금은 시스템 안에서 새롭고 신선한 것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물론 호러적 색채가 아예 없으면 만드는 내가 좀 힘들지 않을까 싶다. 마냥 밝은 영화는 못 견딜 것 같다. 차기작으로 <네크로맨틱>(시체성애)이라는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장르는 호러 액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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