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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워리>, 비범했던 감독이 만든 또 한편의 평범한 영화

너무 쉽게 말한 희망

구스 반 산트 감독에 대한 최근의 평가들은 좋지 않다. 그는 최근 10년간 인상적인 작품을 만들지 못했으며 <밀크>(2008)에서부터 초기의 실험정신을 잃었다는 평가들이 그것이다. 이런 평가에도 불구하고 <아이다호>(1991)나 <엘리펀트>(2003)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구스 반 산트 감독의 영화를 보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돈 워리>(2018)를 본 관객 또한 이런 마음이었을 것이다. 알코올 중독을 극복한 카툰 작가 존 캘러핸의 실화라는 시놉시스 자체는 사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음에도 구스 반 산트 감독이라면 다른 관점으로 접근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돈 워리>의 내용은 비교적 단순하다. 알코올 중독자였던 21살의 존 캘러핸(호아킨 피닉스)은 파티에서 만난 덱스터(잭 블랙)와 함께 차를 타고 이동하며 여러 곳에서 술을 마신다. 만취한 덱스터는 교통사고를 내고 이로 인해 존 캘러핸은 평생 휠체어에 의지하게 된다. 그 후에도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존은 어떤 계기로 알코올 중독 치료 모임에 나가게 되고 그곳에서 도니(조나 힐)를 만나면서 서서히 자신을 치유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돈 워리>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는데, 첫 번째는 존 캘러핸의 실제 그림이 애니메이션의 형식으로 삽입된다는 점이다. 이 그림들은 자신의 삶에 대한 비유 혹은 풍자를 담고 있다. 두 번째 특징은 영화의 시간이 비선형을 이룬다는 점이다. 영화에는 여러 시간대가 뒤섞여 있다. 알코올 중독 치료를 모두 끝낸 지점에서 치료를 시작하던 지점으로 갔다가 그 이전으로 돌아가기도 하며, 다시 치료 모임을 하던 시절로 가기도 한다.

비선형의 시간을 다루는 많은 영화들이 품고 있는 전제는 한 인간의 삶은 연대기로 구성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과거는 현재의 원인이 아니며, 현재는 과거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인간의 삶은 시퀀스로 구성되지 않고, 시퀀스는 삶에서 인과로 설명할 수 없는 여러 부분을 삭제한 결과물일 뿐이다. 다시 말해 많은 비선형적 시간의 영화들은 인과율을 거부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인과율을 거부하지 않는다. 존은 왜 휠체어에 의지하게 되었는가? 도니는 말한다. 더 강해지게 하려고. 즉,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의 큰 섭리가 작동한 것이다. 이 영화가 인과율을 내세우는 한, 영화의 비선형적 시간은 관객에게 풀어야 할 퍼즐이 되며, 불필요한 혼란만을 줄 뿐이다. 존이 치료를 시작한 이후에 존의 비참한 과거를 환기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영화를 선형의 타임라인으로 재구성해보면 영화가 평범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알게 된다. 존이 어린 시절의 상처로 인해 알코올 중독에 빠졌고, 알코올 중독으로 인해 사고를 당했으며, 도니와 치료 모임의 도움으로 알코올 중독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이야기는 시련과 조력자, 그리고 시련의 극복이라는 전형적인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 모든 인과의 바탕에는 신의 섭리가 있으며, 치료 또한 위대한 힘에 대한 믿음에 달려 있다. 다시 말해 신과 존의 치료, 그리고 인과율은 모두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아이다호>에는 없고 <돈 워리>에는 있는 것

도니는 이렇게 말한다. “스스로 헤쳐나갈 수도 없고 의지할 존재도 없다면, 인생 조진 거죠.” 도니의 말은 평범한 진리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스스로 헤쳐나갈 수도 없고, 의지할 존재도 없는 인생들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말일지도 모른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이처럼 철저하게 ‘조진 인생’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스스로 헤쳐나갈 수도 없고, 의지할 존재도 잃은 <아이다호>의 마이크(리버 피닉스)였다. <아이다호>에서 신은 부재하거나 혹은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철저히 침묵하고 있다. 그리고 신의 침묵 앞에서 모든 고뇌가 시작된다. 그러나 <아이다호>와 달리 <돈 워리>에서 신은 침묵하지 않는다. 신은 도니의 입을 통해 존에게 말을 건다. “걱정하지 마, 희망은 멀리 가지 않았을 거야”라고.

그리고 신은 영화의 비어 있는 인과를 채우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13살 때부터 27살까지 알코올 중독이었던 존이 갑자기 술을 끊기로 결심하게 된 계기는 어머니의 환영을 보게 된 영적 체험에 있다. 또한 존과 아누(루니 마라)의 사랑도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존과 아누는 자원봉사자와 환자로 병원에서 만났고 7년 후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며, 곧바로 어떤 어려움도 없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아누는 존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인물처럼 비현실적이다. 아누는 마치 시련 끝에 신이 내린 보상처럼 그려진다.

또한 인과로 구성된 영화와 실화가 서로 충돌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영화에 삽입된 실제 존 캘러핸의 그림은 영화에서의 존과 어울리지 않는다. 존은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며, 긍정적이며, 유쾌한 사람으로 그려진다. 이런 존과 지독하게 냉소적인 카툰은 융화되지 않는다. 영화는 존의 지독하게 냉소적인 카툰에 대해서 꽤 많은 장면을 통해 변명한다. 존이 그저 웃기는 그림을 그릴 뿐이라거나, 또는 존이 ‘옛날사람’이라는 말을 통해서다. 그러나 이런 해명은 존의 그림을 존 캘러핸이라는 사람과 분리하려는 시도처럼 보인다. 존의 냉소적인 카툰은 존이 세상을 받아들이는 하나의 방식이거나 세상을 견디는 하나의 수단이었을 수도 있다. 영화는 그림과 예술이 존에게 가지는 의미를 축소하며 모든 치유를 신의 뜻으로 돌리고 있다.

그럼에도 영화에는 관객이 현실에 적용할 만한 교훈들이 있다. 문제를 자신의 내면에서 찾아야 한다는 도니의 가르침이 그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타인을 용서하듯이 자신을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있다. 영화 초반부에 도니는 이런 기도를 한다. “하나님, 바꿀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평온함을, 바꿀 수 있는 것을 바꿀 용기를,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우리는 바꿀 수 없는 것과 바꿀 수 있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없기에 바꿀 수 있는 것을 받아들이며 괴로워하고, 바꿀 수 없는 것을 바꾸려는 무모한 시도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짓을 하는 인물들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바라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자신을 버린 어머니를 찾으면 자신의 삶이 나아질 거라고 믿는 <아이다호>의 어리석은 마이크를 통해 우리는 또 다른 우리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마이크와 함께 절망 속을 헤맬 때 우리는 마이크와 다르지 않음을 알게 된다. 영화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처럼 우리의 무능을 알게 하는 것뿐인지도 모른다. <굿 윌 헌팅>(1997)에서 타인의 삶과 심리에 대해 평생을 연구한 교수인 숀(로빈 윌리엄스)도, 천재 소년 윌(맷 데이먼)도 모두 자신의 상처 앞에서는 어찌 할 바 모르는 것처럼,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삶 앞에서는 무력하기만 하다. 그리고 이런 절망과 무력함 앞에서, 사람들은 희망을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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