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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여성영화감독전①] <잠금된 시간> 지빌레 쇠네만 감독 - 영화는 좁은 방에 갇혀 있던 나를 세상 속으로 꺼내왔다
장영엽 사진 최성열 2019-09-19

1970년대, 동독영화주식회사(DEFA)의 촉망받는 감독이었던 지빌레 쇠네만은 더이상 자신이 원하는 영화를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고심 끝에 서독으로 이주 신청을 한 쇠네만 감독에게 돌아온 건 ‘국가안전교란죄’라는 죄목과 감옥에서의 삶이었다. 다큐멘터리 <잠금된 시간>은 지빌레 쇠네만 감독의 시간 속에서 영원히 닫혀버린, 1985년의 몇달과 통일 이후 독일 사회의 풍경을 조명하는 작품이다. 그는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동독으로 돌아가 ‘잠금된 시간’ 동안 만났던 사람들을 수소문한다. 감방 동기, 교도관, 판사, 영화인, 변호사. 쇠네만은 과거에 자신이 경험했던 부당한 처사에 대한 답을 구하려 하지만, 통일 이후 그들은 이미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아이러니를, 쇠네만 감독은 자신의 진솔한 경험담을 통해 들려주고 있다. 사회의 역동적인 변화와 혼란을 응시하고, 이를 자기만의 프레임으로 바라보며 ‘시네마 베리테’를 실천한 독일 여성감독, 지빌레 쇠네만을 만났다.

-처음 한국을 찾은 소감은.

=한국에 늘 관심이 많았다. 과거 독일과 마찬가지로 분단된 국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독일에서도 분단 전에, 통일된 이후에 어떤 일들이 일어났는지 굉장히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비슷한 맥락에서 통일 이후 한국의 미래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상영한 <잠금된 시간>은 당신이 1990년에 연출한 작품이다. 다시 보니 어떤가.

=시기적으로 이 영화를 오랜만에 다시 보는 건 아니다. <잠금된 시간>은 1990년 라이프치히다큐멘터리영화제에서 처음 공개된 뒤 베를린, 스페인, 독일, 일본 등 세계 각국에서 꾸준히 상영됐다. 처음 영화를 만들 때 보편성을 의도한 건 아니었는데, 전세계에서 <잠금된 시간>이 상영되고, 관객이 그들의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며 이 영화가 가진 보편성을 깨닫기 시작했다. 세계 어느 곳에서나 국가 또는 조직이 권력을 이용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변화시키려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고, 인간이 거대한 기계 속에 들어가 그 일부가 되며 문제가 발생한다. 나로서는 세계 각국에서 이처럼 보편적인 문제점을 발견했다는 점이 놀라웠다.

-1990년 10월 동독과 서독은 통일됐다. <잠금된 시간> 제작에 통일이 영향을 미쳤나.

=어떤 역사적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관심을 갖지만, 그런 사건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재빨리 잊히곤 한다. 나는 영화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기억이 생생할 때 분단 독일 시절 나의 경험을 영화로 기록하고 싶었다. 무고한 내가 어떤 누명을 쓰게 되었는지, 국가보안부와 비밀경찰에 어떤 일을 당했는지 말이다. 당시의 나는 국가권력의 피해자인 동시에 스토리텔링을 할 수 있는 예술가였다. 이 두 가지 사례에 해당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서둘러 영화로 나의 경험을 기록하고 싶었다. 또 나는 가해자들을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며, 그들이 후회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마음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두눈 부릅뜨고 그들의 멱살을 잡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그들을 대하고 싶었고, 변명 대신 설명을 들으며 그들을 이해하고 싶었다.

-당신은 DEFA에서 영화를 만들던 감독이었다.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거절당한 뒤 서독으로 이주 신청을 했다고 들었다. 당신의 작품은 왜 거절당했나.

=정확히 말하자면, 서독으로 이주 신청을 한 건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도 영화감독이었는데, 그는 동독이 원하는 전형적인 선전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남편은 다른 곳으로 여행가는 내용을 담거나 사회적으로 억압받는 사람을 다루는 등 정권이 원치 않는 내용의 작품을 만들었고, 그 때문에 우리가 만들고자 했던 프로젝트가 거절당했다. 우리는 이런 조건 아래서는 더이상 영화를 만들 수 없다고 확신하고 동독을 떠나기로 결정한 것이다.

-1980년대 활약한 여성감독이 많지 않았다. 동독에서 국가안전교란죄로 형을 받은 뒤 서독으로 이주해 감독으로서의 커리어를 이어나가기가 쉽지 않았을 듯한데.

=동독은 여성감독이 많지 않았지만 소수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은 적은 없었다. 동독 사회에서는 소년, 소녀들에게 동등한 방식으로 자신감을 갖고 살아가는 법을 가르친다. 그런데 서독에 가니 분위기가 전혀 달랐다. 여성감독으로서 동독에서와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다. 서독에서는 오랫동안 여성의 역할이 고정되어왔다. 자녀를 양육하고, 음식을 만들며, 가정을 지키고, 남편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 서독 사회 속 여성의 역할이었다. 그런 점이 쉽지 않았다.

-<잠금된 시간>에서 당신은 수감되었던 감옥을 다시 찾아가 그 안에서 촬영하는 등 과거의 트라우마와 정면으로 마주한다. 개인적으로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을 텐데.

=맞다. 트라우마를 다시 체험한다는 건 굉장히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하지만 과거와 완전히 달라진 한 가지가 있다. 자유가 생겼다는 거다. 나는 촬영하며 원할 때 언제든 그곳을 떠날 수 있었고, 어떤 사람을 보고 싶지 않을 때 언제든 돌아서서 나올 수 있었다.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 자체가 내게는 굉장한 치유의 의미로 느껴졌다.

-당신은 감방 동기, 교도관, 판사, DEFA 스튜디오의 디렉터, 변호사 등을 찾아가 질문을 던진다. 촬영을 시작하며 당신이 원하는 답을 그들이 줄 수 있을 거라 예상했나.

=내가 그들에게 원했던 건 왜 나를 억압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답변이었다. 그러나 정작 그들을 만났을 때 받았던 인상은 그들이 자신의 체면을 위해 최대한 좋은 모습으로 스스로를 포장하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잠금된 시간>을 촬영한 시기는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 사람들에게 어떤 처벌이 내려질지 모르는 혼란의 시기였다. 아마 나를 억압한 사람들 또한 가능한 한 무고하게 보이기를 바랐을 거다. 일례로 도서관에서 예쁜 옷을 입고 일하던 여성은 과거 빳빳한 제복을 입은 채 나를 비롯한 수감자들에게 엄격하고 무섭게 대하던 교도관이었다. 그랬던 그가 상냥한 부인처럼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그처럼 친절한 캐릭터로 무장하고 있다 하더라도 은연중에 보이는 제스처 하나,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에서 그들의 진정한 캐릭터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도 군부독재 시절이 있었잖나. 그 당시 사람들을 잔인하게 고문했던 비밀경찰들이 거리에 나와 인파 속에 묻히면 너무나 정상적이고 보편적인 사람으로 보일 거다.

-시간이 더 흐른 뒤에 <잠금된 시간>의 이야기를 다시 다뤄볼 생각은 없나.

=10년 전쯤 그런 생각을 잠시 한 적 있다. 주변에서도 여러 사람들이 <잠금된 시간>의 후속 이야기를 만들어볼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그러나 나는 ‘더이상은 안 된다’는 입장이다. 우선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다. 내가 찾아갔던 사람들이 그때만큼 술술 이야기를 풀어놓지 않을 것 같다. 그리고 나 역시 영화를 만들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잠금된 시간>을 남겼고, 이 영화는 아직까지 살아 있다. 그걸로 내 역할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잠금된 시간>은 감독으로서의 목표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누군가 나의 과거에 대해 묻는다든지 내가 스스로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할 상황이 왔을 때, 나는 과거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고 이 작품을 이야기하곤 한다. 이 작품이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나를 지켜주는 보호막 같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잠금된 시간>은 극단적으로 좁은 공간으로부터 굉장히 넓은 세상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영화를 만들기 전 나는 가장 좁은 방에 고통스럽게 갇혀 있었는데, 지금은 이 영화로 인해 내가 지구 반 바퀴를 돌아 한국에 와 있지 않나. 그런 점에서 <잠금된 시간>은 나에게 의미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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