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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나 내나> 배우 장혜진 - 지치면 쉬면 되지 힘들면 울면 되지 화날 땐 화내면 되지
이주현 사진 백종헌 2019-11-07

오프더레코드. 기록으로 남기지 않을 것을 전제로 한 비공식 발언. 진짜 재밌는 이야기는 오프더레코드 상태에서 오갈 때가 많다. 배우 장혜진과의 인터뷰는 실제로 녹음기를 껐다가 켜기를 반복하며 진행됐다. 종종 오프더레코드를 요청했던 건 거짓말을 못하는 솔직한 성격 때문. 장혜진은 적당한 거짓말로 상황을 눙치는 데 영 서툴러 솔직하게 말하고서 상대를 믿어버리는 사람이다. 오죽하면 ‘알고 있는 것을 모르는 척’ 연기해야 하는 상황이 제일 어렵다고 할까. <니나 내나>의 이동은 감독은 그런 장혜진을 두고 “머리로 계산하지 않고 직관적이고 솔직하게 연기하는 배우”라고 했다. 이동은 감독은 <환절기>(2018), <당신의 부탁>(2017) 그리고 <니나 내나>까지, 평범한 듯 보이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상처를 안고 있는 고유한 인물들을 가족 드라마로 풀어내왔다. <니나 내나> 역시 오래전 집을 나간 엄마에게서 당도한 엽서 한장으로 미정(장혜진)의 가족이 부산에서 파주까지 길을 나서는 로드무비다. 엄마이자 누나이자 딸로서 동분서주하는 미정의 모습은 <기생충>(2019)의 충숙(장혜진)과는 또 다르다. 반지하방에서 가족의 생계를 고민하던 충숙은 삶에 대한 절실함을 능청과 박력의 에너지로 뿜어냈다. <기생충> 캐스팅의 계기가 된 윤가은 감독의 <우리들>(2016)에선 무심한 듯 속깊은 시선을 보여주는 초등학생 선의 엄마를 연기했는데, 오랫동안 그곳에서 살아온 듯한 ‘사람’을 보여주는 장혜진의 연기는 어떤 작품에서건 변치 않는다. 긴 무명의 시간을 지나 <기생충>으로 주목받고 주연작 <니나 내나>를 선보이게 된 장혜진을 만났다. 가면을 쓸 줄 모르는 배우의 솔직한 표정이 그의 말에도 그대로 담겨 있다.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으로 칸국제영화제에 다녀온 게 올해 5월이다. <기생충>이 선사한 기분 좋은 낯선 경험들이 많았을 것같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상상만 하던 일들이 현실로 이루어졌으니까. 예전에 독립영화 찍을 때 “감독님, 우리 칸 가야지” 그런 말을 농담처럼 하곤 했는데,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유재석이 부른 노래 <말하는 대로>처럼, 말하는대로 이루어졌다. (웃음) 꿈같은 일들의 연속이라 한동안은 현실감이 없었다.

-<기생충> 이전과 이후, 배우로서의 삶에서 달라진 것이 있다면.

=계속 작품이 들어온다. 최근에 받은 각본의 양이 지난 10년동안 받은 것보다 더 많다.

-<니나 내나> 언론 시사 전날엔 잠을 설쳤다고 들었다. 주연을 맡은 작품이라 부담이 컸나.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잤다. 혹시나 내 부족함이 들통나면 어쩌나 걱정도 되고, 안 좋은 댓글도 걱정되고. 활발하고 활기차 보이지만 소심한 면이 있다. 그래서 미정이 더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상처가 많은데 괜찮은 척하는 모습들이. 어쨌든 이 영화가 어떻게 보여질까 걱정돼서 그 마음을 다독이느라 잠을 잘 못 잤다.

-<우리들>을 함께한 윤가은 감독 말에 따르면 “누구 앞에서든 긴장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건 맞다. 칸에 갔을 때도 긴장을 하나도 안 했다. 그냥 즐거운 마음으로 레드카펫을 걸었다. 송강호 선배님도 “절대 울면 안 된다, 평생 남을 사진인데 긴장한 티 역력하면 안 된다”고 당부하셨고. (웃음) 그런데 이번엔 좀 달랐다. 어제 <니나 내나> 예매순위도 찾아봤다. 주연배우들이 왜 스코어에 신경 쓰는지 알 것 같다.

-이동은 감독과는 감독과 배우로 만나기 전부터 알던 사이였다.

=중2 때부터 쭉 알아온 친한 친구의 동생이 이동은 감독이다. 친구 동생이 글을 쓰고 영화를 찍는다는 사실은 진작 알고 있었고, 이동은 감독의 단편 <바.밤.바>(2011)에도 출연했다.

-<당신의 부탁>에도 짧게 출연했다.

=사실 다른 역을 하고 싶었는데 그 역은 이미 캐스팅됐다고 안된다더라. (웃음)

-<니나 내나>의 경우 시나리오를 읽은 관계자들이 모두 장혜진 배우를 추천했다고 하던데.

=명필름 대표님도 그렇고 시나리오를 읽은 분들이 미정의 모습에서 내가 많이 오버랩됐다고 하더라. 이동은 감독도 ‘누나의 친구’가 아니라 ‘배우’ 장혜진의 모습을 보고 캐스팅해준 것 같아 고맙다.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스스로도 미정과 자신이 닮았다고 생각했나.

=애써 밝은 척하고, 괜찮은 척하고, 남 생각해서 한 행동들이 때론 눈치없어 보이고. (웃음) 열심히 살려는 모습, 긍정적 태도도 닮은 것 같다. 안 좋은 게 꼭 안 좋은 것만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나 역시 힘든 시기를 겪어왔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랐으면 연기하고 싶은 욕망이 꿈틀대지 않았을 거다.

-이동은 감독은 미정과 장혜진 배우가 “감정을 숨길 줄 모르는,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라는 점에서 닮았다고 했다.

=아직 날 잘 모르네. (웃음) 맞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솔직할 땐 정말 솔직하다. 좋고 싫은 것이 분명한데, 힘들 땐 좀 속인다. 낯선 사람을 만나면 낯선 환경이 부담스러워서 괜히 활발해지고 방방 뜬다. 불편한 분위기를 잘 못 견딘다. 상대가 편해야 나도 편하게 연기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애써 편해지려고 노력한다.

-<니나 내나>에서 동생으로 출연하는 두 배우 태인호, 이가섭과도 처음 만난 사이인데 오래 본 사이처럼 스스럼없이 다가가 금세 친해졌다고 들었다.

=두 배우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다. 태인호는 학교 후배인 배우 박해준의 사촌동생이고, 이가섭은 출연할 뻔했던 영화의 주인공이어서 시선이 갔다. 두 배우가 미정의 동생으로 캐스팅됐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만세를 불렀다. “내 느그랑 진짜 연기하고 싶었다 아이가.” 그 말에 모두 무장해제됐던 것 같다. (웃음) 이상희 배우가 그러더라. “내가 태인호 오빠를 아는데, 나는 친해지는 데 한달 걸렸다. 근데 언니는 5분 만에 친해졌다며. 이 오빠가 낯을 가리는데….”

-부산 사투리의 말맛을 이토록 사실적으로 살린 작품을 거의 본 적없다. 리얼한 부산말을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이 영화의 재미다.

=이동은 감독은 물론이고 태인호, 이가섭 배우 모두 부산 출신이다. 이상희 배우도 울산 출신이고. 현장에서 엄청 수다를 떨었다. 수다 천국이었지. (웃음) 사투리 연기에 있어선 전달력과 관련한 고민이 있었다. 사투리를 아는 사람들은 뭉개듯이 “됐다 마 무라” 라고 해도 상황의 뉘앙스를 아는데, 그걸 모르는 사람이 많을 테니까. 그런데 감독님이 단호하게 정리해줬다. 말이 정확하게 전달되는 건 중요한 게 아니라고, 분위기가 중요한 거라고. 덕분에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다.

-붉게 염색한 짧은 파마머리는 어떻게 나온 스타일인가.

=감독님의 동명의 그래픽노블에는 미정이 긴 머리로 나오는데, 당시 내 머리가 짧아서 웨이브를 넣고 염색하는 방향으로 정했다. <길>(1954)에서 젤소미나를 연기한 줄리에타 마시나 느낌으로. 혹은 뮤지컬 <애니>의 뽀글거리는 파마머리 느낌. 예전에 어느 조연출이 “선배님, 젤소미나 같아요”라고 얘기한 적이 있다. 찾아보니 내가 언뜻 줄리에타 마시나를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입 가리고 눈만 보면 니콜 키드먼 같기도 해”라는 얘기까지 들었다. 너무 나갔나? (웃음)

-원래 시나리오의 톤은 어땠나. 장혜진이라는 배우가 미정을 연기함으로써 영화가 더 귀여워진 것도 같은데.

=내가 내 입으로 귀엽다고 말하는 건 너무 창피하지만 원래 시나리오보다 밝아진 것 같긴 하다. 배우마다 연기하는 게 다 다르기 때문에 연기가 재밌는 것 같다. 뮤지컬과 연극의 트리플 캐스팅 같은 것도 각 배우의 버전을 다 챙겨보는 분들이 있지 않나. 이 배우 하는 거 다르고, 저 배우 하는 거 다르니까. 마찬가지로 나 말고 다른 배우가 미정을 연기했다면 그 배우만의 색깔이 나왔을 거고, 미정에게도 나만의 색깔이 나온 게 아닌가 싶다.

-캐릭터엔 배우의 천성이 묻어난다고 생각하는데, 자신의 모습을 완전히 지우는 연기가 하고 싶기도 하나.

=예전엔 그러고 싶었다. 나를 지우고 캐릭터로만 존재하는, 그렇게 멋있는 연기를 하고 싶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연기하지 못한다는 걸 알았다. 자꾸만 들킨다. 무대에서나 작품에서나 완벽하게 나를 감출 수가 없더라. 그렇게 연기하는 건 내 영역이 아닌 것 같았고, ‘들켜도 어쩔 수 없지’하면서 연기했다. 아직은 역량이 부족하다. 언젠가는 내가 사라지고 캐릭터만 남게 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저건 내 모습이 아니고 100% 연기야’라는 날이 올 수 있기를 바란다. 가면을 써야 하는 직업인데 가면을 잘 못 쓴다. 연기를 할 때 나에게서부터 출발해서 캐릭터를 구축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캐릭터를 먼저 구축하고 분석한 다음 거기에 나를 넣는다면 다른 연기가 나올 수도 있을 것 같다.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도 좋아하나.

=상상을 많이 한다. 시장이나 백화점 가서 넋 놓고 사람들을 바라볼 때가 있다. 저 사람은 오늘 무슨 일이 있었을까, 누굴 만나러 가는 걸까 상상한다. 사람들의 감정과 표정, 태도에 관심이 많다. 아이러니한 건 배우는 사람을 연구하고 사람을 연기하는 직업인데, 사람이 제일 나를 힘들게 한다. 한동안 연기를 그만뒀던 것도 사람들과 부딪히는 게 너무 힘들어서였다. 어떤 선배가 그러더라. 배우 집단은 부족한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라고. 아프고 상처받고 부족한 사람들이 연기로 자기를 드러내는 거라고. 그러니 서로 상처주지 말아야 한다고. 이미 상처받은 사람들이니까 서로 잘 다독여야 연기가 좋아진다고.

-10대 때부터 연기가 하고 싶었나.

=초등학생 때부터, 책 읽으면서 개미와 베짱이가 되고, 병아리가 되고, 청개구리가 되는 것들이 너무 재밌었다. 중학생이 되어선 연기가 내 길이라는 마음을 먹었고, 고3 때 연기학원을 다녔다. 그때 김숙을 만나서 친구가 됐다. 입시 준비할 때 모두가 말했다. “니가 무슨 서울이야? 난다 긴다 하는 사람들 다 모일 텐데.” 그런데 난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곤 정말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에 1기로 합격했다.

-그렇게 입학한 학교인데, 졸업 후 연기를 포기하고 고향 부산으로 내려갔다. 연기를 정말 그만둘 마음이었나.

=미련이 없었다. 연기를 해서는 살아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생계의 문제는 아니었다. 한강 다리를 건너면 한강이 부르는 것 같았다. 아예 연기와는 무관한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했고, 마트에서 열심히 일해서 능력도 인정받았다. 환경이 달라지니 정신이 번쩍 들더라. 진짜 연기는 사회생활하면서 배웠다.

-윤가은 감독은 “삶과 연기의 밸런스가 좋은 사람”이라고 했다.

=힘든 상황들을 경험했고, 욕심 부려도 안 되는 걸 겪었고, 그러면서 삶과 연기를 분리하게 된 것 같다. 내 삶이 연기에 묻어난다고 생각하지만 온전히 배우로만 살기는 너무 벅찼다. 그렇게 예술적인 사람은 아니라서. 내가 좋아하는 게 뭐고 무엇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알기 때문에, 마음이 힘들기 싫어서 삶과 연기의 밸런스를 맞추려는 편이다.

-이정은, 염혜란, 김선영, 라미란 등 최근 중년 여성배우들의 활약이 돋보이는데 이들의 활약을 지켜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던가.

=너무 감사했다. 그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연기할 용기가 생긴 것 같다. 이정은 언니는 <기생충>에서 처음 만났는데, 언니가 출연한 드라마를 늘 재밌게 챙겨보고 있었고 언젠가 저분과 같이 연기하고 싶다 생각하다가 만난 거다. 그때도 만세를 불렀다. (웃음) 라미란 배우는 친구의 친구, 그러니까 김숙의 친구라서, 숙이 통해서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미 내 마음속에선 친구 같은 존재다. 숙이가 그런다. “미란이는 점잖아. 근데 넌 너무 까불어.” (웃음) 아무튼 현장에 가면 확실히 변화의 물결이 느껴진다. 최근에 JTBC 단막극 <루왁인간>을 찍었는데 감독, PD, CP가 모두 여자였다. 현장에 여성스탭들이 많아지고 있다.

-tvN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에도 출연 예정이다.

=평양의 상류층 캐릭터다. <기생충>에서 반지하에 살다가 럭셔리한 평양 백화점 주인이 됐다. 평양 사투리를 한창 연습하고 있는데 이 작품에도 연기 잘하는 배우들이 진짜 많이 나온다.

-배우로서 다시 꾸게 된 꿈이 있다면.

=우선 오래 가고 싶다. 길~게. 가늘고 길게 연기하는 게 꿈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지쳐서 쉬더라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거라는 믿음과 용기가 생겼다. 지치면 쉬면 되지, 힘들면 울면 되지, 화날 땐 화내면 되지. 그렇게 길~게 연기하고 싶다. 또 <기생충> 땐 너무 정신이 없었는데, 다음에 제대로 정신 차려서 칸에 가고 싶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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