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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아시안영화제] 제16회 홍콩아시안영화제를 가다
글·사진 김성훈 2019-11-21

좋은 영화 상영 이상의 것을 희망하며

하루가 멀다 하고 홍콩은 슬픔과 절망에 빠지고 있다. 홍콩 경찰은 시위대와 홍콩 시민들을 매일 강경 진압하고 있다. 내외신 기자들 또한 경찰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혼돈의 아수라장 속에서 제16회 홍콩아시안영화제가 지난 10월 29일부터 11월 17일까지 홍콩 전역 6개 극장에서 열렸다. 아시아 각국의 재능 있는 젊은 감독들과 그들이 만든 재기 넘치는 영화들을 끌어모아 홍콩 관객에게 선보였다. <씨네21>은 주룽반도, 아니 아시아 전역을 환하게 비추는 등대 같은 홍콩아시안영화제를 직접 찾아 그곳에서 만난 홍콩영화와 영화인들을 소개한다.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쓰는 핼러윈데이에 이미 예고된 참사였다. 홍콩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날인 10월 31일, 홍콩 경찰은 최루탄, 실탄, 후추 스프레이를 앞세워 핼러윈데이가 한창인 란콰이퐁을 예고도 없이 급습해 시위대와 시민들을 강경 진압했다. 각양각색의 마스크를 쓴 시민들이 복면금지법(홍콩 정부가 시위대의 마스크 착용을 금지하는 내용의 법안을 입법회 승인 없이 긴급법으로 발동해 통과시켰다.-편집자)을 위반했다는 이유에서다. 이 과정에서 한 미국인 여성 관광객이 체포됐다. 형광색 프레스 조끼도 내외신 기자들이 안전하게 취재할 수 있는 방패가 되지 못했다. 서울로 치면 이태원쯤 되는 란콰이퐁도 더이상 안전지대가 될 수 없다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다음날 도착한 홍콩은 시위가 22주차에 접어든 탓인지 긴장감이 감돌았고, 사람들의 표정은 밝지 않았으며 심지어 매우 지쳐 보이기까지 했다.

‘光復香港 時代革命’(광복홍콩 시대혁명), ‘FREE HK’, ‘Fight for freedom, Stand with Hong Kong’ 등 도로 곳곳에 시위대가 스프레이로 뿌린 문구들을 볼 수 있는 야우마테이도 예외일 수 없다. 한달여 전 격렬한 시위 장소였던 이곳은 현재 지하철역 출구 하나가 폐쇄됐고, 공공시설물이 파괴된 뒤 복구되지 않는 등 도로와 골목 곳곳에서 시위 흔적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홍콩에서 가장 오래됐다는 주룽 과일 도매시장을 지나면 주룽반도 특유의 고층아파트들이 빼곡히 줄 지어 있는 단지 한복판에 예술영화관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가 있다. 이곳에서 홍콩아시안영화제(집행위원장 클라렌스 추이)가 10월 29일부터 11월 17일까지 무려 20일 동안 열리고 있었다. 한치 앞도 내다보기 힘든 안개 같은 상황에서 홍콩아시안영화제는 등대인 양 주룽반도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한국 영화 팬들에게는 홍콩필름마트나 홍콩국제영화제에 비해 다소 낯선 이름이지만 홍콩아시안영화제는 올해로 16년째를 맞은 젊은 영화제다. 열흘가량 열리는 보통 영화제에 비해 기간도 두배에 이르고,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를 베이스캠프 삼아 홍콩 전역 6개 극장에서 열린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사회적으로 어수선한 상황임에도 아시아의 재능 있는 감독들과 그들이 열정적으로 만든 영화들을 이곳으로 대거 끌어모을 수 있는 건 영화평론가이기도 한 클라렌스 추이 집행위원장과 디디 우 프로그래머의 부지런한 발걸음과 남다른 감식안 덕분이다.

지금의 홍콩을 만날 수 있는 곳

홍콩에 도착한 이틀째인 11월 2일, 영화제가 열리는 프리미어 엘러먼츠 극장이 있는 한 쇼핑몰에서 만난 클라렌스 추이 집행위원장은 흔들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홍콩 시위가 시작되기 전부터 올해 영화제를 준비해왔다. 올해 슬로건으로 ‘지속성’을 내세웠다”라며 “지속성은 창작자들이 자유, 평등, 정의 같은 사회적 가치와 이상을 추구할 수 있는 원동력이다. 현재의 정치·사회적 상황은 우리 영화제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어떻게 반영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고 말했다. 그는 “이 영화제는 좋은 영화들을 상영하는 것 이상의 축제가 되어야 한다. 80여편에 이르는 영화들을 상영하고, 창작자들을 초대해 영화에 대한 더 자세한 얘기를 나눔으로써 우리가 보여주는 것에 중요한 맥락을 제공하길 원한다”라고 덧붙였다. 그것이 그간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영화제의 방향이자 비결일 것이다. 그의 말대로 상영작 80여편은 홍콩뿐만 아니라 한국, 대만, 일본, 중국,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등 아시아 각국의 주목해야 할 작품들로 골고루 포진됐다. <82년생 김지영> <벌새> <우리집> 등 올해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은 한국영화들도 이번 영화제에 초청됐다. 아시아 각국의 사회 현실을 반영하고, 새로운 형식과 실험을 과감하게 시도하며, 열정이 넘치는 젊은 감독들의 작품이라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클라렌스 추이는 “홍콩아시안영화제는 거장들의 작품보다는 젊고 재능 있는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을 불러모으고 싶다. 지난 16년 동안 한국, 일본, 대만 등 아시아 여러 국가들과 관계를 쌓아온 역사도 있다”며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관객이 좋은 영화를 볼 수 있는 플랫폼(영화제)을 제공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말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번 영화제에선 5년 전의 우산혁명과 최근의 홍콩 시위 같은 정치·사회적 문제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은 듯한 젊은 홍콩 감독들이 만든 영화들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 머무는 나흘 동안 홍콩영화들을 우선적으로 챙긴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야향·원앙·심수보>

일단, 케이트 레일리와 밍카이릉, 두 커플이 공동 연출한 <야향·원앙·심수보>는 이주, 음식, 페미니즘 등 현재 홍콩의 주요 이슈를 그린 단편 4편을 모은 옴니버스영화다. 첫 번째 에피소드는 수십년 전 중국에서 이주해온 할머니와 그녀의 집에서 일하는 인도네시아 가정부, 두 이민자가 홍콩 북서부에 위치한 웬룽에서 홍콩섬 센트럴까지 오가는 여정을 따뜻하게 그려내는 이야기다. 과거에는 중국 본토 사람들이, 최근에는 동남아시아 사람들이 홍콩으로 건너오는 사회문제를 딱딱하지 않게 담아낸 휴먼드라마다. 두 번째 에피소드는 두 형제가 어머니가 샴수이포에서 운영하는 장난감 가게에 마지막으로 들러 과거를 추억하는 드라마다. 잊혀져가는 과거를 떠올리는 형제의 모습은 애틋하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게 본 세 번째 에피소드는 같은 학교에서 일하는 선생님인 홍콩 남자와 미국 여자가 맛집들을 돌아다니며 점점 가까워지는 로맨틱 코미디다. 딤섬, 치킨, 밀크티 등 홍콩 음식들이 차례로 등장하는 ‘먹방’은 남녀 관계의 중요한 연결고리이자 눈과 귀를 자극하며 식욕을 돋우는 장치이다. 마지막 에피소드는 12월 홍콩 선거를 앞둔 젊은 여성 정치인의 삶을 그린 다큐멘터리로, 샴수이포의 미래를 위해 싸우는 여성의 고민과 현실을 생생하게 그려낸다.

<대나무로 엮은 경극장>

<야향·원앙·심수보>가 홍콩의 사회적 이슈를 요약한 이야기라면 <대나무로 엮은 경극장>(감독 척청)은 사라져가는 홍콩의 전통문화를 기록한 독특한 다큐멘터리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이 영화는 대나무로 엮어올린 가설 경극장을 소재로 한 이야기다. 이 경극장은 수백년 동안 이어온 홍콩 전통 공연과 건축양식으로, 영화는 대나무 경극장을 짓는 사람들과 경극장이 만들어지는 과정 그리고 그곳에서 경극을 올리는 사람들을 세세히 담아낸다. 사람들이 산과 바다에서 대나무를 쌓아올려 경극장을 만드는 모습은 감탄사가 절로 나올 만큼 경이롭다. 이 과정을 인터뷰 하나 없이 이미지와 사운드만으로 보여주면서 삶, 영혼, 인생, 경극이 무엇인지 질문을 던진다.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사라져가는 전통을 기억하고 기록해야 하는 이유이다.

<3CM>(감독 웡시우퐁)은 결절성 경화증(TSC)을 앓는 어린 환자 이우이우의 사연을 통해 홍콩 의료 시스템의 구멍을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다. TSC는 뇌, 눈, 심장, 신장 같은 기관에 양성종양이 나타나는 신경계 장애로 희귀 난치성질환이다. 약값이 비싼 탓에 환자들은 정부로부터 약값 지원을 받길 원하지만 홍콩 정부의 의료지원 정책은 더디고 충분하지 못한 현실이다. 환자들과 그의 가족들은 “홍콩 정부가 매년 400만달러의 의료지원 예산을 편성하면 TSC 환자들이 비싼 약을 저렴한 가격으로 구입할 수 있다”라고 외치지만 이들이 만족할 만한 지원 정책은 요원할 뿐이다. 영화는 환자와 그를 간호하는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을 따라가며 희귀 난치성질환을 앓는 환자들에게 홍콩 자본주의사회가 얼마나 높은 벽인지 알린다. 동시에 홍콩 사회의 깊은 관심과 정부의 발빠른 의료지원 정책을 촉구한다.

<일렁이는 도시>

<일렁이는 도시>(감독 보왕, 판루)는 국제도시 홍콩이 가지고 있는 풍경과 이미지를 보여주며 도시의 역사와 변화해온 과정을 되짚어가는 흥미로운 다큐멘터리다. 과거 인도네시아 난민들이 보트를 타고 홍콩으로 이주해온 빅토리아 항구는 현재 수많은 컨테이너가 오가는 무역 기지 역할을 한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센트럴 미드레벨은 현재 경제와 금융의 중심지가 됐다. 인구밀도가 높은데도 해마다 집값이 가파르게 상승하는 이상한 도시이기도 하다. 이미지와 내레이션만으로 도시의 과거와 현재를 대비시키면서 현재 홍콩이 어떤 도시인지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또 실화를 재구성한 홍콩영화 <라이언 락>(감독 닉릉)은 오토바이 사고로 걸을 수 없게된 남자가 휠체어를 탄 채 암벽등반에 도전하는 이야기로, 감동적인 휴먼드라마다. 홍콩영화는 아니지만 캄보디아 출신인 비살 감독이 연출한 <겜스 온 더 런>은 경찰과 보석 강도로 만난 어린 시절의 두 친구가 의도치 않은 여정에 나서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만듦새는 다소 투박하지만 캄보디아 장르영화의 가능성과 현재를 확인할 수 있다.

다만 홍콩에 머무는 동안 상영되지 않은 <프린스 에드워드역에서: 내 오랜 남자친구에게>(감독 노리스 웡, 이-람)를 보지 못한 것은 매우 아쉽다. 결혼을 앞둔 홍콩 사람들이 주로 찾는 프린스 에드워드역 근처에 위치한 쇼핑몰 골든 플라자를 배경으로, 30대 중반의 퐁과 그의 오랜 연인이자 웨딩 사진작가인 에드워드가 결혼식을 준비하는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TV드라마 작가인 노리스 웡의 첫 장편 연출작으로, 금마장영화제에서 주목받아 화제가 된 작품이다. 곧 열리는 서울독립영화제 특별전 ‘반환 이후의 이미지들: 1997년 이후의 홍콩 독립영화’에서 국내 첫 공개되니 챙겨보면 좋겠다. 이 밖에도 이번 영화제에 초청된 홍콩의 젊은 감독들이 관객과 그들의 고민을 나눈 홍콩 시네마 포럼, 이란 감독 모함마드 라술로프 특별전, 캄보디아영화의 현재를 확인할 수 있는 ‘메콩 블루스: 캄보디아 시네마’ 등 다양한 프로그램도 열렸다.

젊은 영화인들의 눈은 미래를 보고 있다

영화제가 열리는 내내 젊은 영화인들과 관객은 늦은 밤까지 브로드웨이 시네마테크로 몰려들었다. 이들은 아시아 각국에서 온 영화들을 함께 보며 토론할 만큼 열정적이고 적극적이었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는 홍콩 시위 문제에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기성 영화인들과 사뭇 달랐다. “우리는 최근 이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잘 알고 있고, 이러한 상황들을 통해 많은 경험을 겪고 감정을 느끼고 있으며, 무엇보다 홍콩은 결코 혼자가 아니고 외로운 길을 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다”는 디디 우 프로그래머의 말대로 제16회 홍콩아시안영화제는 홍콩을 넘어 아시아 전역을 환하게 밝히는 등대라 할 만하다. 그것이 우리가 홍콩의 젊은 영화인들과 그들이 만든 영화 그리고 그들을 한데 모으고 있는 홍콩아시안영화제를 지지하고 연대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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