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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캣츠> 톰 후퍼 감독의 잘못된 선택에 관하여

예고된 재앙

1970, 80년대에 오페라영화를 만들려는 유행이 잠시 분 적 있었다. 잉마르 베리만, 조셉 로지, 프란체스코 로시, 프랑코 제피렐리와 같은 쟁쟁한 감독들이 이 유행에 참여했고 상당히 좋은 작품들을 냈다. 카라얀 역시 이 시도에 관심을 가졌고 직접 감독작을 내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소련에서는 이미 나와 있는 녹음 위에 새 배우들이 립싱크하는 방법으로 오페라영화를 만드는 시도가 있었다. 이는 논리적이었다. 오페라영화는 기본적으로 후시녹음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이 유행은 당시 기대만큼 오래가지는 못했다. 하나의 종합예술을 다른 종합예술로 전환하는 건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인기 있는 대부분의 오페라들은 20세기 이전 작품으로 무대에 종속되어 있다(“그렇다면 셰익스피어는?”이라고 묻지 마시길. 셰익스피어의 시공간은 <토스카>의 시공간보다 훨씬 융통성이 있다. 다시 말해 더 영화적이다). 오페라 가수의 연기를 영화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오페라 팬들에게도 좋아하는 가수의 립싱크 연기를 클로즈업으로 보는 건 좀 재미없는 경험이다. 결국 대부분의 오페라 팬들은 무대 공연 실황 녹화로 넘어갔다. 더 생생한 노래를 들을 수 있으며 무대 공연의 매력이 영화 장르 안에서 어색하게 위축되지도 않는다. 요새는 이들 상당수가 극장에서도 상영되고 있으니 시행착오를 통해 자연스럽게 최선의 길을 찾은 셈이다.

그렇다면 뮤지컬은 어떨까? 대부분의 위대한 뮤지컬영화, 그러니까 <싱잉 인 더 레인>이나 <스윙 타임> <밴드 웨건> 같은 작품들은 창작 뮤지컬이다. 이들 영화에서 음악과 춤은 비록 기성품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기획 단계부터 영화라는 매체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성스루 뮤지컬의 영화화, 그 태생적 한계

<사운드 오브 뮤직>이나 <마이 페어 레이디>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처럼 인기 있는 무대 뮤지컬이 영화로 만들어져 히트하고 아카데미상을 받는 경우도 많지만 이들은 대부분 녹화된 연극의 뻣뻣함을 갖고 있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의 관객이라면 그 찬란한 오프닝 이후 영화가 갑자기 사운드 스테이지 안에 갇히면서 느꼈던 갑갑함을 기억할 것이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이 영화를 굳이 다시 만들려 하는 것도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닐까. 그 원작이 오페라처럼 무대에 종속된 성스루(sung-through) 뮤지컬이라면? 곤란함은 배가된다. 처음부터 영화로 만들어진 <쉘부르의 우산>과 같은 작품을 예로 가져오면 안된다. 이 영화에서 미셸 르그랑의 노래는 영화음악이기도 해서 영화적 흐름에 어떤 방해도 안된다. 하지만 <에비타>는 어떤가? 아무리 앨런 파커가 융통성 있게 시공간을 쪼개려고 해도 앤드루 로이드 웨버의 노래는 기본적으로 무대에 속해 있고 고정된 무대에서 진짜 관객을 상대로 하고 있을 때 가장 빛이 난다.

<캣츠> 이야기를 해보자. 기획 단계부터 이 뮤지컬은 도전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T. S. 엘리엇의 시집 <주머니쥐 할 아버지가 들려주는 지혜로운 고양이 이야기>를 원작으로 삼은 이 뮤지컬은 분명한 스토리도, 주인공도 없다. 고양이 분장을 한 배우들의 춤과 노래로 작품 전체를 채워야 한다. 이 모든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캣츠>는 브로드웨이 최고 히트작 중 하나였다. <오페라의 유령>의 인기가 그러했듯, 이 작품에 대한 열광은 아마 80, 90년대라는 특정한 시절에 결박되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캣츠>는 여전히 어마어마한 성공작이며 그 성공은 무대 뮤지컬 장르에 대한 창작자들의 이해와 연결되어 있다. <캣츠>는 관객을 앞에 둔 무대 위에서 엄청나게 매력적일 수 있는 작품이었다.

이를 굳이 영화로 옮길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굳이 그래야 한다면? 스필버그는 1990년대에 이를 전통적인 2D애니메이션으로 만들려는 시도를 했다. 당시 기획을 위해 뤽 드마르슐리에가 그린 컨셉 아트가 지금도 인터넷에 돌아다닌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습으로 폐허가 된 런던을 떠도는 애니메이션 고양이들의 이미지는 지금 보아도, 아니 톰 후퍼의 영화가 나온 뒤에 보면 더 매혹적이다. 이 영화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건 앤드루 로이드 웨버와 트레버 넌이 무대에서 넘을 수 있었던 허들을 스필버그의 팀들은 넘지 못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인어공주>와 <미녀와 야수> 같은 작품이 나와 뮤지컬 애니메니션의 전성기가 열린 때였다. 하지만 스토리 없는 성스루 뮤지컬이라면 그건 전혀 다른 게임이다. 그리고 적어도 <캣츠>의 경우, 애니메이션 캐릭터들은 아무리 정교하게 그려져도 무대 뮤지컬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퍼포머의 존재를 따라가지 못한다. <캣츠>의 매력은 무대 위의 배우들이 진짜 고양이들이 아니라 이들의 아름다움과 우아함과 우스꽝스러움을 필사적으로 흉내내는, 벌거벗고 뻣뻣한 원숭이인 우리 동족이기에 발생하기 때문이다.

낯선 외계 종족이 돼버린 친근한 고양이들

톰 후퍼는 이를 살리기로 결정했다. 이 선택 자체는 별 문제가 없다. 문제는 후퍼가 연극 관객과는 달리 영화 관객은 고양이 분장을 하고 타이츠를 입은 사람들이 고양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 결과 배우들의 몸에 컴퓨터그래픽으로 털을 입힌다는 어마어마한 뻘짓이 벌어진다. 이건 예술적으로도 문제가 있지만 비즈니스 면에서도 형편없는 선택이었다.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들을 디지털로 처리하는 작업이다. 거의 픽사 애니메이션 수준이다. 그런데 영화사에서는 이 어마어마한 후반작업에 겨우 1년 정도밖에 시간을 주지 않았다. 이 영화의 CG는 결과물이 아주 나쁘지만 이 작업에 투입된 전문가들을 놀릴 생각은 들지 않는다. 이건 그들이 실력이 없어서가 아니다. 개봉날짜까지 갈아넣을 피와 살이 부족했을 뿐이다.

피와 살이 충분했어도 그림은 여전히 어색하게 보이긴 했을 것이다. <캣츠>는 인간과 고양이를 섞어 극도로 부자연스러운 외계 종족을 창조해놓고 이들이 우리가 아는 친근한 동물이라고 우긴다. 이미 존재하는 동물을 정교하게 모방하는 새 <혹성탈출> 시리즈나 완전히 낯선 외계인을 등장시킨 <아바타>와는 전혀 다를 수밖에 없다. ‘언캐니 밸리’라는 단어가 등장할 순간이다. 대안은 있었을까? 가장 정직한 방법은 원작을 그대로 옮기는 것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무대 공연을 담은 영화가 1998년에 나왔다. 이를 극복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이미 잉마르 베리만이 내놓았다. <마술피리>에서 베리만은 무대 공연의 뿌리를 기본 유지하면서 무대를 영화에 맞도록 자연스럽게 연장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캣츠>에도 적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원작의 매력을 담으면서도 고정된 무대의 한계를, 분장의 비현실성을 극복하려면 이게 최상의 선택이다. 이는 스토리 없는 성스루 뮤지컬의 한계를 극복하는 길이기도 하다. 관객이 무대에서 보는 것을 영화 관객에게도 보여주며 그 매력을 설득할 수 있으니까.

하지만 후퍼는 이를 택하지 않았다. 이들이 만든 영화는 <마술피리>와 같은 소품이 아니라 연말에 전세계 극장에 걸리는 텐트폴 영화여야 하기 때문에. 텐트폴 영화는 텐트폴 영화처럼 보여야 하고 그 모습은 베리만의 <마술피리>나 98년 실황녹화와는 다르게 보여야 한다. 그 결과가 심지어 톰 후퍼의 영화처럼 생긴 것이라도. 어처구니없는 논리이고 눈앞에 펼쳐진 재앙이 빤히 보이지만, 지금의 할리우드 생태계에서 다른 길을 걷는 것이 과연 가능하긴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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