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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희 감독, <씨네21>의 <경계도시2> 보도 관련 기고문 보내와
양영희(감독) 2020-01-17

영화인의 창작 윤리, 이대로 좋은가

양영희 감독의 <흔들리는 마음>

홍형숙 감독의 <본명선언>

지난 1월 15일 <씨네21> 편집부 앞으로 메일 한통이 왔다. <디어 평양>(2006), <굿바이, 평양>(2011), <가족의 나라>(2013)를 연출한 재일동포 양영희 감독이, <경계도시2>를 연출한 홍형숙 감독이 제작 당시 스탭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하지 않았고(<씨네21> 1238호 국내뉴스 ‘웰메이드 다큐멘터리의 민낯’), 스탭 인건비를 유용했다(<씨네21> 1239호 국내뉴스 ‘독립영화의 제작 관행?’)는 <씨네21>의 연속 보도를 보고 20년 전 있었던 자신의 일을 고백하고 싶다며 메일을 보내온 것이다. 1998년 당시 양영희 감독은 자신이 연출한 일본 <NHK>의 방송다큐멘터리 <흔들리는 마음>(1996)의 9분 40초의 장면을 홍형숙 감독의 다큐멘터리 <본명선언>이 무단으로 도용했다고 주장했고, 홍형숙 감독은 이를 부인하며 합의가 있었다고 주장해 논란을 빚었다. 양영희 감독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채 유야무야된 <흔들리는 마음>의 저작권 침해 논란이 <경계도시2> 인건비 체불 논란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해 이 글을 보내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씨네21>은 양영희 감독의 글이 창작자의 직업 윤리와 저작권에 대한 한국 사회의 불감증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느껴 이 글을 싣기로 결정했다. 또한 반론과 그 밖의 토론을 위한 지면도 열어두고 있음을 밝힌다. <경계도시2> 논란과 관련된 후속보도는 영화인신문고가 운영하는 중재위원회가 ‘<경계도시>의 저작인격권 침해 및 스탭인건비 미지급’ 건에 대한 중재 결과를 발표한 뒤 전할 예정이다.

저는 일본 도쿄에 사는 재일교포 영화감독 양영희입니다. <씨네21>에 두 번에 걸쳐 게재된 <경계도시2> 홍형숙 감독의 스탭 인건비 유용에 대한 기사를 읽은 뒤 너무 마음이 아프고 복잡하여 이렇게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현재 저는 신작 다큐멘터리 편집 때문에 한국에 체류하고 있는데, 작업에 집중하지 못할 정도로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경계도시2> 인건비 유용에 대한 <씨네21>의 기사들, 그리고 홍형숙 감독이 본인의 SNS에 게재한 해명의 글을 읽으며 90년대 당시 저와 홍형숙 감독 사이에 벌어졌던 저작권 침해 논란을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논란이 벌어졌던 1998년 이래,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제가 철저하게 반론을 이어가지 않았음을 반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건을 철저하게 따졌다면, <경계도시2> 인건비 유용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을지 자문하게 되었고 문제를 제기한 김명화 굿필름 대표와 스탭들에게 미안했습니다. 홍형숙 감독의 다큐 제작 과정에 대한 김명화 대표의 문제제기와 1998년 제가 홍형숙 감독에게 했던 문제제기가 무관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22년이 지난 지금, 저의 영화 <흔들리는 마음>과 홍형숙 감독의 영화 <본명선언> 사이에서 벌어진 저작권 침해 문제에 대해 공식적으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998년, 뉴욕에서 유학 중이던 저는 일본 <아사히신문> 기사를 통해 홍형숙 감독의 다큐멘터리 <본명선언>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 영화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한국다큐멘터리에 수여되는 운파상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영화의 제작사인 서울영상집단에 전화를 걸어 <본명선언>의 비디오테이프를 뉴욕으로 보내달라고 했습니다. 며칠 뒤 영화를 본 저는 충격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일본 <NHK>에서 방영된 저의 다큐멘터리 <흔들리는 마음> 중 9분 40초의 영상이 그대로 <본명선언>에 사용됐기 때문입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분노를 억제하면서 저는 서울영상집단으로 전화를 걸었습니다. “여보세요, 양영희라고 합니다. 누군지 아시겠지요? 홍형숙씨 있어요? 없다면 전해주세요. 양영희가 아주 화가 나 있다고! 이 한마디만 전하면 무슨 얘기인지 아실 거예요. 그리고 하나 물어보고 싶은데, 당신들은 집단으로 작업하는 분들이죠? <본명선언> 작업에 참여하셨다면, 제가 찍은 영화의 9분 40초을 그대로 쓴 것에 대해서 누구도, 아무 의견이 없었나요?” 이렇게 물어봤을 때 서울영상집단쪽에서는 답변이 없었습니다. 얼마 후 홍형숙 감독과의 전화가 이어졌습니다. 그의 첫마디는 “영희야 미안해. 바빠서 연락 못했어”였습니다. 저는 말을 이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 통화는 뉴욕의 아파트에서 저와 함께 지내던 한국인 친구들도 스피커폰으로 들었습니다. 변호사로 일하던 재미교포 친구는 홍형숙 감독에게 항의문서를 썼습니다.

당시의 저는 이 문제로 홍형숙 감독에게 소를 제기하거나 사과를 요구하려던 건 아니었습니다. 다만 <본명선언>에 포함된 저의 모습과 <흔들리는 마음>에서 도용한 9분 40초의 영상을 삭제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했습니다. 홍형숙씨는 절대 그럴 수 없다고 말하며 점점 강압적인 말로 팩스를 보내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재일한국인의 고통과 고민을 그려낸 <본명선언>에 대해 모욕하는 양영희는 자신이 재일교포들에게 큰 상처를 주고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또한 한국 독립영화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일에 가담하는 것이다”라고 팩스를 보내왔습니다. 창작자의 도덕적 윤리를 위반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기는커녕 과장된 언사로 협박하는 홍형숙 감독의 태도를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조선 국적’ 소유자로서 한국에 입국하지 못했던 제가 당시 할 수 있는 일이라곤(저는 2004년 한국 국적을 취득했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제 작품의 복사본을 뉴욕에서 우편으로 한국에 보내는 것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에 단 한명의 지인도 없었던 저는 몇몇 신문사, 잡지사 영화 담당 기자들의 성함을 찾고, 그분들이 두 작품을 비교해보면 문제가 있다고 느낄 거라는 생각에 <흔들리는 마음> 복사본을 보냈습니다. 동시에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 앞으로도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 편지에는 저의 문제제기로 인해 부산국제영화제에 혼란을 일으킨 부분에 대해 죄송하다고 말씀드리면서도 홍형숙 감독이 행한 일은 너무나도 노골적인 저작권 침해이니 <본명선언>과 <흔들리는 마음>의 동시 상영회를 열어주시길, 저를 한국에 초청해주시길 부탁드렸습니다. 당시 보도된 기사를 보면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회가 두 작품을 비교하는 시사회를 제안했고 서울영상집단이 이에 동의했음에도, 홍형숙 감독은 본인에게 회복하기 어려운 상처를 준 양영희가 먼저 공식적으로 사과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비교 시사회는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흔들리는 마음>과 <본명선언>에 삽입된 9분 40초의 영상은 똑같습니다. 홍형숙 감독은 이 영상을 사용하는 데 저와의 합의가 있었다고 주장합니다. <흔들리는 마음>의 러닝타임은 30분입니다. 상식적으로 본인 작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영상을, 편집의 변형 없이 그대로 다른 창작자가 써도 된다고 생각하는 연출자가 있을까요? 그것에 대해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한국의 평론가, 기자, 심사위원의 주장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고 저는 지금도 납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런 자각도 없이, 이 사안이 “뭐가 문제냐”라고 물으신다면, 이것은 창작자의 윤리의식에 대한 심각한 불감증이라고 할 것입니다.

과거의 일을 이제 와서 말하는 게 무슨 꿍꿍이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겁니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마음속 깊은 곳에 박힌 가시를 쉽게 도려내지 못하는 이유에 대해 몇년, 길게는 몇 십년 동안 계속 생각을 합니다. 시간이 지나고 인생 경험이 쌓이며 당시 몰랐던 문제의 본질도 찾게 되니 더욱 힘들어집니다. 김명화 대표가 홍형숙 감독에게 한 문제제기는 스스로가 그 고통에서 벗어나려는 몸부림이었을 테고, 낡은 관행을 개선하려는 그 대담한 행동에 저의 양심도 덩달아 반응하고 있습니다.

이에 저는 시간이 흘렀으나 유야무야 지나가버린 <흔들리는 마음>의 저작권 침해 문제를 깊이 성찰할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봅니다. 다시 한번, <본명선언>과 <흔들리는 마음>의 공개 시사회를 한국에서 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를 위해 <본명선언>을 상영했던 부산국제영화제에도 공식적으로 협력을 부탁드립니다. 그러한 기회가 생긴다면 저는 홍형숙 감독을 어떤 계기로 만났는지, 그에게 왜 <흔들리는 마음> 촬영소스를 주었는지 기타 등등에 대해 충분히 설명드릴 것입니다.

저는 이러한 문제제기가 다큐멘터리 제작에 대해, 영화인의 창작 윤리에 대해 함께 생각하는 기회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당연히 홍형숙 감독 자신이 입장을 밝혀야 합니다. 홍형숙 감독은 공개 시사회에 참석하여 한국에 올 수 있게 된 제 앞에서 당당하게 말씀해주십시오. 저도 성실히 저의 주장을 하겠습니다. 이 공개 시사회는 참석자들에게 있어 유익한 케이스 스터디가 될 거라고 믿습니다. 일어나지 말아야 할 사태의 경험자로서, 저는 앞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몫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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