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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한국영화 진단 연속 기획➌ - 혼돈의 소란 속에서 동시대 한국영화를 바라본다는 일은

폐허의 주변부를 맴돌며

3주에 걸친 2019년 한국영화 진단 연속 비평의 마지막은 김병규 평론가의 글이다. 한국영화 100주년에 대한 질문에서 출발하여 우리 시대의 시네마의 의미를 묻는 이 글은 ‘영화란 무엇인가’라는 오래된, 하지만 본질적인 질문을 재차 소환한다. 당장 눈앞의 현상을 진단하는 게 아니라 한국영화라는 정체성에 말을 거는 묵직한 시도다. 지난 3주간 여러 각도에서 시도된 이번 기획만으로 2019년 한국영화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모두 아우르기엔 턱없이 모자라겠지만 적어도 첫걸음은 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2020년의 시작과 함께 <씨네21>이 던진 이 질문의 씨앗들이 싹을 틔워, 부디 2020년의 끝자락에서 의미 있는 결과물을 수확할 수 있길 고대하며 마지막 글을 전한다.

영화 100주년을 기념해 만들어진 다큐멘터리 <프랑스영화의 2×50년>(1995)에서 장 뤽 고다르는 프랑스영화 100년 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은 미셸 피콜리를 만나 난데없는 질문을 던진다. “대체 무엇을 축하하자는 것이냐?”, “무슨 기준으로 100주년을 말하는 건가?” 영화(사)를 둘러싼 명확한 인식의 옆자리에 불확정적인 언명을 병치하곤 하는 고다르답게 이 질문은 단순하지만 중층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영화가 100년을 맞이했다고 말할 때 그건 정확히 ‘무엇’의 100주년인가? 그것은 정말 ‘100년’을 맞이한 것인가? 그 무엇의 100주년은 왜 축하받아야 하는가?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동반한 반문은 모두가 명확하게 알고 있다고 믿는 매체의 보편적 조건 저편에서 탐구되지 않은 채로 남겨진 가능성을 환기시킨다. 뤼미에르 형제의 장치와 그것의 상영 형태를 단일한 최초의 영화로 간주할 때, 우리가 ‘영화’로 부르기 시작한 대상은 영화가 품었던 다수의 조건 가운데 하나를 채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영화는 누락된 역사,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역사, 기억에서 잊혔거나 미완으로 남은 역사를 포괄하는 ‘실물보다 큰’ 서사이자 관념이다. 그 잠정적 가능성을 잊어선 안된다는 인식이 일차적으로 고다르의 문제제기에 담겨 있다.

한국영화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19년을 돌아보면서 고다르의 질문을 떠올린 건 명확하고 투명한 한해의 기념비적 사건들 뒤에 여전히 불분명한 채로 누락되거나 생략된 풍경이 잔존해 있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고다르가 제기한 반문의 구조를 따르자면, 극단 대표 김도산이 연쇄극의 용도로 연출한 <의리적 구토>(1919)에서 시작된 한국영화가 100주년에 이르렀다고 말하는 순간에, 이 짧은 표제적 문장을 이루고 있는 요소들, 즉 ‘한국’은, ‘영화’는, ‘100주년’은 확신할 수 있는 문제인가. 이는 명확하지 않다. 그리고 이 가시적인 역사는 한국영화가 100년을 통과하는 동안 지워진 적없는 유실과 사라짐, 금지와 삭제라는 또 다른 역사의 흔적과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 눈에 비치는 영화의 표면과 더불어 다른 반쪽(the other half)에 보이지 않는 이면이 공존하고 있음을 고려해야한다는 뜻이다. 이는 정확히 고다르가 F. W. 무르나우의 <선라이즈>(1927)를 보았던 경험을 두고 “부재의 빛”을 보았다고 말한 것과 같은 의미다. 우리는 하나의 빛을 보면서 다른 하나의 그림자를 누락하거나 상실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런 의문은 지금의 한국영화를 향해서도 유효하다. 물론 주요하다고 여겨지는 사태를 중심으로 2019년을 정리하는 건 어렵지 않다. <기생충>은 마침내 한국영화 최초로 황금종려상을 수상해 봉준호라는 작가의 이름을 널리 알렸고, 독립영화계에선 김보라의 <벌새>를 필두로 한 많은 여성감독들의 다양한 시도가 약진을 보였으며,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한국영화의 서사와 이미지가 나쁜 의미로 평준화되고 있다는 염려(와 이를 극복하려는 시도를 보인 몇몇 작품에 대한 열거)를 덧붙이는 진술은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비평적 제스처라고 말할 수 없는 범용한 조망에 지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거론되는 개별적인 사례와 작품들은 서로 격돌하거나 교통을 이루는 면모를 보이지 않은 채 제각기의 밀실에서 자족적인 찬사와 친목을 재생산할 뿐이다. 영화의 역사는 언제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한몸을 이루는, 다시 말해 가시적인 것의 이면을 품은 상태로 지속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9년 한국영화의 지형에서 그러한 질문은 정당하게 수용되고 있는가?

단일한 이상으로서의 시네마는 없다

황금종려상’, ‘독립/여성영화’, ‘천만 관객’과 같은 명료한 담론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거나 다른 소외된 것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다만 그것들을 우리가 탈각하고 빠트린 영화의 다른 역량들과 교통시키는 접속의 자리를 마련해야 할 의무는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의리적 구토>는 연극과 영화의 기묘한 동거, 일본영화와 조선영화를 결정짓는 국가적 정체성의 문제, 상징적 기원이라는 지위와 유실된 필름 사이에서 애매한 정체성을 산출하며 서로 다른 담론을 교차시키지 않았던가. 마틴 스코시즈가 동시대 영화에 관해 “한쪽에 세계적인 시청각 오락이 있고, 다른 곳에 시네마가 있다. 그것들은 이따금 겹치기도 하지만 그런 일은 드물어지고 있다. 상황은 이제 두 분야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라고 적은 데서, 우리는 그가 거론하는 시급한 논제가 시네마의 정의에 관한 개별적 진단이 아니라 더는 교통과 교환을 시도하지 않는 영화를 둘러싼 환경을 향해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시네마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더이상 그 자체로 유효하지 않다. 영화는 어느 때보다 파편적으로 조각나 있고, 단일한 이상으로서의 시네마는 존립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2019년에 마주한 한국영화들을 되돌아보는 하나의 방법으로 돌과 벽, 그리고 그것들이 남긴 잔해와 구멍의 형상을 떠올리게 된다. <기생충>에서 기택(송강호)의 가족은 폭우가 쏟아지는 한밤중에 박 사장(이선균)의 저택을 벗어나 역류한 물에 잠긴 반지하방으로 향한다. 아수라장이 된 집 안 한가운데서 기우(최우식)는 민혁에게 받은 산수경석이 스스로 떠오르는 것을 본다. 중력을 거스르는 부력의 힘은 무엇으로 작동한 걸까. 거기서 기우는 무엇을 보는 걸까. 그런 다음 그는 그 돌을 들고 “더 밑으로”, 부잣집 지하실의 어두운 구멍 아래로 내려간다. <마더>의 골목길의 어둠 속에서 여고생이 던지는 돌이 그러하듯, 지하실 어둠 저편에서 돌은 불가피한 파국의 형태로 되돌아온다. 혹은 김보라의 <벌새>에서 은희(박지후)는 영지 선생님(김새벽)을 만나고 난 뒤로 재개발구역의 잔해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 이듬해 성수대교 붕괴를 위태롭게 마주한다. 이옥섭의 <메기>에서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싱크홀이 도심 여기저기에 출현하며, 구멍을 메우고 주변의 잔해를 치우는 작업에 직업 없는 청년들이 동원된다. 사라지고 비어버린 장소와 대상, 그곳의 테두리를 맴도는 청(소)년들. 또는 다른 두편의 더블로, 이강현의 <얼굴들>에서 혜진(김새벽)과 주영은 행궁 외곽을 산책하면서 오래된 벽돌과 새로 지어진 벽돌이 맞물려 있는 건축물을 바라본다. 강상우의 <김군>에서 ‘넝마주이’라 불린 이들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카메라는 그들이 살고 있었던 다리 밑의 폐허를 주시한다. 또한 <얼굴들>과 <김군>에는 공통적으로 극장의 어둠 속에 앉은 인물들이 스크린에 떠오른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순간이 등장하기도 한다. 흔적으로 남은 무인의 벽을 보는 시선과 암흑 속에서 타인의 얼굴을 보는 시선은 어떻게 다른 효과를 만들어내는가. 질료의 흔들림과 부서짐, 빛과 어둠의 진동을 가로지르며 마침내 홍상수의 <강변호텔>,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의 뒷모습이 거의 평면처럼 주어진 백색의 풍경 위를 걷는 순간에 다다르게 된다. 이야기 내부의 상황을 형식적인 분석으로 전환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형상들이 지질학적 지형을 흔드는 폐허적 감각과 맞닿아 있음은 무시할 수 없다.

이들 이미지가 맺는 피상적 유사성을 재구성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보다 이런 이미지들은 오늘날의 한국영화에서 불규칙적으로 출현하는 형상과 몸짓의 선을 그어보도록 이끈다. 여기에는 보다 내밀한 중첩과 매개가 요구된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인 이미지의 교집을 통해 우리의 눈앞에 나타난 현전의 조건을 탐색하는 몸짓은, 조르주 디디 위베르만이 말한 것처럼 미세하지만 차이를 넘어 잔존하는 흔적을 들여다보는 기제다. 교차하는 영화들의 탈선적인 교감을 상상할 수 있는 방식이란 그러하다. 위에서 거론한 영화들의 표면에 감도는 돌과 벽, 잔해와 구멍은 기존의 영화가 가진 제도적 조건에서 이탈하거나 영화로 성립되기 직전에 이미지의 확언을 벗어나는 동시대의 사례들과 기묘하게 조응하며 유령처럼 그들을 불러들인다. 가령 폐허의 벽돌과 잔해는 김응수의 <나르시스의 죽음>에서 포지티브와 네거티브 이미지로 번갈아 제시되는 어느 군인의 석상, 안건형의 <한국인을 관두는 법>에서 느린 속도로 움직이는 프레임의 조작된 시간 위로 굳건히 멈춰선 한국의 ‘위인’들을 기리는 동상, 오민욱의 <해협>에서 동아시아의 역사와 얼굴을 품은 징후적 이미지로 조직되는 묘비와 불상의 질감과도 접점을 이룰 수 있을까? 혹은 암실의 어둠에서 스크린이라는 벽에 떠오른 타인의 얼굴을 응시하는 시각적 배치는 임철민의 <야광>에서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하는 한 관객의 얼굴과 그의 눈앞에서 영사되는 자연을 모사한 스크린 속 3D애니메이션의 재질, 정재훈의 <도돌이 언덕에 난기류>에서 인터미션이라는 매개적 장치로 영화를 보는 우리를 향해 펼쳐지는 온갖 이미지와 사운드의 왜곡으로 조합된 그래픽 이미지의 시청각적 감각과 공명하고 있을까? 또는 2019년의 영화는 2014년부터 5년 동안 작업을 지속해 아직 확실한 완결본을 마련하지 않은 임흥순, 모모세 아야의 <교환일기>와 동일한 시간적 지평에 놓여 있는가? 이런 배치는 불확실하기 그지없는 가상의 지형에 속한 것이지만 오직 가상의 지형에서만 우리는 동시대 영화의 이곳과 저곳을 교통시키고 조각난 형상들의 잠정적인 연결을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폐허가 남긴 구멍은 장면의 유사성이 아니라 내밀한 감각적 교감으로 완전히 다른 질서에 속하는 영상에 근접할 수 있다.

이는 과시적인 열거를 위해 영화들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시네필을 위한 목록이 아니다. 대신 서로 다른 범주의 영화들이 공유하는 기묘한 공명으로 불가능한 영화의 시공을 재구축하는 수동적인 몽타주의 제스처라고 말하고 싶다. 반복건대 벽과 돌, 잔해와 구멍의 형상들은 우리가 범주화하지 않은 다른 층위와 맥락의 영화들을 끌어들여 통상적인 범주 내부의 영화적 풍경과 나란히 배치를 이루게 한다. 그것은 2019년의 한국영화를 결산하는 타당한 방법은 아니지만 가능한 하나의 픽션적 대안으로 영화라는 통합성 없는 폐허의 주변부를 맴돌고 있다. 서로 가닿을 수 없는 영화들의 성좌에서 평등한 교직은 의심과 불안을 동반한 채로 반짝인다.

적잖은 시간 동안 한국영화가 위기에 직면했다는 진단이 되풀이되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한국영화는 위기라기보다 이미 폐허다. 그리고 한국영화가 위기에 닥쳤다는 진단(을 가장한 게으른 호들갑 혹은 헛된 예언놀음)이 본격적으로 나돌기 시작한 즈음부터, 동시대 한국영화의 유의미한 시도들이란 스스로 폐허가 된 장소의 가장자리를 맴돌고 있음을 통렬히 자각한 사례이거나 폐허의 쓰레기더미 속에서 무언가 기록하고 수집하고 재배열을 시도한 이들이 이뤄낸 성과라는 것도 분명한 일이다. 에리카 발섬이 지적한 대로 오늘날의 영화는 “해체 후 다시 조립되고 해부된 뒤 그 성취와 한계를 고찰해보아야 하는 장치”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니 동시대 영화의 좌표에 관한 진정한 고찰은 해체와 재조립을 선제하는 자리에서 오직 가능하다.

손쉽게 볼 수 있는 영화의 풍경과 그러한 풍경 이면에 새겨진 또 다른 영화의 역량이 이질적으로 분리된 채 각자의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공통적인 장(Scene) 위에서 격렬한 모순으로 충돌할 수 있을까. 확신할 수 없는 미래다. 다만 한 가지 말할 수 있는 건 균질하게 소화되지 않는 혼돈의 소란 속에서만이, 오늘날 한국영화의 좌표를 가늠하고 총체적인 비전으로 다음을 예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폐허의 감각은 양가적이다. 우리는 영화 속에서 공터의 잔해, 구멍 난 함몰점을 보며 중심적인 세계가 작동을 멈추고 소진에 다다랐다는 사태를 감지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서로 다른 영상들간의 간격을 두고 시공간적 불일치와 시대착오를 넘어선 비선형적인 연결을 모색하는 가능성의 형상이라는 것을 또한 확인한다. 그건 우리가 영화라고 부른 무언가에 부여된 순혈주의를 뛰어넘어 문란하고 혼종적인 계보의 흐름을 수용하고 이에 동참하는 작업이다.

한국영화의 100년, 10년, 1년

고다르는 영화에서 발생하는 몽타주의 역할에는 서로 다른 시공간에 놓인 사건들을 하나의 의미로 지정하는 역사적 역할이 존재함을 거론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영화의 역사에서 이런 의미의 몽타주는 아직 실현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영화가 내몰린 폐허의 외곽에서 취할 수 있는 태도는 향수에 젖은 추억을 되새기는 것도, 지나간 역사를 망각하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수축적인 만족감에 사로잡히는 것도 아닌, 아직 실현되지 않은, 그러나 언젠가 도래할 영화의 회고적 잠재성을 향해 몸을 던지는 것이다. 사라진 기억을 붙들어 역사에 대한 다시 쓰기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고정된 장소를 떠난 영화를 멀리서 응시하면서, 가능한 한 다른 방식의 연결과 결합을 시도하는 것. 즉 기존의 조건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영화를 지속시키는 방법에 대해 자문해보아야 한다.

<기생충>과 <벌새>로 상징되는 2019년의 기념비적 사건들이 한국화의 당대적 공기를 긴밀히 호출하며 특별한 전환을 가져온 측면을 부인할 순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한 긴밀한 시의성과 평행을 이루며 역사적 시대착오성, 시차의 감각, 차이와 간격에 관한 환기를 제공하는 영화 안팎의 시도들이 ‘한국영화’를 이루는 조각의 일부로 자리 잡아 당대적 흐름에 의혹과 긴장을 부여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는 다른 것들과 함께 촉발되었고, 그러므로 다른 어떤 것이 될 수도 있었으며, 언제든 다른 것으로 변형될 수 있다. 당도한 한국영화 100년의 자리를 되돌아보고 한해를 결산하는 일은 이런 전제를 통과한 뒤에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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