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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빛> 조민재 감독 - 영화가 던진 질문
김소미 사진 최성열 2020-01-27

해가 바뀐 첫달에 벌써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올해의 독립영화를 만났다고. 지난해 무주산골영화제 뉴비전상(대상)과 영화평론가상, 서울독립영화제 독불장군상을 수상한 <작은 빛> 이야기다. 조민재 감독의 자전적 요소를 반영한 영화는, 한 남자를 둘러싼 남루한 삶의 표면을 뚫고 들어가 그 안에 저마다의 오롯한 빛과 생명력이 있으리라고 나지막이 읊조린다. 기술공인 주인공 진무(곽진무)는 뇌수술을 앞두고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는 판정을 받는다. 남자는 그길로 캠코더를 들고 가족들을 찾아다닌다. 가족의 얼굴과 생활공간이 기록되고, 한때의 꿈과 추억이 구술되는 과정에서 이들 가족을 내내 괴롭히는 것은 죽은 아버지의 자취다. 끈끈히 대물림되는 가난과 가정폭력의 진실을 마주하는 동안, 놀랍게도 진무의 카메라는 고통에 질식한 기억을 소생시키고, 가족을 연결하고, 진무 자신이 삶과 화해하도록 이끈다. 카메라의 윤리와 자전성, 배우의 연기에 이르기까지 홀로 치열하게 공부하고 고민하며 데뷔작 <작은 빛>을 만든 조민재 감독을 만났다.

-서울독립영화제 독불장군상 수상 당시 직업이 있는 노동하는 감독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야기했다.

=건설 토목쪽에서 일을 한다. 겨울에는 일이 적은 편이라 시나리오 쓰는 데 집중하고 다른 촬영 현장 구경도 가고 그런다. 이전엔 기술공으로 7년 정도 직장 생활을 했다. 어느새 삶에 취미나 여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글도 쓰고 춤도 춰보고 영화를 열심히 보기 시작했다. 영화 보기는 비교적 접근성이 쉬운 일이었다. 많이 보고 많이 좋아하게 되니까 자연스럽게 직접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고 한달에 두어편씩 짧은 영상을 만들었다. 그러다 휴식기가 절실하다고 생각되던 시기에 1년 정도 일을 관두고 회사 퇴직금을 털어서 <작은 빛>을 만들었다.

-진무라는 남자가 캠코더 촬영을 통해 가족들의 면면을 되새긴다. 가정폭력을 저질렀던 아버지와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마주하고 자신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시나리오는 어떻게 쓰게 됐나.

=회사를 그만두고 2016년 1월에 고향인 제주도로 내려갔다. 8년 만에 아버지의 산소에 갔다가 아버지에 관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땐 시나리오 형태가 아니었다.

-<작은 빛>은 소설에 가까운 트리트먼트로 시작됐다고 안다.

=소설가가 꿈이었다. 옛날에 신경숙 작가의 소설 <외딴방>에 관한 기사를 보고 크게 위로를 받았다. 나는 16살부터 공장 노동을 시작했기 때문에 평생 이렇게만 살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기사를 보고 나도 다른 것을 해볼 수도 있겠구나, 내 삶도 달라질 수 있겠구나 어렴풋이 직감할 수 있었다. 신경숙 작가 소설의 흙냄새, 그 질감이 좋다. 소설을 쓰겠다고 직장을 한달 정도 관두고 고시원에 들어간 적 있었는데, 방에 갇혀 라면만 먹으니 우울감이 심해져서 다시 직장으로 돌아갔다. 사람과 부대끼는 걸 좋아하는 성향이 아닌데, 영화 작업만큼은 여러 사람이 모여서 공동의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서 좋은 에너지를 받는다. 기본적으로 고립감이 덜한 일이다.

-투자도 지원금도 없이 퇴직금만 갖고 어떻게 장편영화를 완성할 수 있었을까. 불안은 어떻게 견뎠나.

=제작비 2천만원에 12회차로 찍었다. 처음엔 ‘완성만 하자’가 목표였다. 나 스스로에 대한 신뢰가 없었고, 아마 배우들도 내게 기대가 없었을 거다. 영화를 완성한 후에 이런저런 영화제에 출품해도 자꾸만 떨어지기에 아직 내가 부족하구나, 하고 영화를 정리하려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영화를 무료로 상영해주는 프로그램이 있어서 배우와 스탭들이 모여 다 같이 상영했는데, 그 자리에 배급사 시네마달 대표님이 와서 출품부터 개봉까지 하게 됐다.

-주인공 진무의 캐릭터와 가족관계, 등장하는 생활공간 등에서 자전적 요소를 숨기지 않았다. 어떤 형태든 영화를 통해 나를 드러낸다는 것은 상당히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B급영화에 한창 열광할 때가 있었다. ‘내가 좋아하는 감독들이 그런 영화를 좋아하니까 나도 좋아해야지’ 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찾아가며 영화를 흡수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되게 외로워지더라. 그들 영화의 세계관이 실제 내 삶과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거다. 나는 영화를 사랑하는데, 정작 영화와 나의 거리는 너무 먼 느낌이랄까. ‘나같은 삶은 영화에서 재현될 수 없는 걸까?’라고 생각하며 만약 내가 영화를 찍는다면 나와 가장 밀접한 곳에 있는 것들로 영화를 채워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야기가 작거나 비루할지라도 내 곁에 있는 것들을 최대한 단단하게 담아내는 노력을 하고 싶었다. <작은 빛>은 영화의 내용 자체가 내 삶의 질문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만드는 과정에서 스스로 딜레마 속에서 고민을 거듭해야했다. 이전에 짧은 영상 작업도 여러 번 해봤고 시나리오도 많이 썼지만 이야기의 재미를 중시했기 때문에 나 스스로를 질문하게 만드는 작품은 없었다. 그래서 영화화하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작은 빛>은 내게 끝까지 질문을 던졌다.

-카메라로 가족을 찍으면서 진무가 스스로의 시선을 만들고 기억을 소생시킨다. 홈비디오 화면의 삽입을 통해 영화 형식으로서는 어떤 작용을 이끌어내고 싶었나.

=<작은 빛>을 만드는 나의 태도와 고민이 어떻게 영화적 형식과 같이 묶일 수 있을까를 많이 고민했다. 단순히 내가 살아온 역사를 다시 한번 재생산하는 건 큰 의미가 없어 보였다. 자전성이란 무엇일까 질문하는 과정이었다. 작품이 하나의 거대한 플래시백이 되어선 안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 들뢰즈의 책에서 부동적인 단면들이 운동성을 갖게 되는 영화의 원리에 관한 글을 접하고 영향을 받았다. 고여 있는 기억의 공간들이 캠코더를 통해 재현되면서 다시 운동성을 갖게 되는 그런 작용이 일어나길 바랐다. 사실 초고 때는 반대였다. 영화의 카메라가 적극적으로 움직이고, 중간중간 스틸 이미지들이 삽입되는 설정이었다. 진모도 사진사였고. 이 버전은 진모가 가족구성원의 사진을 오려서 한데 모이게 합성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오늘날 미디어가 행하는 폭력적인 부분을 건드릴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영화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취재차 캠코더를 들고 나의 가족을 만나고 다녔는데, 이 과정에서 나 스스로 들뢰즈가 말한 운동성을 체감했고, 뭐랄까 캠코더 이미지에서 어떤 파동이 느껴졌다. 그래서 사진 설정을 폐기하고 캠코더로 갔다.

-<작은 빛>을 완성한 지 3년이 훌쩍 지났다. 직장 생활과 영화 만들기는 어떻게 배분하고 있나.

=<작은 빛> 이후 이제 영화 할 거냐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그동안 영화하려고 일한 것 아니냐면서. 하지만 그건 내 삶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내 삶도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는데, 세상은 영화 만들기를 더 대단한 것으로 본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물론 나도 내가 좋아하는 액션영화, CG가 잔뜩 들어간 SF영화처럼 재밌는 영화도 찍어보고 싶다. (웃음) 하지만 작품 활동 그 자체만을 위해 헐거운 상태로 임하긴 싫다. 지금의 생활을 다지면서, 진짜 찍고 싶은 게 있다면 내 힘으로 돌파해야 할 것 같다. 당장은 영화의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노동영화를 만들어보고 싶은데, 아무래도 지원사업에 선정되기는 쉽지 않은 내용임을 지난해 동안 체감했다. 무력하게 계속 기다리는 것은 나와 맞지 않는 것 같고 워킹홀리데이를 준비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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