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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의 부장들] 자멸한 범죄자의 리그

첫 군부독재가 막을 내리던 시간이 시월의 마지막을 향하던 때였음을 새삼 깨닫는다. 나무들은 누런 색깔로 변했다. 세상도 온통 늦가을의 황색- 생명력이 없는 메마른 색깔의 옷을 입고 있었다. 네명의 남자들이 활동하는 곳은 아예 지하의 공간처럼 보인다. 창이 없어 빛이 스쳐 지나간 흔적 정도만 느껴지고, 꽉 틀어막히고 억압된 공기는 바람의 흐름마저 통제한 듯하다. 아마도 거기는 무덤 아래이거나 거대한 관 내부의 방일 것이다. 푸석한 얼굴에 소리를 지르는 박통(이성민), 김규평(이병헌), 박용각(곽도원), 곽상천(이희준)은 자기들이 이미 죽었음을 알지 못한다. 중심에 선 박통은 <노스페라투>(1922)의 주인공을 빼닮았다. 주변의 피를 뽑아먹고 사는 존재이니 올록이라 해도 이상하지 않다. <남산의 부장들>은 유령들이 드글대는 영화다(그런데, 유령의 피를 뽑아먹는 게 가능한 일일까?). 그게 <남산의 부장들>의 인상이다.

현실을 누아르로 만든 네 남자

우민호의 영화에는 악당이 나온다. <마약왕>의 이두삼은 확실한 범죄자다. 욕심이 남달랐던 그는 범죄를 저지르면서 자기 삶을 나락으로 떨어트린다. <남산의 부장들>의 네 남자는 겉보기에 이두삼만큼 선명한 범죄자는 아니다. 네 남자는 양복을 입고 공적인 위치에 놓인 사람으로 행세하며, 영화는 그들이 물밑으로 조성했을 더러운 짓거리를 상세하게 보여주지 않는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드러내는 범죄자의 속성들을 목격하게 된다. 범죄자는 보통 사람이 누리는 일상의 상태에 머무르지 못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들은 절박한 상태에 놓인다.

물질의 욕망으로 이두삼이 계속 범죄를 저지른다면, 박통과 세 남자는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정상성의 선 너머로 내달린다. 다음 두 가지 조건 중에 하나만 풀려도 문제 될 것은 없다. 범죄가 술술 풀리거나 욕망을 멈추거나. 그게 안되기에 누아르란 장르가 만들어지는 것인데, <남산의 부장들>은 현실을 누아르로 만들어버린 네 남자의 이야기다. 혁명한답시고 총을 들었던 그들이 입을 쩍 벌리고 웃던 시절이 있었다. 흑백으로 처리된 느린 장면에서 그들은 잔을 높이 들며 승리를 구가한다. 18년의 시간은 총으로 얻은 권력을 시커멓게 부패시킨다. 영원한 권력을 탐하는 박통은 그것을 막으려는 세력이 두려워 불안에 빠진다. 박통의 미움을 산 박용각은 살길을 찾아 헤맨다. 박통의 애정이 식었음을 알아차린 김규평은 마지막 끈을 놓지 않으려 몸부림친다. 박용각과 김규평이 차지했던 자리를 꿈꾸는 곽상천은 바닥에 엎드린다. 기능적으로 잘 돌아가지 않을 때 범죄는 예고된 운명을 펼쳐놓는다. 범죄는, 그게 어려워서 실패하는 게 아니며, 그건 범죄자의 기술이 달려서도 아니다. 범죄의 바퀴가 기능적으로 어긋날 때 범죄는 실패한다. 박통과 남자들은 총을 당길 때 냉혹하면서도 운명을 믿는 감상주의자들이다. 절박한 상태에 놓인 그들은 문제를 절망적으로 해결하려다 더 깊은 수렁에 빠진다.

범죄자가 쌓은 위대한 배신의 업적

범죄자들이 보이는 또 하나의 특성은 리그의 형성이다. 작은 범죄야 하나로 족하겠으나 나라를 잡아먹는 정도의 범죄라면 다르다. <남산의 부장들>은 리그 내부의 다툼에 관한 영화다. 대장을 중심으로 친구 혹은 동업자라 믿은 사람과 맺은 믿음의 리그는, 바로 그 믿음으로 인해 깨지고 만다. 범죄자의 리그는 항상 배신으로 분열된다. 범죄자의 타고난 속성 때문인지 삶의 우연 탓인지 알 수 없으나 범죄의 한 끝에는 배신이 자리한다. 박통을 배신한 박용각은 데보라심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친구인 박용각을 버렸던 김규평은 박통을 배신하기로 결심하는데, 사실 배신의 문을 열어젖힌 건 박통 자신이다. 범죄자와 배신을 영화의 주제로 삼았던 대표적인 인물은 장 피에르 멜빌이다. 초기를 지나 그가 만들었던 영화에는 어김없이 범죄자가 등장하고, 그들은 매번 배신의 순간과 마주한다. 배신의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도 그들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은 밀고자다.

<두 번째 숨결>(1966)의 귀스타브가 죽음을 알면서도 탈출해 적 앞에 나서는 이유는 하나다. 억울하게 밀고자로 사느니 차라리 진실을 밝히고 죽는 게 낫다고 그는 생각한다. 보통 사람의 눈에 그의 행동은 어리석을 따름이지만, 다시 말하거니와 범죄자의 행동은 정상적인 것과 반대로 자기파괴적일 경우가 많다. 멜빌의 영화에서 밀고자, 배신자는 언제나 중절모를 쓰고 나오는데, 김규평이 중절모를 쓰고 나오는 것도 그런 연유일 것이다. 그렇다면 멜빌의 영화에 나오는 배신자와 김규평은 동일한 인물인가. 멜빌의 영화에서 배신과 밀고는 도덕적인 개념이다. 물론 여기서 도덕이라는 말은 일반적이라기보다 범죄자의 도덕이라는 한정적인 개념이다. 멜빌 또한 자기영화에 나오는 범죄자의 도덕관념을 옹호하지 않는다고 밝힌 바 있다. 굳이 말하자면 한국 깡패영화의 의리 같은 것인데, 우민호가 앞서 만든 영화- <내부자들> <마약왕>의 인물들에게 더 어울릴 성싶다. <남산의 부장들>은 김규평이 벌인 배신의 행위를 도덕관념 아래 평가하지 않는다. 멜빌은 ‘인간은 태어날 때 하나의 권리를 부여받는데, 그건 자기 죽음을 선택할 권리다. 하지만 삶에 지쳐 죽음을 선택한다면, 그의 존재는 의미를 상실한다’라고 썼다. 김규평(과 박용각)은 자기가 벌인 행위의 실패가 죽음으로 이어질 것을 모르지 않았다. 그는 죽음의 불꽃에 부나방처럼 뛰어든 것일까, 위대한 배신의 업적을 쌓은 것일까.

저열하고 추잡해진 헤드 게임

범죄자가 지닌 배신의 코드를 멜빌로부터 빌려온 <남산의 부장들>은 김규평의 심리를 푸는 과정에서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드라마로 눈길을 돌린다. <남산의 부장들>의 연극적인 스타일과 더불어, 파스빈더가 특히 ‘독일 삼부작’에서 보여준 현대 독일의 터부와 공포를 다루는 태도는 우민호가 근작들에서 줄곧 추구했던 방향과 일치한다. 파스빈더에게 사랑하는 사람끼리의 권력관계는 신경질적이다. 박통이 휘하의 인간들을 부리다 종말을 맞는 과정은 (독일 삼부작은 아니지만) <페트라 폰 칸트의 쓰디쓴 눈물>(1972)의 변주처럼 보인다. <남산의 부장들>은 연인들의 헤드 게임에 관한 영화다. 박통 주변의 남자들은 그의 사랑을 차지하기 위해 피 터지게 싸워야 한다. 변덕이 죽 끓듯 한 박통은 주변의 남자들이 늘어선 줄을 이렇게 세웠다 저렇게 바꾸기를 반복한다. 그게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으면 좋겠으나, 이건 범죄자들의 머리싸움이므로 공평과는 거리가 멀다. 게임의 중심에 선 자는 저열하고 추잡한 방식을 취한다. 예를 들어, 중요한 자리에 마음에 드는 사람만 부르고, 얄미운 사람에게는 냉정한 얼굴로 대하는 방식. 흡사 조롱이 어디까지 부추길지 시험하는 태도. 어른들의 세계에서 아이들처럼 굴기에 게임은 점점 더 추악해진다. 게임의 주도자는 매일 게임을 변형하느라 골머리를 앓고, 게임을 치러야 하는 자들은 속 좁은 티를 낼 수 없기에 머리가 터지고 정신이 분열될 지경이다. 웃음은 가시고, 긴 우울의 시간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하실의 유령들이 알고 보니 정신질환에 걸렸던 거다. 유령이 지배했다고 해도 놀랄 일인데 정신이 나간 유령이 호령하는 나라였다니. 정신병이 내게 옮겼던 것일까, 당시 지배자의 죽음 앞에서 나는 울음을 흘렸다. 구름처럼 내 머리 위를 맴돌던 질병의 시간에서 치유되려면 긴 터널을 통과해야 했다. 유령들을 깨워 다시 그 터널의 입구로 끌고 간 것만으로도 <남산의 부장들>은 유의미한 영화다. 멜빌과 파스빈더는 공히 본성이란 결코 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들은, 아침에 악마면 저녁에도 악마라고 믿었다. 오월의 범죄자들은 18번째 시월과 함께 세상을 떠났다. 거짓 혁명으로 총을 들었던 그들은 끝내 총질의 본성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죽음과 거짓말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던 박용각은 미국 하원에 나가 한국의 ‘민주와 자유’를 언급하고, 그 말은 그대로 김규평의 입으로 옮겨온다. 독재에 매달리는 치들이 자유와 민주를 입에 올리면 의심해야 한다, 죽음 직전의 거짓이기 때문이다. 1979년 10월의 어느 날 밤을 어슴푸레한 악몽으로 더듬던 나는 유령과 함께 걷기를 관두기로 했다. 나는 이제 그들을, 자멸한 범죄자의 리그로 기억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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