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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영화] 김일란 감독의 <레이스 짜는 여인>
김일란 2020-03-18

La DentelliÈre, 삶과 생에 대한 존중

감독 클로드 고레타 / 출연 이자벨 위페르, 이브 베네이통 / 제작연도 1976년

여성/감독으로서의 나의 정서를 지배한 두편의 영화가 있다. 한편은 말할 기회가 종종 있었는데, 바로 <낮은 목소리>다. 내 인생 최고의 영화로 망설인 적이 없다. 무언가를 선택하는 것을 꽤나 힘겨워하는 내가 이렇듯 분명하게 답할 정도로 <낮은 목소리>는 강렬했다. 1995년, <낮은 목소리>를 극장에서 처음 보았다. <낮은 목소리>는 다큐멘터리가 현실과 어떻게 만나야 하는지를 보여준 가장 생생한 예시였고, 강덕경님부터 변영주 감독님에 이르기까지, 영화를 매개로 만났던 다양한 여성들의 얼굴은 페미니즘의 영화적 실천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 가장 친절한 안내자였다. <낮은 목소리>는 그저 한편의 영화가 아니라 내 삶의 정서와 감독으로서의 태도를 만든 하나의 세계다. 내가 페미니스트로서 <낮은 목소리>가 구현하는 세계로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여성으로서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갖도록 이끈 영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레이스 짜는 여인>이다.

1986년, 우연히 TV에서 봤다. 영화를 보는 내내 여자주인공의 불안한 표정 때문에 덩달아 긴장이 되었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서툴지만 자신의 일을 좋아하고 긍정적인 성격을 지닌 미용 보조사이자 노동자계급여성인 베아트리스는 전도유망한 대학생이자 부르주아계급 남성인 프랑소와(이브 베네이통)를 만나 서로의 계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호감을 느끼며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프랑소와와 그의 친구들이 벌이는 현학적인 토론에서 소외되었고, 그의 가족과의 만남은 서로의 계급 차이만 확인할 뿐이었다. 결국 두 사람은 계급과 문화 차이를 극복하지 못한 채 비극적인 이별을 한다. 조용하고 우울하고 절망적인 영화였다. <인디아나 존스>와 <영웅본색> 그리고 <터미네이터>에 빠져 있던 내가 좋아할 만한 영화가 아니었다. 그런데 거의 한달 동안 친구들에게 이 영화에 대한 이야기만 했다. 영화 속 불안한 여자주인공의 표정이 자꾸 떠올라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 배우의 이름을 알고 싶었는데,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20대 후반에서야 우연히 그 이름을 알게 되었는데, 바로 이자벨 위페르였다.

내가 오래도록 기억하고 있는 두 장면이 있다. 첫 번째는 미용을 하찮은 일로 취급하며 무시하는 프랑소와에게 전혀 반박하지 못하는, 침울하고 무력한 베아트리스의 얼굴이다. 그 표정의 의미를 정확하게 해석하지는 못했다. 하지만 나는 베아트리스의 얼굴에서 불평등한 사회에서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없는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답답한지를 직감적으로 느꼈고, 자원이 없는 여성의 삶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도 느꼈던 것 같다. 또한 연애도 권력과 위계가 작동하는 관계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던 듯하다. 아마도 베아트리스의 표정을 통해 ‘여성’으로서의 삶을 처음으로 각성했던 모양이다. 두 번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으로, 프랑소와와 헤어진 후 무기력과 우울증에 빠진 베아트리스가 요양병원에서 뜨개질을 하면서 슬픔을 견디는 장면이다. 뜨개질을 하는 그녀가 좀 어이없었다. 겨우 뜨개질이라니. 지겹도록 평범한 모습에 살짝 짜증이 났다. 그런데 뜨개질을 하던 베아트리스가 조용히 카메라를 응시하며 카메라 뒤에 있는 나를 보았다. 그리고 내레이션이 나왔다. 나는 내레이션에 크게 당황했다. 그것은 삶과 생에 대한 존중이었다. 당시의 나로서는 이 역시 말로 설명할 수 없었지만,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고, 타인을 대하는 태도 중 하나가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내를 가지고 질문을 할 필요가 있는, 또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당신이 알아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김일란 다큐멘터리 감독. 용산참사에 관한 다큐멘터리 <두 개의 문>(2011), <공동정범>(2017) 등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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