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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트하우스>를 통해 살펴보는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작품 세계
조현나 2020-03-27

진실과 거짓, 현실과 환상 사이

“<라이트하우스>는 로버트 에거스가 완벽한 기술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한다.” <버라이어티>의 평이다. 그 밖에도 <라이트하우스>는 “세계적인 찬사를 받아야 할 작품”, “매혹적인 이야기”라는 세간의 평을 들으며 화제를 모았고, 지난해 칸국제영화제에서 국제영화비평가연맹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영국 영화전문지 <사이트 앤드 사운드> 3월호에 객원 편집자로 참여한 봉준호 감독은 앞으로 주목해야 할 신진 감독 20명의 리스트를 꼽으며 로버트 에거스의 이름을 언급하기도 했다. <더 위치>(2015)로 선댄스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단숨에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이름이 된 미국 감독 로버트 에거스는 누구이며, 그의 두 번째 장편영화 <라이트하우스>는 어떤 작품인가. 국내에서는 극장개봉 없이 VOD로 직행했으며, 지난 3월 13일 블루레이가 출시된 이 작품이 왜 이토록 화제인지 영화가 비추는 불빛을 따라가보았다.

“충분히 이상하고 매력적이지 않나요?” 로버트 에거스 감독이 배우 로버트 패틴슨에게 시나리오를 보내며 한 말이다. 이후에 가진 미팅에서 패틴슨은 술에 취해 “나는 악마다!”라고 연거푸 소리 지르는 한 남자의 영상을 보여주며 “이게 당신이 하려는 영화죠, 안 그런가요?”라고 물었고, 그 순간 감독은 그가 영화의 방향성을 제대로 이해했음을 직감했다. 감독이 자평하듯 <라이트하우스>는 이상한 만큼 매력적이고, 패틴슨이 짚은 바와 같이 눅진한 술 냄새가 진동하는 광기어린 영화다. 외딴섬에 고립된 두 남자는 자신들의 불안을 술로 달래며 진실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 없는 말들을 쉼 없이 토해낸다. 카메라는 그것의 진위 여부를 가리지 않고 그저 묵묵히 바라보며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한다. 인물들의 대사와 은유적인 신들을 통해 마지막까지 진실을 은폐하는 것은 에거스 감독 특유의 장기다. 감독은 관객의 시야를 제한하고 그들로 자신이 놓은 다리 위만을 걷도록 인도한다. 그는 <더 위치>를 지나 <라이트하우스>에서 한층 더 과감하게 자신의 장기를 발휘한다.

등대, 왜곡된 열망이 향하는 곳

흐린 바다 위의 배가 서서히 드러나며 영화가 시작된다. 바다를 가로지르는 뱃머리와 그 위에 선 두 남자, 그들의 시선 끝엔 저 멀리 밝게 빛나는 등대가 있다. 에프라임 윈슬로우(로버트 패틴슨)는 등대지기의 보수가 크다는 소식을 듣고 늙은 등대지기 토마스 웨이크(윌럼 더포)가 있는 등대섬으로 온다. 교대 근무를 한다고 전해 들었으나 토마스는 에프라임이 등대에 접근하지 못하게 하고 기기 보수와 같은 잡일만을시킨다. 둘은 감독관과 일꾼의 관계이기 때문에 에프라임은 그의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에프라임은 등대에 오르고 싶다는 욕망이 강해진다. 어느 날 토마스의 신경질적인 압박에 견디다 못한 에프라임은 바닷새를 잔인하게 죽인다. 바닷새를 죽이면 바다의 신이 노할 거라던 토마스의 경고를 무시한 행동이었다. 이후 거짓말처럼 폭풍우가 몰아쳐 배가 들어오지 못하고 에프라임은 고용 기간이 끝났음에도 육지로 돌아가지 못한다. 두 사람은 장기간 고립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술만 들이켠다. 모든 것이 극도로 제한된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의 왜곡된 열망은 오직 한곳, 등대로 향한다.

에거스 감독은 이미 <더 위치>를 통해 자신이 한정된 공간 속 인물들의 심리묘사에 능함을 증명한 바 있다. 그러나 <더 위치>가 집과 숲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을 다뤘다면 <라이트하우스>는 외딴섬으로 공간을 더 좁히고, 그 속에 갇힌 인물들의 불안과 갈등이 증폭되는 과정을 집요하게 담아낸다. <라이트하우스>와 기존 호러영화들의 가장 큰 차이는 갑자기 관객을 놀라게 하는 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왜 관객은 이 영화를 보며 “섬뜩하다”라고 말하는 것일까.

우선 여기에는 로버트 패틴슨과 윌럼 더포의 연기가 큰 몫을 했다. 영화의 등장인물이 에프라임과 토마스 오직 두 사람이라 이들의 대사량이 상당히 방대한데, 두 인물은 이를 무리없이 소화한다. 주로 토마스 역의 윌럼 더포가 날선 폭언을 퍼부으면 에프라임 역의 로버트 패틴슨이 이성을 잃고 그의 공격을 되받아치는 식이다. 에거스 감독은 에드거 앨런 포의 <고자질하는 심장>에서 자기 심기를 건드린 노인을 해치는 플롯을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소설과 같이 토마스가 에프라임의 신경을 거슬리게 하고 갈등이 고조되어 결국 살인이 일어나기까지, 두 배우의 폭발하는 에너지는 관객이 끝까지 시선을 뗄 수 없게 만든다.

둘의 대화가 지루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는 영화가 계속해서 이들의 대화에 관해 의구심을 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토마스는 에프라임이 바닷새를 건드리게 된다면, 또 축배를 들지 않는다면 얼마나 끔찍한 일들이 벌어질지 계속해서 위협하듯 읊는다. “공포에 젖은 창백한 죽음이 바다의 동굴을 잠자리로 만들면, 출렁이는 파도 소릴 듣는 신이 애원하는 영혼을 구하러 강림하리라.” 식전마다 토마스가 외치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말들은 이 대사처럼 의미가 불명확하고 대체로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것들이다. 고전소설에나 나올 법한 낡은 말투도 토마스의 말에 대한 신뢰감을 떨어트린다. 에거스 감독은 실제 19세기 말 소설들의 대사들을 연구해 토마스의 말투를 설정하기도 했는데, 이것은 모두 관객으로 하여금 토마스의 말들이 오래된 미신에 불과하도록 믿게 만들기 위함이다. 그러나 에프라임이 바닷새를 죽인 후 실제로 풍향이 바뀌고 폭풍우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두 사람을 보며 관객은 허무맹랑하게만 느껴졌던 토마스의 말이 사실이었다는 공포 섞인 깨달음을 얻는다. 마지막까지 진실을 은폐하며 관객을 혼란시키는 에거스 감독의 장기가 빛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그 무엇도 믿을 수 없는

관객의 혼란을 가중시키기 위해 감독이 선택한 방법은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하는 것이다. 영화가 제공하는 정보는 크게 세 가지로, 두 등대지기, 외딴섬, 그리고 등대다. 극중 두 인물의 공간은 외딴섬에서 집 내부로 점점 좁혀진다. 감독은 1.19:1의 정방형에 가까운 화면 비율로 영화를 촬영했는데, 여기에는 화각을 좁혀 관객에게 한정된 정보만 제공하려는의도가 담겨 있다. 좁은 시야, 제한된 정보. 감독은 관객이 오로지 자신이 제공하는 한정된 정보에만 의지할 수밖에 없게끔 상황을 유도한다.

폭풍우 이후 두 인물이 계속해서 집 안에 머물기 때문에 좁고 어두운 집 내부를 묘사하는 것 또한 중요했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감독이 선택한 방법이 바로 흑백필름이다. 흑백필름의 노이즈는 “퀴퀴하고 먼지 날리는” 집 안의 분위기를 드러내기에 더없이 효과적인 방식이었다. 또한 흑백필름의 명암은 밤을 비추는 등대, 좁고 어두운 집을 밝히는 테이블 랜턴의 주목도롤 높였다. 랜턴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노려보는 두 사람의 눈빛, 그림자가 드리운 두 사람의 얼굴에는 광기와 불안감이 함께 어린다.

로버트 에거스의 전작 <더 위치>에서 토마신(애니아 테일러 조이)의 부모는 동생이 죽어갈 때 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를 마녀로 몰아간다. 극 내내 토마신과 부모의 공방이 이어지지만, 영화는 토마신이 승천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는다. <라이트하우스>의 흐름은 이러한 <더 위치>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다. 극히 제한된 정보 속에서 관객이 기댈 곳은 오로지 두 등대지기뿐이다. 그러나 두 등대지기가 자신이 보고 들은 것들을 믿지 못하게 되자 그들에 대한 관객의 신뢰 역시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앞서 밝힌 것처럼 감독은 관객의 시야를 제한하고 그들이 철저히 자신이 놓은 길만을 따라 걷게 한다. 그외에는 선택지를 두지 않는다. 꼼꼼한 자료조사를 통해 당대의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고, 그로 인해 관객이 모든 것을 진실이라 착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그들의 믿음을 전복시킨다. “도대체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가.” 모든 것이 무너진 상황에서 관객은 길을 잃고 방황한다.

그 무엇도 믿지 못하게 만드는 것. 모든 것을 의심하지만 아무것도 규명할 수 없다는 것. 거기에서 오는 황폐함, 무력감 그리고 허무함. 이 모든 것들로 가득 찬 경험을 선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존 호러영화들과 차별화된, 로버트 에거스 감독이 만들어낸 공포의 세계다. 로버트 에거스 감독은 <라이트하우스>를 두고 “실제와 같은 이야기”라고 지칭한다. 그가 말한 대로 <라이트하우스>는 실화를 옮긴 작품이 아닌 “실제와 같은” 배경들을 토양 삼아 꽃피운 세계다. 어딘가 익숙하지만 전혀 경험한 적 없는 세계. 그 한끗 다른 세계 속에서 감독은 억지스러운 장치들의 도움 없이도 우리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우리가 <라이트하우스>를, 그리고 로버트 에거스 감독의 행보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

<라이트하우스>의 비하인드 스토리

알고 보면 좋을 <라이트하우스>의 제작기를 소개한다. <라이트하우스>는 감독 로버트 에거스의 동생 맥스 에거스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작품이다. 맥스 에거스는 에드거 앨런 포의 미완성 유고인 <등대>를 자기식대로 마무리 지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시나리오 작업을 시작했다. <더 위치>의 투자를 받지 못해 힘들어하던 차, 에거스 감독은 응원을 받을 목적으로 동생을 만났다. 배우로 활동하던 맥스는 에거스 감독에게 자신이 진행하던 시나리오에 관해 말했고 감독은 해당 시나리오가 가진 잠재력을 단번에 알아봤다. 당시 감독은 이 아이디어를 가진 동생이 너무 부러웠고, 한편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지 못한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고 밝힌다. 맥스의 시나리오 작업이 더디자 에거스 감독은 자신이 한번 진행해보겠다고 제안했고,결국 두 사람이 함께 시나리오를 마무리 지었다. 이후 형제는 영화의 배경지에 관해 고심했는데, 최종적으로 캐나다 노바스코샤주의 케이프 포추 카운티에 있는 등대섬이 발탁됐다. 그러나 그들은 구미에 맞는 등대를 찾지 못했고 결국 약 21m 높이의 등대를 새로 지었다. 등대는 1t 무게의 내부 렌즈를 지탱할 만큼 견고하고 최소 26km 거리까지 빛을 전달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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