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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퍼 소닉>이 보여준 게임 원작 영화의 한계

너무나 미국적인

<수퍼 소닉>의 영화화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디자인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예고편은 일본 게임 디자인과 할리우드 영화 디자인의 관점이 얼마나 다른가를 보여주는 거의 모범적인 사례였다. 아니, ‘다르다’ 대신 ‘틀렸다’를 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소닉의 새 디자인은 예고편 공개 이후 끔찍한 역풍을 맞았다. 영화사에서는 개봉일을 뒤로 미루고 소닉을 새로 디자인한 뒤 이 캐릭터가 나오는 모든 장면의 CG 작업을 다시 해야 했다. 이 말도 안되는 일을 한 건 MPC 밴쿠버의 CG 전문가들이었다. 이들은 악명 높은 <캣츠>의 CG도 맡았고, <캣츠>의 경우는 개봉 이후에도 수정작업을 해야 했다. 이 두 영화의 작업이 끝난 뒤 회사는 문을 닫았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모두 이들이 맞은 잔인한 운명에 마음이 찢어져 눈물을 흘리고 있을 것이라 믿는다.

고장나지 않은 것은 고치는 게 아니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안 가는 일이다. 소닉의 디자인은 30년이 흐르는 동안 거의 완벽한 검증을 받았다. 모두 소닉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그 디자인을 사랑했다. 고장나지 않은 것은 고치는 게 아니다. 이 당연한 사실이 왜 할리우드영화의 제작 과정에선 무시당했을까? 게임 캐릭터를 실사영화의 CG 캐릭터로 그대로 옮길 수는 없다. 대부분 여분의 차원과 디테일이 들어가기 마련이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된다. 역시 게임 원작인 <명탐정 피카츄>도 그런 디테일의 추가로 화제가 됐던 작품이다. 피카츄를 포함한 이 영화의 포켓몬들 상당수는 복슬복슬한 털 결을 자랑했다. 많이들 당황스러워했는데, <수퍼 소닉> 예고편 때의 격렬한 저항은 없었다. 캐릭터의 질감은 드라마틱하게 달라졌지만 디자인 자체는 크게 달라진 게 없었기 때문에. <명탐정 피카츄>는 원래 디자인이 가진 다른 매력의 가능성을 보여준 것이지 디자인 자체를 바꾼 건 아니다.

예고편 소닉의 문제점은 디테일을 추가한 것이 아니었다. 고슴도치 주인공의 털 디테일은 당연히 추가되어야 한다. <로저 래빗>의 시대라면 모를까. 소닉이 실사 세계와 어울리려면 그 정도 질감은 갖고 있어야 한다. 문제는 털의 질감을 떠나 소닉을 보다 그럴싸하게 현실적인 동물로 만드는 시도에 있었다. 이유야 있다. 예를 들어 게임에서 소닉은 커다란 눈 한개에 눈동자가 두개 붙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사영화에서는 이를 해결해야 한다. 하지만 눈의 크기를 대폭 줄이고 미간을 벌리고 진짜 사람 것처럼 보이는 이를 추가하고 머리크기를 줄이고 몸을 늘리면서 소닉은 지나치게 분장한 사람 비슷해졌고 언캐니밸리의 영역으로 넘어가게 된다. 예고편을 본 관객이 질겁한 건 당연한 일이다. 소닉의 귀여움과 매력은 현실성과 별 상관이 없었다. 아니, 현실에서 멀수록 좋았다.

해결책은 최대한 원래에 가까운 디자인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눈 문제는 좁은 양미간에 하얀 털을 넣는 것으로 해결을 봤다. 100%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재앙에 가까웠던 이전 디자인보다 나았다. 조금만 생각을 해봤다면 굳이 안 해도 되는 일에 뼈와 살이 갈려나간 MPC 밴쿠버의 직원들을 위해 다시 한번 묵념을 할 시간이다. 소닉의 디자인 소동은 <수퍼 소닉>을 포함한 게임 원작 영화가 갖고 있는 근본적인 딜레마를 해결하려는 과정의 일부이다. 게임은 영화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매체이다. 다른 물리 공간에 존재하고 다른 이야기 법칙을 따른다. 얼핏 보면 소닉의 액션은 실제 세계의 액션을 스타일화해서 단순화시킨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화면 위에서 벌어지는 고유의 현상을 친숙한 이야기와 액션처럼 위장한 것이다. 이를 직설적으로 해석하면 아주 이상한 결과가 나온다.

사라진 게임과 영화의 시너지

게임 원작의 영화나 애니메이션은 이를 전통적인 스토리와 액션, 캐릭터 안에 흡수해 재해석하는 작업이고 그 과정 중 수많은 각색의 중간지대가 만들어진다. 이들 영화가 성공하기 쉽지 않은 이유는 팬들과 일반 관객의 기대치가 다르고 이들 사이에서 균형점을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너무 게임스러우면 영화적으로 이상하고, 영화에 충실하면 순수성이 깨진다. <수퍼 소닉>은 최대한 영화, 그것도 미국영화가 되려고 노력한 영화다. 게임에서 캐릭터를 가져왔고 팬들의 향수를 자극하려 하지만 소닉 게임을 전혀 모르고 봐도 상관없다. 미국 관객에게 재미있고 그럴싸한 영화를 만드는 것이 우선이다. 처음 디자인이 원본에서 그렇게 끔찍하게 멀어졌는데도 내부에서 제대로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던 것도 그 때문일 가능성이 크다. 게임과의 유사성보다 영화 자체의 논리가 더 중요했다. 미국영화 속 캐릭터는 미국영화 캐릭터처럼 생겨야 한다. 이 논리에 따르면 옛 디자인은 그럭저럭 이치에 맞았다. 언캐니밸리에 발을 담은 흉측함까지 정당화되지는 않겠지만.

영화를 본 뒤 로튼 토마토에 올라온 리뷰들을 읽으면서 대부분 미국 관객은 <수퍼 소닉>이 얼마나 미국영화인지 눈치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들이 디폴트로 생각하는 배경은 생각만큼 보편적이지 않다. 영화에서는 몬태나의 시골 마을인 그린힐즈와 인간 주인공 톰(제임스 마스던)이 얼마나 미국적으로 그려졌는지 보라. 속사포처럼 미국 농담을 쏟아내는 미국 코미디언 같은 소닉(벤 슈워츠)은 어떻고(종종 소닉은 발보다 말이 빠르다. 지도를 못 본다는 핑계로 달리는 대신 자동차 조수석에 느긋하게 앉아 농담을 쏘아대는 소닉을 보면 이게 뭔가 싶다). 캐릭터와 배경이 거의 <뉴욕의 헤라클레스> 수준으로 불일치해야 당연한데, 영화는 소닉을 정말로 끔찍하게 지루한 시골 마을에 가두고 교육시켜 평범한 미국인으로 만든다. 의외로 이 이야기는 미국인의 입장에서 본 난민의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않기로 한다. 여기서 그나마 중요한 건 <수퍼 소닉>이 너무나 ‘미국적인’ ‘영화’로 만들어지면서 두 문화와 매체가 충돌하면서 발생할 수 있었던 어떤 종류의 시너지도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수퍼 소닉>은 적당히 논리적이지만 실망스러울 정도로 안전하다. 당연히 클래식 소닉 게임의 특유의 흥분도 없다. 게임의 서스펜스가 번역되고 전환되는 대신 그 자리에 그냥 평범한 할리우드 액션이 들어갔으니까.

<수퍼 소닉>의 결과물이 얼마나 성공했는지는 아직 말할 수 없다. 결과물 자체만 보면 대자본 IP 영화들의 그물망이 형성되기 전인 1990년대 할리우드에서 종종 만들었던 코믹 액션물처럼 보인다. (심지어 짐 캐리도 나온다!) 미국 내 흥행 성적은 괜찮고 비평적 성과도 나쁘지 않지만 이건 다 애매하다. 한국 관객은 이 영화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아시아권 관객의 반응을 확인하려면 중국과 일본 개봉을 기다려야한다. 이 영화를 아주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싫어하더라도 대부분 그 감정에 그렇게까지 힘을 쏟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을 것이다. <수퍼 소닉>은 무난하고 선량한 오락물이고 나쁘더라도 미국적으로 진부한 영화일 뿐 그 이하는 아니다. 폭주족 고슴도치가 주인공인 영화의 평이이렇다면 좀 서글프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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