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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제국의 이데올로기를 기반으로 한 신파극 '미몽'

모던걸, 모던보이가 되기엔 부족했던

가정주부라는 굴레를 과감히 벗어던진 애순(문예봉).

<미몽> 제작 경성촬영소 / 감독 양주남 / 상영시간 48분 / 제작연도 1936년

영화 <미몽>이 담고 있는 1930년대 중반의 식민도시 경성은 우리가 교과서를 통해 인식해온 일제강점기의 모습이 아니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나라 잃은 울분과 슬픔 따위는 잊은 지 오래인 것처럼 보이고, 자동차와 기차 같은 서구 근대 문물이 만들어낸 속도감에 이미 익숙한 듯 행동한다. 영화 속 주인공이 비싼 옷을 찾아 헤매는 ‘데파트’(백화점)로 시작해, 어른들의 욕망이 오가는 카페와 호텔 장면까지 보고 있자면, 소비문화를 탐닉하는 수준이 아니라 데카당한(퇴폐적인) 공기까지 감지된다. 영화는 사람들의(무)의식적 욕망을 포함해 당대의 사회문화를 기록하고 반영하는 매체라는 말을 고려한다면, 이 영화에서 그려지는 식민지의 풍경이 전혀 거짓된 묘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아가 가장 대중적인 동시에 가장 정치적인 매체라는 영화의 본질에 이르면, 이 영화의 층위는 좀더 복잡해진다. 범죄 액션과 멜로드라마 장르를 앞세워 가장 대중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지만, 그 심연에는 식민지 사람들의 행동과 정서를 조종하려는 제국의 이데올로기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제국과 식민지의 가부장들이 나선 계몽극

2005년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굴한 1936년작 <미몽>은 국립 필름 아카이브 기능을 담당하는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존 중인 가장 오래된 발성영화이다. 지금 유튜브에는 2007년 디지털 심화 복원을 마친 버전이 올라가 있다. 한편 한국에 보존 중인 가장 오래된 무성극영화가 1934년작 <청춘의 십자로>임을 떠올린다면, 1934년의 무성영화와 1936년의 발성영화, 그사이에 이뤄진 기술적 전환을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사람의 음성이 들리는 토키가 처음 등장한 때는 바로 1935년 <춘향전>에서다.

우선 여기서 간과하기 쉬운 사실(史實)을 하나 짚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식민지 조선영화계는 조선 사람들이 주도적으로 이끌었지만 조선인들로만 구성될 수 없었고, 일본인의 자본과 기술에 의존할 때가 많았으며, 때로는 일본영화계와 합작도 해야 했다. 이는 한국영화사라는 내셔널 시네마의 역사 기술에서 늘 괄호로 처리되던 부분이었으나, 식민지의 사회구조와 상업영화의 제작 논리를 함께 고려해본다면 숨길 수 없는 사실임에 분명하다. 조선의 첫 번째 토키인 <춘향전>을 성공시킨 제작사는 경성촬영소였는데, 경성 흥행계의 유력자 와케지마 슈지로가 경영한 영화사였다. 이 촬영소는 조선영화인과 일본영화인의 ‘협업 시스템’으로 1930년대 중반 발성영화 신을 주도하고 있었다.

일제 시기 한국영화사 기록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필우·이명우 형제가 이 촬영소에 소속되어 토키 제작을 주도했고, 일본 쇼치쿠키네마 출신의 야마자키 후지에가 김소봉이라는 한글 이름으로 함께 활동했으며, 양주남·황운조 등 조선인 스탭들도 조수로 일했다. 경성촬영소의 세 번째 작품인 <미몽> 역시 녹음은 이필우가 맡았고, 장비는 <춘향전>에서 처음 사용한 후 개선을 거듭한 ‘노이스레스 P. L 시스템 조선폰’을 사용했다. 사실 이 ‘조선폰’은 일본인 녹음기사 나카가와 다카시가 교토에서 들고 온 것이었다. 감독은 경성촬영소에서 도제로 성장한 양주남이 맡았다. 일본인 김소봉이 공동 연출을 했다는 기록도 있어, 조일(朝日)영화인이 협업했던 당시 촬영소 풍경을 그려보게 한다.

이처럼 조선영화계의 토키 제작 상황을 잘 보여주는 <미몽>은, <승방비곡>(1927) 등의 대중소설로 유명한 최독견이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썼고, 경기도경찰부보안과와 선만(鮮滿)교통타임즈사가 제작을 지원했다. 당시 기록을 빌리면, <미몽>은 현대극(당시 조선영화는 일본영화처럼 크게 시대극과 현대극으로 구분)이자 ‘교통선전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학자 이효인이 이 영화를 “일제 당국의 정책(경기도경찰부보안과 등)-일본인 자본 투자(와케지마 슈지로)-조선 인텔리들(작가 최독견 등)의 동조”라는 차원에서 분석한 근거인 셈이다. 확실히 이 영화는 식민지 사회의 남성 계급이 주도해 만든 교훈극으로서의 성격이 강하게 드러난다. 당시 관객 역시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게 움직이는 기혼 여성의 모습이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 같다.

처벌받는 식민지 여성과 남성

‘죽음의 자장가’라는 다른 제목도 달린 <미몽>은 가정주부 애순(문예봉)의 일탈과 마지막 순간의 참회를 그린다. 영화는 새장 속의 새(말 그대로 ‘농중조’(籠中鳥))를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남편 선용(이금룡)이 허영이 심하다며 애순을 나무라자, 애순이 “나는 조롱에 든 새는 아니니깐요”라며 맞받아치는 장면이 바로 뒤를 잇는다. 결국 남편은 애순을 내쫓고, 그녀는 데파트에서 만난 창건(김인규)과 호텔에서 지낸다. 애순은 부잣집 아들인 줄 알았던 창건이 세탁소에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창건 일당이 호텔에서 강도짓을 하자 냉정하게 경찰에 신고한다. 그러고는 공연에서 본 무용가(조택원)를 따라가기 위해 택시를 잡아타고 경성역으로 간다. 기차가 막 출발한 것을 본 그녀는 운전사를 재촉해 다시 용산역으로 가던 중, 과속한 택시가 그만 딸 정희를 치고 만다. 병실에서 정희와 같이 누워 있던 애순은 독약을 먹고 자살한다.

<미몽>은 식민지 시기 영화 장르로 말하자면 신파극에 해당한다. 즉 현대를 배경으로 한 치정-멜로드라마인 것이다. 가정 비극이 주된 정조이지만, 마지막에는 선용이 애순을 죽이겠다며 권총까지 들고 병실을 찾는 것으로 보아 무성영화의 활극적 요소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무용가가 탄 기차를 쫓아 속도를 높이는 애순의 택시 장면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이 영화의 흥미로운 지점은 범죄물로서의 성격이 강해지는 것을 조심하는 연출이다. 창건 일당이 형사들에게 잡히는 장면에서 볼 수 있듯이 영화는 액션 장면을 제대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격투가 일어나는 바로 옆의 빈 공간을 카메라가 비추며, 관객이 상상할 수 있도록 사운드로만 처리하는 것이다. 또 동료와 범죄를 모의하던 창건이 “애순이 때문엔 죽어도 아깝지 않으니까”라고 말하는 장면에서도, 이 영화를 치정극의 자리에 고정시키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에서 볼 수 있었던 날것 그대로의 격투 장면이 보여주는 활극적 에너지는, 더이상 1930년대 중후반 발성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자본가-모던보이(한량)-일제’라는 관념적으로 연결된 지배계급의 설정 그리고 이 지배계층에 대한 물리적 저항을 부각시키는 플롯은 바로 나운규의 <아리랑>(1926)이 선취한 것이다. 이 구도를 <미몽>에 대입해 생각해보자. 특히 애순을 단죄하기 위해 장롱에서 총을 찾은 선용이 병실로 돌진하는 장면이다. 일반 회사원에 불과한 조선인 남성이 마지막에 총을 거머쥔 것은, 그가 일제 당국을 대신한 계몽 주체로 호명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처럼 무성영화 시기 조선영화인들이 만든 인물 설정이 식민 당국의 계몽영화로 이어졌지만, 그 단죄의 구도는 역전되었다. 모던걸, 모던보이의 자리에 놓기에는 부족한 애순과 창건은, 사랑과 돈이 뒤얽힌 복잡한 욕망을 좇다 처벌받은 것이다. 하지만 일제 당국-조선인 엘리트(선용)가 처벌하려던 애순은 스스로 생을 마감하고 선용은 총을 사용할 기회조차 없었다. 허공을 바라보는 선용의 숏으로 영화가 끝나는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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