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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한 인물도 충분히 말하지 못한 '이장'의 안타까운 무리수

강박적인 '오차 없음'

정승오 감독의 장편 데뷔작 <이장>을 보기 전에 우연히 포스터를 먼저 보게 됐다. “세기말적 가부장제에 작별을 고하다”라는 타이틀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세기말’이라는 단어를 접한 게 오랜만이라 그렇기도 했겠지만, ‘가부장제에 작별’이라는, 20자평에나 등장할 법한 이 단정적인 선언의 무게를 과연 영화가 얼마나 버텨낼 것인가, 걱정이 앞섰기 때문일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포스터의 저 문구가 일종의 ‘선언’이었다면 영화는 그 선언에 대한 하나의 ‘행동강령’ 처럼,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진행된다. 여기서 방점은 그 강박적인 ‘오차 없음’ 에 있다.

다섯개의 사연에 너무 짧았던 1박2일

이 ‘강박’에 대해서 설명하기 위해서는 아마 이 장면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기 위해 모인 오남매와 큰아버지 내외는 이장 전 마지막 제사를 준비한다. 이장 후 동생의 묘를 제대로 쓰지 않고 화장한다는 결정을 한 조카딸들에게 잔뜩 화가 난 큰아버지가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집안 유일한 아들인 승락(곽민규)을 제주(祭主)로 세우고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다. 그런데 제사가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정말 뜬금없이 날아든 벌에 큰아버지가 놀라 쓰러지고, 연이어 승락마저 벌의 공격에 축대 아래로 굴러떨어지는 일이 벌어진다. 장면이 바뀌면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병원에 간) 승락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큰아버지는 묘지 관리자의 채근으로 어쩔 수 없이 장남 승락 없이 제사를 지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궁지에 몰린 큰아버지는 큰 조카딸 혜영(장리우)을 제주로 세워 제사를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어떻게 보아도 이 장면의 의미는 너무나 명백하다. 가부장의 자리에 있던 아버지가 (두 번째로, 어쩌면 진정으로) 죽고, 그 뒤를 자동으로 물려받은 무능력한 아들 승락이 실권하자, 실질적인 가(부)장 역할을 해온 장녀, 혜영이 드디어 ‘세기말적 가부장제와 작별을 고하고’ 새로운 가(부)장의 자리에 올라서는 것. 그런데 이때 주목해야 할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 번째는 말하자면 일종의 제사장으로서 제주의 자리에 혜영을 지명한 큰아버지의 ‘마뜩잖음’이다.

<이장>에서 큰아버지의 자리는 절대적이다. 성인이 된 지금도 자매들은 큰아버지와 통화하는 것조차 두려워한다. (실제로 큰아버지에게 연락하는 둘째 금옥(이선희)은 전화하는 내내 벌벌 떨며 말까지 더듬는다.) 그렇게 강단 있게 동생들을 다그치던 혜영도 막냇동생 승락 없이 이장을 할 수 없다는 큰아버지의 호통에 기세를 잃고 만다. 생닭의 목을 거침없이 칼로 내리치는 큰어머니조차 평생 함께 살아온 남편을 이기지못한다. 이때 큰아버지는 동생인 오남매의 아버지의 빈자리를 대체하는 상징적 아버지이자 영화가 작별을 고해야 할 ‘가부장’인 셈이다. 그런 그가 동생의 (결국 자신의) 자리를 승락이 아닌 혜영에게 물려주게 됐지만 여기엔 어떠한 수긍이나 이해, 공감도 수반돼 있지 않다. 그래서 이 마뜩잖은 작별은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오해해서는 안된다. 나는 지금 영화가 큰아버지를 (그래서 우리를) 제대로 설득시켜야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평생을 호통치며 권위적인 가부장으로 살아온 큰아버지가 문득, 아주 문득 깨달음을 얻어 가부장의 자리를 내려놓고 조카딸들을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게 됐다, 고 영화가 어설프고 두루뭉술하게 넘어갔다면 이 영화가 훨씬 더 불편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사실 영화는 처음부터 큰아버지에게는 각성의 기회를 줄 생각이없다. 대신 영화는 오남매를 경유하여 어떻게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가 실패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더 초점을 둔다.

잠시 다시 영화의 앞으로 돌아가볼 필요가 있다. 그리 우애가 깊지 않은 오남매가 아버지의 이장(혹은 이장에 수반되는 보상금)이라는 한 가지 목적으로 한자리에 모인다. 첫째 혜영은(이유는 자세히 언급되지 않지만) 남편 없이 정서불안에 시달리는 아들을 키우는 싱글맘이다. 둘째 금옥은 돈 벌어주는 것외에 아무것도 기능하지 않는 남편을 근근이 붙잡고 살아간다. 곧 결혼을 앞둔 셋째 금희(공민정) 역시 성인이 되어서도 부모에 기대어 사는 ‘캥거루’족 예비남편의 무능력함에 벌써 지쳐버렸다. 넷째 혜연(윤금선아)은 대학에서 여성운동을 하지만 돌아오는 건 “너도 결국 한(국)남(자)의 씨에 불과한 족속이다”는 비난뿐이다. 막내이자 유일한 아들인 승락은 여자친구를 임신시킨 뒤 도망쳐 연락을 끊고 숨어 지내는 중이다. 모든 에피소드가 작정이라도 한 듯이 남성-가부장제의 폐해를, 그것도 너무나도 전형적인 양상으로 보여주고 있다는 서사의 서툶은 차치하더라도 하나도 아니고 무려 다섯개의 사연을, 단 1박2일 안에 모두 처리하려는 영화의 무리한 욕심은 관객으로 하여금 어느 한명의 이야기에도 공감할 수 없게 만들어버린다. 더구나 금옥이 남편의 외도를 목격하거나 혜영과 금희, 혜연을 둘러싸고 돈 문제가 불거졌을 때, 영화는 이런 문제까진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는 듯 우스꽝스러운 몸싸움이나 입씨름 등으로 슬쩍 넘긴 다음 ‘가족이란 다 그런 거지’라는 태도를 취해버린다.

감독의 인위적 개입이라는 문제

이러한 도식적 선택이 가져올 위험을 무릅쓰고 오남매를 끝내 큰아버지 앞에 데리고 왔으니 이들간의 공감이나 이해는 없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제 바로 두 번째, 감독의 인위적 개입이다. 다시 제사 장면으로 돌아가보자. 승락이 안전하게 가부장 자리를 이어받지 못하게 막는 건 영화의 마지막까지 차곡차곡 쌓아온 서사도, 등장인물의 감정도 아닌 ‘난데없이’ 등장한 벌이다. 이제까지 풀어놓은 대로 영화를 진행시킨다면 승락이 제주가 되고 마무리가 되었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마치 그것만은 참지 못하겠다는 듯, 혹은 세기말적 가부장제와 작별을 하겠다는 선언을 무슨 수가 있어도 실천해내겠다는 듯, 감독이 노골적으로 개입하여 승락을 ‘추락’시킨 것이다. 이 실천 강박에 가까운 개입은 이제까지 자신이 쌓아놓은 이야기를 스스로 무너뜨릴 수 있는 위험한 선택임에도 불구하고 감독은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감독 자신도 이 선택이 무리수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벌이 등장하는 순간, 카메라를 뒤에서 제사를 지켜보고 있던 승락의 여자친구와 혜연의 시선으로 이동시켜 이 난데없는 상황을 아주 멀리서만 지켜보도록 만든다. 이 어리둥절한 마무리는 이장을 마치고 돌아가는 차 안에서 금희가 아버지의 보내지 못한 문자를 뒤늦게 발견하는 ‘감동적’인 장면으로 슬그머니 봉합된다. 하지만 우리는 정말 영화가 시키는 대로 안심하고 극장을 나서도 되는 걸까?

한 감독이 인터뷰에서 시나리오가 정말 풀리지 않을 때 마치 ‘치트키’ 처럼 감독이 (억지) 개입하는 방법이 두개가 있는데, 하나는 해결되지 않는 인물을 죽게 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미치게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 있다. 결국 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영화가 프로파간다가 아닌 이상 영화 스스로 버티고 설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 그렇게 자신의 영화를 믿어주는 것이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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