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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길의 영화-다른 이야기] 나의 틴에이지 소녀
강화길(소설가) 일러스트레이션 EEWHA(일러스트레이터) 2020-05-04

영화 <미스 아메리카나>

테일러 스위프트의 <You Belong with Me> 공연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을 아직도 또렷하게 기억한다. “세상에, 틴에이지영화에서 바로 튀어나온 것 같네!” 실제로 테일러 스위프트는 하이틴 스타였고, 노래의 내용도 그랬다. “네 여자친구는 치어리더고 나는 관중석에 있어. 나는 항상 네 곁에 있는데, 왜 너는 모르니. 너는 내 거야!”(<You Belong with Me>) 그 귀여운 노래를 듣던 4분 남짓한 순간, 나는 완벽한 틴에이지영화 한편을 본 느낌을 받았고, 이후 테일러 스위프트의 노래와 공연 영상을 종종 찾아보곤 했다. 하지만 팬이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그녀의 노래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된 건, 그로부터 꽤 많은 시간이 지난 후였다. 그러니까 내 이름을 건 작품을 발표하고, 그에 대한 평가를 받는 일에 상당한 피로감을 느끼던 즈음부터.

어느 날 그녀가 이렇게 노래하는 걸 들었다. “사람들은 내 머리가 비었다고 말해. 파티도 너무 많이 하고, 데이트도 너무 많이 한대. 그게 사람들이 (나에 대해) 하는 이야기야. 하지만 나는 괜찮아. 다 떨쳐버릴 거야.”(<Shake It Off>) 그리고 이렇게 노래하는 것도 들었다. “지금 너는 나를 괴롭히지만, 나는 언젠가 큰 사람이 될 거야. 그리고 너는 작은 바에서 술이나 마시면서 여전히 내가 노래를 못한다고 흉이나 보겠지.”(<Mean>)

이 정도면 굳이 내 일기장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또 이런 노래를 들었다. “지금처럼 내 평판이 나쁠 때가 없었어." (<Delicate>). 그 노래가 실린 앨범의 제목은 바로 《reputation》, ‘평판’이었다. 나는 곧장 궁금해졌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그리고 나는 인터넷 서칭 몇분 만에 알게 된다.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공개된 다큐멘터리영화 <미스 아메리카나>에도 등장한 바로 그 ‘기가 막힌’ 일화에 대해.

<미스 아메리카나>는 목적이 꽤 분명한 편이다. 테일러 스위프트라는 연예인의 인간적인 부분을 드러내는 것인데, 그 초점은 ‘변화’에 맞춰져 있다. 하이틴 스타였던 소녀가 서른 언저리의 경력 많은 뮤지션이 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어떤 일들. 그 사건들이 테일러 스위프트에게 끼친 영향. 그러니까 테일러 스위프트가《reputation》과 《Lover》 앨범을 만들기 이전과 이후.

그녀는 “이전”의 자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착한 소녀(good girl)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영화는 그녀가 굿걸로 살아온 과정을 꽤 꼼꼼하게 보여준다. 그녀는 16살에 자작곡으로 데뷔했고, 19살에 그래미상을 탔다. 재능 있고 사랑스러운 소녀였고, 컨트리 뮤직의 신예이자 미래였다. 그녀는 사람들에게 박수를 받는 것이,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믿었다.“착한 아이는 자신의 가치관으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아요.”

그녀는 정치적 발언을 한 적도 없고, 누군가 자신을 불편하게 했을 때 화를 낸 적도 없었다. 17살, MTV비디오뮤직어워드에서 올해의 여성 비디오상을 수상했을 때 카녜이 웨스트가 느닷없이 무대에 난입해서 당신보다 비욘세가 더 뛰어나다는 말을 했을 때에도 그녀는 화를 내지 않았다. 굳은 얼굴로 가만히 서 있었을 뿐이다. (물론 그 순간에 어떤 반응을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후 카녜이 웨스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그녀는 “나는 문제를 일으키고 싶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은 그 굿걸을 마냥 좋아하기만 했나? 내 기억에 테일러 스위프트는 가십으로 유명한 연예인이었다. 그녀의 남성 편력은 어떤 면에서 음악보다 유명했다. 그러니까 그 가십들을 정리해서 말하면 이런 것이다. 재능이 뛰어나고, 비틀스의 기록을 경신하고, 키도 178센티미터나 되고, 예쁘고 돈도 잘 벌고, 엄청나게 똑똑하지만 “끊임없이 남자들을 갈아치우는 성격 나쁜 여자”. 그렇다. 바로 이 마지막 구절에 따옴표가 찍혀 있다. 사람들은 알고 있는 것이다. 이런 “여자”의 커리어와 성과를 순식간에 깔아뭉갤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물론 테일러 스위프트는 나름대로 대응을 했다. “곡을 쓰는 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어요. 나 자신을 증명하기로 마음먹었죠.” 실제로 그녀는 그렇게 했다. 좋은 음악을 만들려 했다. 남자에게 집착하는 여자 취급을 받자 아예 그런 내용의 노래를 만들었고 (Blank Space), 가십과 편견에 시달리자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즐겁게 살 거라는 노래를 만들었다(<Shake It Off>).

그녀는 실력으로 악담들을 넘어서려 노력했다. 앨범들은 연달아 히트를 쳤고 23살에 또 그래미상을 받았다. 그러나 깨닫게 된다.

“이젠 단순한 음악 문제가 아닌 거 같아요.”

그녀를 한차례 괴롭힌 적이 있는 카녜이 웨스트는 테일러 스위프트를 성희롱하는 노래를 만들고, 합의하에 이루어진 일이라며 그녀와의 (편집된) 통화 영상을 공개한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부정했고 반박했지만, 통화 장면을 본 많은 사람들은 그녀가 거짓말을 한다고 ‘기다렸다는 듯’ 믿는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평판은 바닥에 떨어진다. 사실 이 영화에서 내게 충격을 준 장면은 카녜이 웨스트와 테일러 스위프트의 통화 장면이 아니었다. 카녜이 웨스트가 그 노래를 콘서트장에서 신나게 부르고, 그의 공연장에 온 관객이 열광적으로, 입에 담기 힘든 그 가사를 따라 부르는 장면이었다. 한 여성을 ‘성적으로’ 짓밟는 가사를 부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 그 가사로 연결되고, 서로를 바라보며 즐거워하고 환호하는 사람들. 이어 또 하나의 사건이 터진다. 그녀를 성추행해서 고발당했던 남자가 역으로 고소를 해온 것이다. 테일러 스위프트는 1달러를 걸고 맞고소를 한다. 그 사건들 이후 그녀는 “입마개”를 벗는다.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고, 외모 강박증에서 벗어나려 노력하고, 페미니스트임을 드러낸다. 《reputation》이라는 앨범을 만든다. 그리고 단 한 가지는 결코 놓지 않으려 애쓴다. 여전히 좋은 음악을 만드는 것. 그녀는 뮤지션이고, 노래로 사람들과 연결되는 존재이니까. 이 변화의 과정을 보며 나는 뭐랄까, 오래전 봤던 틴에이지영화의 후속편을 보는 듯했다. 생각해보면 틴에이지영화에서는 착한 소녀, 사랑받을 정도로만 똑똑하고 예쁜 그 굿걸이 어떤 어른이 되는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미스 아메리카나>는 그 하이틴 소녀가 스스로 만든 ‘결말 이후’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어린날 카녜이 웨스트에게 마이크를 빼앗겼던 그 MTV비디오뮤직어워드에서 29살의 테일러 스위프트는 다시 한번 상을 받는다. 퀴어 혐오자들에게 “진정 좀 하시지”(<You Need to Calm Down>)라고 노래한 뮤직비디오로. 그리고 수상 소감에서 말한다. 약자와 소수자를 보호하는 정당에 투표해달라고.

그걸 보면 사실 혐오자들이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소녀를 모욕하고, 기를 죽이고,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너의 모든것을 빼앗아버리겠다고 협박하고, 그리하여 그런 노래를 부르는 사람의 공연에서 열광적으로 떼창을 하지만 결국 그 모든 것이 의미 없어지는 것. 왜냐하면 소녀는 어떻게든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어른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착한 소녀가 한 나라의 국민으로, 여성으로, 뮤지션으로, 미스 아메리카나 좋은 사람이 되어 자신의 삶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걸 결코 막을 수 없다. “너는 내 거야!”(<You Belong with 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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