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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엽 편집장] 당신의 차기작을 기다립니다
장영엽 2020-05-08

황금연휴 기간 동안 <GV 빌런 고태경>을 읽었다. 이 작품은 다큐멘터리 <투 올드 힙합 키드>와 극영화 <사브라> <메이트>를 연출한 정대건 감독의 첫 장편소설이다. 온 힘을 다해 첫 장편영화를 만들었으나 “관객수 987명, 평점 5.2, 달랑 4개의 댓글, 그리고 빚 300만원”만 남게 된 어느 초짜 영화감독의 ‘방황의 시간’을 좇는 <GV 빌런 고태경>은 유머러스한 제목과 달리 한국영화계의 멜랑콜리한 풍경을 조명한 하이퍼리얼리즘 소설이다. 박찬욱, 봉준호, 김지운 감독의 영화가 쏟아져나오던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시절, 장밋빛 미래를 꿈꾸며 영화학교에 입학한 주인공은 첫 장편영화가 흥행에 참패한 뒤 영화 현장지원, 입시학원 강사 아르바이트를 하며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재능으로 반짝이던 동기들은 하나둘 영화의 꿈을 접고, 영화 찍다 헤어진 배우 출신의 전 남친은 독립 장편영화의 주연을 맡으며 ‘<씨네21>이 주목하는 라이징 스타’ 특집기사에 나오는 등(이 대목을 읽으며 <씨네21> 기자들이 몹시 즐거워했다) 성장의 커리어를 밟는다. 성공과 실패 사이에서, 첫 장편영화와 기약할 수 없는 차기작 사이에서, 초짜 영화감독은 문득 궁금해진다. 그 많던 영화감독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다들 어디서 어떻게 생계를 해결하며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을까. “오겡키데스카?”(잘 지내고 있나요?) 인디스페이스에서 우연히 만난 베테랑 조감독 출신의 ‘GV 빌런’ 고태경은 주인공이 구하고자 하는 답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정대건 감독은 “모든 (영화감독) 준비생과 지망생들, 기회만 주어진다면 잘해낼 사람들”이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을, 그리고 자신을 미워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GV 빌런 고태경>을 썼다고 고백한다(더 자세한 후일담은 이번호 김소미 기자의 인터뷰에 실었다). <GV 빌런 고태경>은 근래 한국영화를 둘러싼 풍경이 창작자들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혹하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신진 창작자들이 만들고 싶은 영화를 찍을 수 있는 확률은 갈수록 낮아지고 있고, 영화를 완성한다 하더라도 어쩌면 흥행에 실패하거나 쏟아지는 세간의 비난을 마주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감수하는 게 영화감독의 숙명이라 말할 수도 있겠지만, 오랫동안 추구해왔던 비전이 생각과는 다른 결과물로 완성되었을 때 창작자에게 요구되곤 하는 ‘다음’을 위한 근성과 용기는 과연 오롯이 그들의 몫이어야 하는지 되물어야 할 필요는 있다. 정대건 감독이 소설에 썼듯, 모든 창작자들에게 자본과 더불어 가장 절실한 건 ‘관심의 재분배’다. 내게는 그 표현이 단순히 여기 이런 감독이 있다는 걸 알아달라는 게 아니라 영화의 좋았던 점에 대한, 혹은 실망스러운 지점에 대한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달라는 말로 느껴졌다. 관객과 평단에 의해 영화의 러닝타임보다 더욱 오랫동안 이어지는 네버엔딩 스토리야말로 창작자들을 앞으로 나아가게 할 것이다. 제작 과정부터 개봉 이후까지 <사냥의 시간>이 남긴 것들을 진단하는 1255호 특집기사 또한 그러한 연유로 기획했다. 이것은 20자평과 별점이 담을 수 없는, 한 영화에 대한 <씨네21>의 긴 주석이다. 앞으로도 영화에 대한 우리의 애정어린 주석은 이어질 것이다. 그러니 당신이 누구이든, 어디에 있든, 힘을 내어달라. 우리는 당신의 차기작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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