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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식민지 영화인들이 개척한 근대의 기록 '반도의 봄'

멜로드라마의 정조

식민지 예술가들의 희망과 불안이 교차하는 멜로드라마. 영일(왼쪽에서 두 번째)이 안나(가운데)와 함께 나타나자 상심에 빠진 정희(맨 오른쪽).

<반도의 봄> 제작 명보영화사 / 감독 이병일 / 상영시간 84분 / 제작연도 1941년

조선영화는 식민지 조선 사람들이 만들어낸 근대의 가장 대표적인 장면일 뿐만 아니라 식민지/제국 체제의 기록 그 자체이기도 하다. 조선영화인들은 영화를 만들기 위해 일제와 협상하고 때로는 경합했으며, 영화문법에 있어서는 서구영화와 일본영화 사이에서 조선 나름의 방식으로 토착화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영화는 영화 매체의 특성상 허구의 세계일 수 있지만 식민지의 현실을 투영해낸결과이며, 나아가 식민지라는 상황에서 한편의 영화가 만들어지는 모든 과정을 반영해낸 산물이기도 하다. 2005년 중국전영자료관에서 발굴한 <반도의 봄>은 조선영화인들이 개척해간 근대를 정면으로 다룬다는 점에서 무척 흥미로운 텍스트이다. 이 영화는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영화(를 만드는 것)에 대한 영화이며, 1940년 시점 조선영화계를 비롯해 식민지의 문화예술이 어떤 논리로 구성되었는지, 그 구성원들의 정신과 행동은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작품이다.

식민지 예술가들의 현실을 반영하다

먼저 이 영화의 감독 이병일의 이력부터 살펴보자. 그는 한일병합이 강제 체결된 1910년 함흥에서 태어났고, 1932년 도쿄로 건너가 미사키영어전문학교에서 공부하며 문화사업을 도모했다. 코리아레코드사를 만들어 이화자, 김정구 등의 조선 가요 레코드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가 본격적으로 영화 일을 시작한 것은 1936년 닛카쓰영화사의 감독부에 입사하면서인데, 할리우드를 경험하고 돌아온 아베 유타카 감독 밑에서 일했다. 1937년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 예술인을 중심으로 조선영화협회가 창립되었을 때 감독부 명단에서도 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조선으로 돌아온 그는 직접 명보영화사를 설립하고 첫 연출작으로 <반도의 봄>을 만들었다.

1940년 전후 시기의 조선영화계는 일본영화계와 협업하고 조선총독부 당국과 적절히 협상해가며 어느 정도 안정적인 제작 궤도에 오른 것처럼 보였지만, 이는 조선영화인들의 열망이 과도하게 앞선 탓에 그들에게 일종의 착시감을 준 것이었다. 조선영화계는 자본도 기술도 제작기구도 여전히 빈곤했고, 특히 <수업료>(1940)와 <집 없는 천사>(1941) 같은 고려영화사의 제작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일본 시장에서의 흥행도 일제의 영화로 받아들여지는 것도 쉽지 않았다. 1939년 4월 일본 최초의 영화법에 이어 1940년 1월 조선영화령이 공포되면서 조선의 민간 영화사들은 일제의 국책영화 시스템으로 급속히 재편된다. <반도의 봄>의 영화 속 배경이 바로 이때다. 하지만 영화 제작을 지속할 수 있을 거라는 조선영화인들의 희망은 1941년 8월 일제의 영화신체제 선언과 12월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물거품이 된다. 민간의 영화 제작사들은 단 하나의 국책영화 회사로 강제 통폐합되었기 때문이다.

영화 <반도의 봄>은 일본 주간지 <선데이 마이니치>의 당선 소설인 김성민의 <반도의 예술가들>(1936)이 원작으로, 식민지 조선에서 모색된 연예산업 곳곳의 풍경과 내밀한 현실을 묘사한다. 특히 영화 속 영화인 <춘향전>이 제작비 문제로 좌초되었다가 영화 기업의 등장으로 완성을 보고 흥행에 성공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대부분의 조선영화가 일회성의 투자 자본에 의존했던 것처럼, 이 영화 역시 실제로는 지방의 한 영화관에서 제작비를 받아 만들었다고 한다. 1940년 8월에 촬영을 개시한 영화는 제작과 상영에 난항을 겪다 1941년 11월에야 개봉했다. 이 영화의 백미는 조선영화계 인력들이 힘겹게 합숙 생활을 하며 영화 만드는 장면들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극중 <춘향전>의 방자(전택이)가 본인의 출연이 끝나자, 다음 장면에서 반사판을 들고 조명을 도와주고 있는 모습도 인상적이다.

<반도의 봄>은 영화 현장뿐만 아니라 식민지 문화의 여러 풍경들도 담아낸다. 영화 속에는, 실존한 회사는 아니었지만 역시 이병일의 경험이 담긴, 동아레코드주식회사의 경성 본사가 등장한다. 극중 영화 제작비를 대던 사람이 바로 레코드회사의 문예부장(김한)이다. 회사 직원인 경숙(복혜숙)이 10개월 할부로 산 라디오를 듣는 장면에서, 방송이 경음악에서 나니와부시(일본 전통음악 장르)로 바뀌자 라디오를 끄는 것도 식민지 사회의 복잡한 층위를 고려하게 만든다. 어렵게 영화가 완성되어 극장에서 개봉될 때, 주연배우 정희(김소영)가 무대에서 영화 주제가를 부르는 장면도 눈길을 끈다. 당시 극장에서 영화 상영과 함께 이루어졌던 어트랙션(영화관에서 본격적인 프로그램의 전후나 그 막간에 보여주는 다양한 실연) 무대를 재현한 것이다. 김소영이 부르는(사실은 백난아의 목소리인)<망향초 사랑>은 곡 전체를 다 들려주는데, 당시 영화를 보던 관객은 실제 공연을 덤으로 본 것처럼 만족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식민지 조선의 극장 문화를 포함해 부민관과 명치좌 같은 당시 극장 공간의 선명한 기록으로서도 가치가 크다.

멜로드라마 구도와 식민지의 이중언어 상황

영화 <반도의 봄>은 자본주와 가난한 예술가의 갈등 구도를 만들고, 그 사이에서 고초를 겪는 여성들을 그리며 멜로드라마의 정조를 제대로 포착해낸다. 가장 흥미로운 대목은 주인공 영일(김일해)을 동시에 사랑하는 안나(백란)와 정희 둘 다, 당찬 여성들로 묘사하는 것이다. 문예부장의 연인이었던 안나는 그가 횡령죄로 영일을 고소하자 직접 해결에 나서고, 돈을 구하기 위해 문예부장을 만난 정희는 그가 돈을 줄 테니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말하자 미련 없이 자리를 박차고 나온다.

이 영화에서 주목할 지점은 조선어와 일본어가 동시에 사용되는 식민지의 이중언어 상황이다. 회사의 간부인 문예부장은 물론이고 영일과 영화감독(서월영) 등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공사를 막론하고 조선어와 일본어를 섞어서 사용한다. 하지만 조선어만 사용되는 장면들이 있는데, <춘향전> 제작이 중단되자 감독이 영화사 사무실에 모인 제작진과 논의할 때가 그렇다. 극중 <춘향전>의 대사역시, 촬영 현장의 일본어와 대비되며 조선어로만 발화된다. 비록 영화 속에서라도 조선어만 사용되는 민족적 공간이 확보된 것이다. 극중 안나가 일본어만 사용하는 것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영화학자 백문임이 지적하듯이, 원래 안나 역은 일본영화계의 스타 시가 아키코가 출연할 예정이었다. 만약 그대로 진행이 되었다면, 조선인 남성 영일은 일본인 여성과 조선인 여성 사이에서 삼각관계를 형성했을 것이다. 춘향 역은 일본 여성에서 조선 여성으로 교체되고, 영화의 마지막, 정희가 영일과 결합하는 것까지 생각해보면 실제 일본인 배우의 출연이 성사되지 못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도쿄에서 온 댄서 출신으로 유창하게 일본어를 하는 안나가 국적성이 모호한 이름을 부여받은 것도 일본인으로 특정하지 않으려는 이유로 짐작된다.

영화의 마지막, 사랑을 회복한 영일과 정희는 도쿄의 촬영소를 경험하고 ‘내지’ 영화인들과 교류하기 위해 경성역에서 출발하는 기차에 오른다. 영화의 마지막 숏은, 떠나는 그들의 모습을 영화 속 감독이 근심 어린 얼굴로 쳐다보는 것이다. 감독의 복잡한 표정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들의 출발은 조선(민족)영화를 위해서 이미 늦어버린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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