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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리나 바렐라'가 보여주는 대면과 접촉이 불가능해진 자리의 영화 이미지에 대해

[김병규 평론가의 프런트라인]

페드로 코스타의 <비탈리나 바렐라>의 한 장면에서, 남편 요아킴의 부고 소식을 듣고 폰타이냐스로 돌아온 비탈리나는 남편과 함께 살던 낡은 집에 홀로 앉아 말한다. “나는 당신이 죽었든 살았든 믿지 않아. 당신의 시체도, 당신의 묘지도, 관도 나는 볼 수 없었어. 정말 땅속에 묻혀 있긴 한 거야?” 이 말을 읊조리는 비탈리나의 육체는 침대에 비스듬히 기댄 채로, 거의 사진처럼 느껴지는 정지된 자세를 유지하며, 간신히 음성을 내뱉고 몸 바깥으로 눈물을 흘려보낸다. 그녀의 눈동자는 무엇을 바라보고, 목소리는 누구에게 전달되는가. 쉽게 생각하면 그녀는 실내 반대편에 위치한 벽과 제단을 쳐다보는 것이고,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뒤늦은 말을 발화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영화는 이를 확증하지 못한다. 눈동자의 응시는 리버스숏을 담보하지 않고, 음성은 송신될 수 없다. 요아킴의 시체는 물론 묘지도, 관도 보지 못했다는 비탈리나의 말처럼, 영화는 죽은 요아킴에게 접근하거나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조차 수행할 수 없기 때문이다(우회적으로 그의 유령을 불러내는 것만이 가능한 시도일 뿐이다). 물리적 장소를 잃어버린 인민들, 시각적 표상을 갖추지 못한 카메라. 영화의 첫 장면이 시작하기도 전에 이 사태는 벌어졌으며 이는 되돌릴 수 없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벽과 바닥을 배경에 두고 이루어지는 연약한 독백과 텅 빈 눈동자, 그리고 그것들을 곧장 삼켜버릴 것만 같은 어둠만이 이곳에 잔존해 있다.

무엇도 볼 수 없고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비탈리나 바렐라>는 눈먼 자들의 신체를 포착한다. 하지만 그들의 비참한 신체에서 삶의 기록과 위엄을 발견하는 것만은 아니다. 페드로 코스타는 그들이 할 수 없는 것과 영화가 할 수 없는 것 사이의 긴장을 가로지르며 양자의 경계를 암흑으로 지워버린다. 비탈리나의 초점 없는 눈동자는 지속적으로 저 멀리를 바라보는데 그것이 무언지 명확하게 확인할 수 없다. 그녀는 실내의 유리창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해 투명한 표면에 머리를 부딪치고, 낡아서 부서지는 집의 잔해를 피부로 맞닥뜨린다. <페르소나>(감독 잉마르 베리만)의 도입부처럼 부드럽게 스크린을 어루만지는 손짓은 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집을 오가는 이들은 눈앞의 창틀에 시선을 던지지 못하고, 헐겁게 무너지는 지붕과 천장을 수리할 여력도 없다. 그런가 하면 이 영화에서 사제로 출연하는 벤투라는 어둠으로 물든 방 안에서 이름과 얼굴을 알 수 없는 수신자를 향해 “내 뒤에 있어. 내게 얼굴을 감추지 마”라고 말한다. 얼굴을 감추지 말라는 요구와 내 뒤에 있으라는 부탁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 벤투라에게 얼굴을 마주하는 것과 그의 뒤에 머무는 것은 동시에 성립할 수 있는 사태인가.

그들은 거주할 수 없는 장소에 거주하면서(비행기를 타고 카보베르데에서 포르투갈에 도착한 비탈리나는 “포르투갈에 네 것은 아무것도 없어. 그의 집도 네 것이 아니야”라는 말을 듣는다) 바라볼 수 없는 대상을 향해 시선을 던지고, 등 뒤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하려 한다. 눈먼 자들은 원근법을 상실한 난시적 세계의 표면 위에서 공존 불가능한 감각을 구상한다. 비탈리나의 질문을 반복해서 떠올려본다. “정말 땅속에 묻혀 있긴 한 거야?….” 당신과 나는 정말 이곳에 머물고 있는 걸까. 혹은 당신과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증거를 우리는 시각적으로 증명할 수 있을까. 장 뤽 고다르는 1944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서구의 영화가 이중의 실패를 겪었다고 말한다. 일찍이 장 르누아르의 <게임의 규칙>(1939)이나 찰리 채플린의 <위대한 독재자>(1940)가 전쟁의 비극을 예고했지만, 아무도 그들의 예시적 측면에 주목하지 않았고 끝내 영화는 직면한 홀로코스트의 참극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내지 못했다는 것이다. 고다르가 재구성한 영화의 실패는 두 가지 층위의 실패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는 보지 못했고, 카메라로 촬영하지 못했다. 역설적이지만 정확히 같은 의미에서, 모든 것을 시각적 대상으로 포획하고 영상의 기록으로 남기는 오늘날의 세계에서조차 영화는 이 이중의 실패를 반복하고 있다.

<비탈리나 바렐라>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시신을 향해 말을 건네고, 투명한 창문에 몸을 부딪치는 비탈리나의 음성과 몸짓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런 측면이다. 주체의 감각과 접속 불가능한 대상으로서의 영화. 무엇도 볼 수 없고, 그로 인해 아무것도 믿을 수 없는 상태에 노출된 영화. 우리는 그걸 제대로 주시할 수 있을까?

바이러스의 시대, 영화의 역할은 유효한가

코로나19 사태가 극장의 풍경과 영화의 조건을 뒤바꾸고 있다는 근심 어린 진단, 나아가 포스트-코로나 시대에 대한 다양한 예측과 분석이 제기되지만,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세계의 표상에 관한 검토는 상대적으로 드물게 행해지고 있다. 이는 코로나19의 확산이 영화에 미치는 현실적인 문제들과 비교하면 부차적인 주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문제 제기는 또한 역사와 관계 맺는 영상의 본질적인 측면을 겨누는 질문이다. 동시대의 역사란 영상의 체계로 구현되는 기록을 뜻하고, 영화는 이를 스크린에 투사(projection)함으로써 연대기적인 역사 인식을 넘어서는 이미지의 역사를 구축한다. 그렇다면 전염병과 바이러스의 시대에도 이러한 영화의 역할은 여전히 유효한가?

코로나19 시대의 표상은 양면적인데, 한편으로 영상은 각종 라이브 스트리밍과 실시간 동시화면을 통해 이전까지 적극적으로 가시화되지 않은 무수한 이미지와 사운드를 영상의 질서 안에 포섭하게 되었다. 그중에는 심지어 고다르가 직접 출연한 인스타그램 라이브 영상도 있다(고다르는 <젊은이의 양지>가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미소를 그토록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었던 것은 감독 조지 스티븐스가 홀로코스트를 촬영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인류는 전쟁 직후에 페니실린을 발명했다. 다른 말로, 페니실린의 발명을 위해 전쟁을 겪어내야 했다”는 언급으로 팬데믹 이후의 시야를 제공한다). 영상은 무제한적으로 범람하며, 현실의 물리적 조건으로 실천되지 못하거나 유예되었던 얼굴들의 마주침을 대체해 보여주는 공적 공간으로 기능한다. 새삼스러운 사실이지만 어느 때보다 강화된 형태로 영상은 모든 것을 보고, 기록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 모든 역량에도 불구하고 영상은 현재진행형으로 이어지는 감염과 죽음의 행렬 앞에서 정당한 이미지를 구획하지 못했다. 이는 필연적인 수순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주요한 임무는 말할 수 없는 존재들, 표상의 질서로부터 누락되어 보이지 않는 얼굴들, 사라지거나 희미한 흔적으로 남은 물질적 대상을 영상과 소리의 조합으로 스크린에 비추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영상과 소리라는 기본적인 장치의 조건이 흔들린다면? 당신의 얼굴을 마주볼 수도,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면? 코로나19는 접촉을 금지하고 대면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지금의 영화는 뉴스의 보도, 공식 발표의 숫자가 지목하지 못하는 이들에게까지 접근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바로 이 지점, 접촉과 대면이 불가능해진 자리에서 타인의 얼굴, 나아가 그들의 죽음을 표상하는 영화의 응시란 무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 고요하게 폭로되어버린다. 영화를 구축하는 장소가 격리의 공간으로 와해되는 가운데, 우리는 피사체를 응시하는 눈동자의 기능을 잃어버렸다는 사태를 뒤늦게 파악한다. 바이러스와 전염병은 영화의 환경을 뒤흔든 원인이 아니라, 응시 없는 눈동자만 남은 오늘날의 영화에 새겨진 시각의 맹점과 부조리를 가시적으로 드러내 보이는 부서진 촉매다.

샹탈 아커만의 유작 <노 홈 무비>의 한 장면은 장소 없는 영화의 눈동자를 위한 임시적 장치를 고안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커만과 그녀의 어머니가 스카이프(skype)로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다. 아커만은 카메라를 들어 모니터 위로 비친 어머니의 얼굴을 담아낸다. <비탈리나 바렐라>의 카메라와 인물의 눈동자가 눈앞의 시신을 들여다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하는 동안, 아커만은 멀리 떨어진 어머니의 얼굴을 눈으로 마주하고 카메라에 보존하려는 시도를 한다. 이 장면에서 아커만은 “세상에 거리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카메라를 들어 촬영하는 것이라고 어머니에게 말한다. 스카이프 화면에 떠오른 어머니의 얼굴과 모니터에 비친 아커만의 카메라가 평면적으로 모습을 공유하는 이 얇은 디스플레이 장치의 표면이야말로 오늘날 교환이 부재한 우리의 응시를 성립시키는 가상의 장소일 것이다. 하지만 아커만은 이 매끄러운 평면이 물리적으로 다가설 수 없는 가상의 표면임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아커만의 카메라는 모니터에 가득 떠오른 어머니의 얼굴을 더욱 가까이에서 붙잡기 위해 그 표면을 향해 다가간다. 이 순간에 낮은 화질의 질감으로 스크린에 비친 어머니의 얼굴은 형체를 확언할 수 없는 무정형의 픽셀 조각으로 붕괴되고 만다. 친밀성과 거리감의 역설적인 관계를 구조화하는 이 장면으로 아커만의 시선과 어머니의 얼굴이 공유하던 하나의 평면은 사라진다.

<비탈리나 바렐라>의 보이지 않는 유리창과 관, <노 홈 무비> 의 모니터 표면을 돌아보면서, 빅토르 셰스트룀의 <바람>(1928)에 나오는 창문을 떠올려본다. 기차를 타고 거센 바람이 흩날리는 텍사스로 찾아온 레티는 몇번이고 창문 바깥에서 펼쳐지는 모래폭풍을 쳐다본다. 레티의 눈앞에 조형되는 모래와 바람의 역동적인 운동은 유혹적이면서도 섬뜩하고, 물질적이지만 환영적이다. 레티는 이 대상을 바라보며 기묘한 불안과 매혹에 휩싸인다. 창문에 부딪히면서 자동적인 형상을 만들어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모래바람의 운동과 이를 마주하는 레티의 응시, 그리고 둘 사이를 갈라놓은 창틀이라는 벽. 그것들은 스크린을 바라보는 체험의 감각을 느슨히 은유한다. 창밖을 바라볼 때마다 눈에 과도한 힘을 주어 둥근 눈동자를 화면에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릴리언 기시의 연기는 영화를 마주한 관객의 도착적인 매혹 또는 원형으로 발광하는 영사기의 신호로 받아들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바람>에 설정된 응시의 구도는 주체와 세계, 시선과 물질을 접속하는 장치로서의 영화의 조건을 보여준다. 로베르 브레송의 말을 빌려 “시네마토그래프의 필름들은 서로 응시하는 내적 동요”의 돌연한 마주침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바람>의 구도는 영화 이미지가 생산되는 배경을 집약하고 있다. 이곳에는 실체를 완벽하게 포획할 수 없는 장구한 세계의 표상이 존재했고, 그 표상의 힘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응시의 물리적 효과가 있었으며, 양자의 충돌을 시각적으로 각인시키는 창틀이라는 지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다. <바람>의 결말에서 영화는 수직적 시각의 지지체로 형성되는 응시의 체계를 무너뜨린다. 바람의 미혹에 서서히 정신을 잃어가는 레티는 부서진 창틀을 통해 죽은 남자의 시신을 목격한다. 창문이 깨지고 응시의 자리는 유지되지 않는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레티는 열린 문으로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불길한 웃음을 짓는다. 이 결말에 이르러 <바람>은 영화가 운동의 환영을 생산하는 기계장치에 지나지 않음을 폭로하면서 동시에 그 환영의 일부가 되어버린 레티의 육체를 스크린에 정박시킨다. 스크린은 부서졌고, 이미지의 미혹은 경계를 무너뜨려 파국을 일으킨다. 이 결말이 진정 파국이라면, 그것은 어떤 특정한 주체가 직면한 파국이라기보다는 영화 매체에 주어진 징벌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레티의 눈은 영화에 당도한 부재의 조건을 바라보는 것이다.

영화라는 텅 빈 신체

영화는 같은 곳에 나란히 존재하는 나와 당신을, 한 공간의 앞과 뒤를 담아낼 수 있는가? “영화는 허구지만, 스포츠에는 진실이 있다”라고 말한 고다르는 테니스 경기의 서브와 리시브를 영화의 숏과 리버스숏의 원리에 빗대어 설명한 바 있다. 양쪽 코트에 선 두 사람이 있고, 두 사람은 라켓을 손에 쥔 채 공을 주고받는 연속된 행위를 형성한다. 두 사람간에 물리적인 접촉이 발생하는 것은 아니지만, 라켓이라는 매개를 통해 상대방이 보낸 힘의 강도를 체감하고 그에 상응하는 힘을 실어 공을 되돌려준다. 이런 물리적인 운동으로 보이지 않는 역학의 규칙이 허공을 가로지르며 네트를 왕래하는 것이다. 사각의 틀 내부에 서로 다른 두 영역이 이쪽과 저쪽에 서서 상대를 마주보며 물리적인 교환을 이루는 운동, 이것을 우리는 영화라는 규범으로 불러왔다.

매력적인 은유임이 분명하지만, 영화에서 숏의 운용이 균질한 왕복 운동에 한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확대>, 자크 타티의 <퍼레이드>에서처럼 공 없이 마임으로만 구현되는 테니스 게임의 외관이 묘사되거나, 제임스 베닝의 <풍경 자살>의 도입부 두 장면처럼 혼자 서브를 연습하는 남자의 모습과 반대편 코트에 떨어진 수많은 공이 숏/리버스숏으로 이어 붙기도 한다. 라켓과 공이 손에 붙들려 있는지 확신할 수 없고, 한쪽에서 공을 보내도 다른 한쪽은 침묵과 무관심으로 일관할 뿐인 풍경이 펼쳐지는 것이다. 이런 이미지들을 떠올려보면 테니스의 은유가 지목하는 이쪽과 저쪽의 균등한 교환이란 테마에 대단히 불분명한 측면이 내재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영화는 하나의 세계를 그린다. 그러나 그 자리에 주체의 응시가 현존하는 장소는 여전히, 혹은 언제나 불분명하다. 카메라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보지 못한다는 동어반복에 철저히 종속된다. 그러므로 영화의 눈이란 부재하는 응시의 경험을 조직하는 공간인지도 모른다. <비탈리나 바렐라>의 마지막 장면, 장대한 어둠에서 벗어난 한낮의 밝음 아래로 이웃들이 비탈리나 바렐라가 살게 될 집의 지붕을 수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순간이 과거의 기억인지, 현재인지, 미래에 꾸는 꿈인지 분간할 수 없다. 집을 짓고 수리하는 일은 언제든 발생할 수 있으며, 관객은 그들이 누구인지 마지막까지도 알아보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응시의 역량을 잃어버린 눈으로 또 하나의 벽과 천장이 건축되는 광경을 지켜볼 따름이다. 거기엔 고정된 장소를 잃고, 가상의 벽 위에 투사되는 영화라는 텅 빈 신체가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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