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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트리스] '부부의 세계' 한소희 - 지금은 그의 시대
임수연 2020-06-04

사진제공 9아토엔터테인먼트

한소희는 지금 시대를 읽을 수 있는 가장 흥미로운 이름이다. JTBC 역대 시청률 1위 기록을 경신하고 종영한 <부부의 세계>(닐슨코리아 전국 기준 28.4%)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이른바 ‘내연녀’였지만, 시청자들은 캐릭터는 욕할지언정 배우에겐 애정을 표했고 한소희는 드라마가 끝나기도 전에 스타로 떠올랐다. 그가 연기한 <부부의 세계>의 다경 역시 납작한 표현으로 정의하기엔 훨씬 복잡한 면면으로 비혼·비출산 운동이 부상한 최근 분위기를 상기시킨다. 사회적 지위가 높은 여성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가부장제라는 비극을 담은 이 드라마에서, 아버지 여 회장(이경영)의 재력 덕에 자신의 욕망을 찾아갈 수 있는 다경의 결말은 매섭게 현실적이다. 지금 반드시 관찰하고 기록해야 할 이름 최상단에 위치할 배우 한소희를 만났다. 편하게 얘기하느라 인터뷰 내내 자연스럽게 사투리가 묻어나오는 모습까지 무척 매력적이었던 그와의 만남을 꼼꼼하게 옮겼다.

-<돈꽃>이나 <백일의 낭군님>에서 연기한 여성들이 불륜 드라마의 클리셰를 벗어난 것처럼, 여다경 역시 좀 다른 캐릭터였다.

=내연관계에 있는 인물을 보면 부모의 부재라든지 가난하다든지 항상 무언가가 결핍돼 있다. 다경은 남부러울 것 없이 자랐는데 뭔가에 꽂혀서 가진 걸 다 버리고 시작한다. 클리셰를 완전히 뒤집은 상황이라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이혼 과정에서도 남자에게 매달리고 사랑을 구걸하지 않아서 캐릭터가 좀더 빛을 발한 것 같다. 다경의 결말은 현실적이면서 씁쓸하다. 시청자들 입장에서는 왜 다경이 마지막회에 벌을 더 받지 않느냐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자체가 정말 현실적이었다. 그리고 다경의 지옥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어린 나이에 아빠 없는 아이를 길러야 하고, 그 안에서 수많은 현실적인 문제와 부딪칠 거다. 자기 발로 지옥 속에 걸어들어간 거다.

-사랑을 갈구하는 다경처럼 남들은 이해하지 못하는데 어떤 것에 집착해본 경험이 있나.

=예전부터 청소에 굉장히 집착했다. 쉼터가 되는 내 자리만큼은 정말 깨끗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아직도 있다. 개인적으론 사랑에 그리 집착하는 스타일이 아니라서 다경을 이해하기 힘든 부분도 있었지만 사실 집착의 근원은 똑같다. 내가 청소를 하지 않으면 나 자신이 무너지는 것 같은 것처럼, 다경은 태오와의 관계 없이는 스스로가 무너질 것 같았던 거다.

-중간에 JTBC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지선우(김희애)-여다경 관계에 집중해달라고 말한 바 있다. 여다경이 지선우에게 가지는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졌다. 아무리 부딪쳐도 이 여자에게는 안되는구나’. 다경은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이태오를 버리고 스스로를 찾을 수 있게 된다. 태오에게 “망상에 빠진 건 나였다”라고 말하는 대사가 있는데, 그 망상에서 다경을 꺼내주려고 선우가 애를 쓴다. 선우는 자기 인생까지 내던져가며 다경을 구출해준 거다. 설정상 대립적일 수밖에 없는 두 여성이 묘한 동질감을 드러낸다는 것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현장에서는 한컷씩 따로 찍으니까 그걸 이어붙인 결과물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 방송을 보니 내가 진짜 선배님을 따라 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감정선이 비슷했다. 선배님이 연기한 초반 감정을 보고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 담아놓았던 게 있었나보다. 그런 부분도 되게 신기했다.

-<돈꽃>에서는 재벌 3세의 혼외자를 임신하고, <백일의 낭군님>의 세자빈은 아기의 친부가 친아버지 손에 죽는 걸 목격하고, <어비스>에서는 결혼을 앞두고 잠수를 탔다.‘다음에는 한소희가 멀쩡한 사랑을 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반응이 많다. (웃음)

=내 마음도 같다. 아니, 이제는 사랑을 배제하고 싶다. (웃음) 사랑 때문에 계속 뭔가를 해왔으니 이젠 그냥 우정 드라마도 하고 싶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춘도 연기하고 싶다.

-다경은 유독 표정만으로 말하는 순간이 많았다. 지문이 어떻게 씌어 있었는지, 이를 연기로 옮겨내는 과정이 어땠는지 궁금한데.

=리액션 자체가 디테일하게 씌어 있으면 그 틀 안에 배우가 갇힐 때가 있다. 작가님들이 배우들을 배려해 지문에 ‘당황’, ‘충격을 받은 듯한’ 이런 식으로 그냥 툭, 하고 던져주셨다. 가령 ‘충격’은 굉장히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고 이것이 곧 배우가 가진 숙제다. 그래야 신이 풍요로워진다. 김희애 선배님이 바다에 들어가는 연기를 보고 많이 놀랐다. 보통 사람들은 ‘슬픔’이란 감정 하나만 생각하는데 선배님은 그때 웃으면서 바다에 들어가더라. 그렇게 연기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울산예고 재학 당시 미술 전공이었다. 주변에서 배우를 해보라는 권유는 없었나.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고등학생 때는 정말 연기에 뜻이 없었다. 나는 미술로 먹고살겠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런데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서울에 올라왔을 때 미술로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그림을 잘 그린다고 생각했는데 여기엔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수백명 있었고, 그중에서도 눈에 띄게 잘 그려야 성공할 수 있었다. 2~3년간 학원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치열하게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내가 왜 서울에 왔는지도 잊고 살았다. 정작 미술은 안 하고 그렇게 허송세월하면서 미술에 대한 열정도 사라졌다. 그러다가 모델 일을 시작했다. 패션이나 표정 등 내 취향이 무엇인지 알게 해줬고, 좋아하는 것을 하면서 돈을 벌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연기를 하면서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을 느끼게 됐다.‘이 돈을 받고 제대로 못하면 진짜 쪽팔린 거다.’ 그래서 가진 것도 배운 것도 없는 내가 배우의 길에 뛰어들었다.

-데뷔 초 자신이 나오는 광고를 보면서 ‘내가 말하는 모습이 저렇게 못생겼다니’ 하며 놀랐다고.

=이 일을 막 시작했을 때 너무 어색했다.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내가 좀 예쁘지 않게 보여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연기를 할 땐 돈을 받은 만큼 제 몫을 다하지 못한 게 부끄러웠다. 미술은 내가 하는 예술이었다. 그냥 점 하나 찍어도 내가 예술이라고 생각하면 예술이 됐다. 그런데 연기는 달랐다. 아무리 백날 이게 예술이라고 우겨봤자 대중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예술이 아니다. 그러다보니 자꾸 오기가 생겼다. 인정받고 싶고 성장하고 싶었다.

-보는 입장에선 시행착오를 겪은 시기가 언제인지 가늠되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게 표정 짓는 법을 빠르게 터득한 것 같다.

=혼자 망상에 자주 빠진다. 집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고 있으면, ‘내가 지금 퇴근하고 너무 피곤하고 지친 상태인데 엄마한테 전화 한통 못한다’는 식으로 상황을 만들어 나 자신을 대입하고 감정을 끌어올린다. 그렇게 스트레스를 풀면서 연기 연습을 했다.

-개인 블로그가 다시 화제가 됐다. 닉네임을 왜 ‘정크’라고 지었나.

=미술을 할 때 ‘감정 쓰레기통’이란 의미로 썼던 닉네임이다. 그림 자체가 감정을 분출하는 과정이고 그게 쌓여서 쓰레기통이 된다고 생각했다. 사실 내가 그린 그림은 전부 자화상이다. 다리가 3개뿐인 의자를 그렸다면 그건 불안한 나 자신을 대변한다. 연기는 보다 직설적으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미술이나 연기나 상당히 다른 결을 갖고 있지만 근본적인 방향은 같은 것 같다.

-과거 사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서 세상이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고 느꼈다. 10년 전이었다면 불륜 소재 드라마에서 내연녀를 연기한 배우가 담배를 피우고 문신을 한 모습이 공개됐을 때 반응이 지금처럼 호의적이진 않았을 것 같다.

=예전에는 시장에서 돌을 맞았다고 들었다. (웃음) 과거라고 해봤자 3~4년 전이고, 그사이에 성장을 해봤자 얼마나 했겠나. 그때의 내 모습도 지금의 나처럼 인정해주는 반응을 보면서 배우 개개인을 존중해준다는 느낌을 받았다. 정말 시대가 바뀌었음을 실감한다.

-자화상을 자주 그리고, 데뷔 전 사진을 보면 자기만의 개성을 탁월하게 살릴 줄 안다. 스스로를 표현하는 방식을 잘 알던 사람이 연기자가 됐다는 점에서 새로운 카테고리의 배우의 탄생을 기대하게 하는데.

=배우에겐 여러 인생을 살아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내가 가진 결이 너무 강했을 때 한쪽으로만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도 많이 했다. 다양한 색깔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포기해야 할 부분도 생긴다. 마치 아침잠이 많은 사람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출근을 하는 것처럼. (웃음) 원래 내가 좋아하던 음악, 그림, 영화 등이 내 도화지에 너무 강한 색을 칠하려 할 때 이를 조절하게 된다. 미처 알지 못했던 내 색깔을 이 일을 하면서 발견하기도 한다. 하지만 내가 원래 가진 색을 완전히 지우지는 않았다. 그건 어쩔 수 없다. 다만 캐릭터에 맞게 변화시킬 수 있도록 부드럽게 다듬고 있다. 이건 내가 이뤄내고 싶은 지점까지 가기 위한 투자다. 그래서 지금 아주 즐겁게 일하고 있다.

-인스타그램 계정을 보면 영화 관련 포스팅이 많다.

=원색을 잘 쓰는, 색감이 강한 영화라든지 특정한 주인공이 없는 작품을 좋아한다. 프랑스영화도 즐겨 본다. 또 여성 중심 영화에 관심이 많은데, 최근에 인스타그램에 올린 영화는 <바그다드 카페>와 <니키타>다. <화양연화>처럼 정말 유명한 고전인데 아직 보지 못한 영화들도 열심히 찾아보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내 취향을 다듬기 위해 일부러 찾아보는 거다. 그리고 이 부분을 꼭 강조해줬으면 하는데, 영화를 찍고 싶다. (웃음)

TV 2020 <부부의 세계> 2019 <어비스> 2018 <옥란면옥> 2018 <백일의 낭군님> 2017 <돈꽃> 2017 <다시 만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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