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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화의 충무로 클래식]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이 연출한 전후 멜로드라마 '미망인'

전후 서울, 여성의 악전고투를 담아내다

<미망인> 제작 자매영화사 / 감독 박남옥 / 상영시간 75분 / 제작연도 1955년

영화감독 박남옥(1923~2017)은 거의 대부분 남성감독의 이름으로 구성되는 한국영화사에서 첫 번째 여성감독으로 이름을 올린 인물이다. 일제강점기 경북 하양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영화 속 배우들을 동경했고, 문학, 미술, 체육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인 만능 소녀였다. 학창 시절 최승희의 무용 공연을 보러 극장에 갔다가 교칙 위반으로 반성문을 쓰기도 했지만, 경북고녀 대표로 출전한 1938, 39년 전조선육상선수권대회의 투포환 경기에서 연달아 우승하며 학교의 이름을 날린 적도 있다. 이후 이화여전 가정과에 진학한 그는 문화예술계로의 투신을 모색하다 학교를 그만두고 미술 공부에 전념하기도 한다. 그리고 지인 소개로 일제의 국책영화사인 사단법인 조선영화사의 광희동 촬영소에 들어가 문화영화 제작을 잠시 경험하지만, 곧 대구일일신문사 문화부에 입사해 기자 생활을 하다 해방을 맞는다. 박남옥은 단지 신여성이라는 말로만 포착될 수 없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언니가 제작하고, 동생이 연출하고

해방 이듬해 박남옥은 조선영화인들이 접수한 광희동 촬영소로 다시 돌아갔다. 당시 그곳에서는 이규환 감독의 <똘똘이의 모험>(1946)이 편집 중이었는데, 그는 최인규가 연출한 <자유만세>(1946)의 후반작업에 참여하는 것으로 본격적인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 <민족의 새벽>(감독 이규환, 1947), <새로운 맹서>(감독 신경균, 1947) 등의 작업에 연이어 참가했고, 뉴스영화 촬영반으로도 서울을 누볐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가족이 흩어졌지만, 그는 국방부 정훈국 촬영대 소속으로 뉴스릴을 편집하며 영화 작업을 쉬지 않았다. 이 무렵 학창 시절부터 연모해오던 배우 김신재(1919~98)와도 가까워진다. 휴전을 앞둔 1953년 5월 극작가 이보라와 결혼했고, 1954년 6월 딸을 출산한 후 곧바로 꿈에 그리던 자신만의 영화에 착수한다.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작품으로 기록되는 <미망인>이다.

영화판으로 이끌어준 전창근 감독이 프로듀서를 맡아 든든한 조력자가 되어주었고, 남편 이보라가 전쟁 미망인이 주인공인 시나리오를 썼다. 변변한 기재도, 필름도 부족하던 시기여서 35mm가 아닌 16mm 제작을 택했다. 촬영은 일본에서 신형 16mm 카메라를 직접 들고 온 김영순이 맡았다고 한다. 주인공 신(이신자) 역으로는 그가 동경해 마지않던 배우 김신재가 출연하기로 했다가 건강에 문제가 생기는 바람에 서구적인 외모에 <악야>(감독 신상옥, 1952)의 양공주 역으로 연기력을 인정받았던 이민자(1929∼86)가 최종 출연했다. 전쟁 직후의 어려운 시기, 박남옥은 영화의 제작비를 어떻게 마련할 수 있었을까. 출판사 사모님인 둘째 언니가 선뜻 제작비를 댔고, 덕분에 영화사 이름은 ‘자매영화사’가 되었다.

6월 말 박남옥이 살던 집 근처에서 촬영을 시작한(딸 주가 골목길을 나서는 영화의 첫 장면이다) 제작 현장은 악전고투라는 말, 그 자체였다. 돌도 지나지 않은 딸을 맡길 곳이 없어 포대기에 둘러업고 촬영장에 나갔고, 15명에 달하는 스탭들의 점심을 새벽부터 장을 봐 직접 해먹이기도 했다. 타고난 건강과 육상선수 출신의 체력 덕분에 연출에만 쏟아도 모자랄 에너지를 나눌 수 있었을 것이다. 부산 가덕도의 로케이션 촬영까지 3개월 동안의 본 촬영을 천신만고 끝에 마쳤고(당시 촬영 현장에 대한 흥미로운 기록은 박남옥의 수고를 딸 이경주가 타이핑해 출판한 <박남옥: 한국 첫 여성 영화감독>에서 읽을 수 있다), 본인과 딸의 몸을 추스른 뒤 편집을 시작으로 12월부터 후반작업에 들어갔다. 후시녹음은 이미 흩어진 배우들의 제 목소리를 포기하고, 주인공 신과 사장 부인 역은 배우 유계선(전창근 감독의 부인)이, 택의 옛 애인 진(나애심)의 목소리는 홍은원(1922~99)이 맡았다. <여판사>(1962)를 연출해 한국영화사의 두 번째 여성 영화감독으로 기록되는 홍은원 역시 무척 다재다능한 인물이었다.

이 영화의 녹음은 당시 중앙청 앞에 있던 공보처 녹음실에서 진행했다. 박남옥은 연초부터 16mm에다 여자 작품을 녹음할 수 없다는 차별을 견뎌가며 끝내 영화를 완성한다. 참고로 이 영화의 필름은 1986년 공보처 영화과의 후신인 국립영화제작소로부터 한국영상자료원에 이관되었는데, 다행히 극장용 프린트를 만들고 난 16mm 네거티브(원판)필름이 그대로 그곳에 남겨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0분 넘는 분량의 마지막 롤이 없어졌고, 현재 75분 버전의 마지막 10분도 사운드가 유실되어 아쉬움이 크다.

미망인 신의 내면 풍경을 포착한 미장센

<미망인>에는 서구영화뿐만 아니라 일본영화, 조선영화를 두루 사랑했던 그의 영화적 감각과 문학, 음악, 미술 등을 가로지르는 예술적 감수성이 녹아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직접 겪은 일제 시기부터 해방기 그리고 6·25전쟁까지 한국의 근현대사가 오롯이 새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순간은 전후 재건이 막 시작된 서울 곳곳의 풍경이 비춰질 때다. 고전 할리우드 멜로드라마풍의 영화음악과 함께 서울 도심으로 들어온 카메라는, 한 소녀에게 트랙인 숏으로 다가가며 이야기를 시작한다. 소녀를 비추는 화면에는 “이웃에 이러한 미망인이 있었다. 수렁에 빠졌을 때라도 그는 해바라기였다”라는 자막이 겹쳐진다.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신은 딸의 수업료도 제때 내지 못하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일요일에는 딸아이와 오렌지주스를 사들고 소풍을 가려고 마음먹는 밝은 성격의 소유자다. 신은 가끔 남편의 친구였던 이 사장을 만나 받은 돈으로 생활한다. 사장의 부인은 신의 집을 찾아와 으름장을 놓지만, 그 역시 젊은 택을 만나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인천해수욕장에서 딸 주를 구해준 인연으로 신과 택은 사랑에 빠지고 동거하게 된다. 신은 택과의 결혼을 위해 송 서방에게 딸을 맡기고, 이 사장에게 융통한 돈으로 양장점을 차려 새롭게 출발한다. 하지만 전쟁으로 헤어졌던 옛 연인 진이 나타나 택은 떠나고, 신은 괴로워한다. 여기까지가 현재 남아 있는 장면이다. 당시 영화평에 의하면 다시 나타난 택이 직접 이별을 고하자 신이 칼을 드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리고 박남옥이 증언하는 영화의 라스트신은 딸과 같이 새롭게 출발하기 위해 신이 손수레에 이삿짐을 싣고 언덕을 내려가는 긴 장면이다.

영화는 단칸방에서 생활하는 신이 경대를 바라보는 숏을 중요하게 배치한다. 이 사장의 부인이 들이닥치기 전 그리고 사장 부인이 떠난 뒤 그가 이 사장을 만나러 가기 전의 장면이 그렇다. 신이 거울을 들여다보는 것은 딸아이를 건사해야 하는 엄마에서 자신의 욕망을 찾아가는 젊은 여성으로 전환되는 순간을 의미한다. 한편 영화는 단칸방과 양장점 등 신의 공간에서 그를 창문틀의 프레임 속에 줄곧 놓아두는데, 이같은 갇힌 구도는 신이 택과의 결합을 택했지만 욕망에 충실한 방향으로 이어지지 못할 것임을 상징한다. <미망인> 속 정교한 미장센은 콘티를 만드느라 고심을 거듭했을 박남옥의 열정과 패기를 고스란히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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