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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온라인으로 치러진 2020년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맡은 정다희 감독의 에세이

프랑스 동부지방. 푸른 하늘과 알프스산맥을 투명하게 비추는 드넓은 호수. 그 둘레에 펼쳐진 잔디밭이 끝나는 지점에 대극장이 하나 있다. 극장을 나와 가로수가 늘어선 호숫가를 따라 걷다가 아기자기한 다리를 건너면 중세의 역사를 간직한 구시가지의 골목길을 만난다. 그 길을 따라 오르막길을 오르면 애니메이션 전시가 열리는 성에 도착해 탁 트인 아름다운 안시의 경치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이곳에서 매년 6월 세계 최대 규모의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이하 안시영화제)가 열린다. 1960년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 애니메이션 부문을 독립시켜 설립한 세계 최초의 애니메이션영화제로 세계 4대 애니메이션영화제(안시, 오타와, 히로시마, 자그레브) 중 가장 역사가 깊고 권위가 있다. 단편, 장편, 졸업작품, TV & 커미션드 필름, VR 경쟁부문이 있으며 매해 특정 국가와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는 특별 상영, 진행 중인 작품의 제작 과정을 소개하는 워크 인 프로그레스(WIP), 마스터클래스, 애니메이션계의 이슈와 현안에 대해 논의하는 컨퍼런스가 소개된다. 동시에 애니메이션 산업계의 가장 큰 시장인 안시필름마켓(MIFA)이 열려 디즈니, 드림웍스 같은 대형 제작사, 각국의 스튜디오, 배급사, TV채널 등이 한번에 모여 작품의 판매와 구매, 공동제작, 피칭 프로그램이 이뤄진다. 이처럼 안시영화제는 다양한 독립 단편애니메이션과 상업 장편애니메이션을 만날 수 있어 예술성과 상업성이 공존하는 영화제로 평가받는다.

토끼! 토끼! 안시의 상징을 부르며

정다희 감독이 그린 온라인 심사 풍경.

“Lapin! Lapin!!!” “사람들이 뭐래?” 안시영화제와의 첫 만남은 2009년, 애니메이션을 공부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불어를 공부하던 시절 시작됐다. 처음 안시의 봉리우 대극장에서 단편경쟁 작품을 보던 날, 여기저기서 벌어진 기이한 광경에 어리둥절하고 즐거웠던 기억이 난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상영하는 그해의 트레일러 영상에 토끼가 등장할 때마다 관객이 목청껏 ‘라팡’(토끼)을 외쳐댔다. 의외의 순간, 의외의 장소에서 토끼들이 튀어나왔고, 연달아 토끼가 나올 때 관객은 라팡! 라팡! 라팡!을 부르짖었다. 상영을 기다리는 시간조차 그냥 흘러가지 않았다. 관객은 종이비행기를 접어 스크린쪽으로 날려보냈고 누군가의 비행기가 객석을 가로질러 무대에 안착하면 감탄의 박수가 터져나왔다. 이윽고 불이 꺼지려는 찰나 눈치게임을 하듯 관객 중 한 사람이 “어두워질 거야!”(Ça va être tout noir!)라고 외치면 다른 모든 관객이 “닥쳐!”(Ta gueule!) 하고 소리쳤다(프랑스 코미디영화 <RRRrrrr!!!>의 대사를 오마주한 것이다).

어리뻥뻥한 상황이 끝나기 무섭게 어둠이 내리자 여기저기서 입으로 내는 동물 울음소리와 물방울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애니메이션을 즐길 준비가 되었다. 영화제마다 영화를 즐기는 분위기가 다른데, 안시는 그야말로 ‘축제’였다. 마침내 화면에 펼쳐지는 각국의 다양한 단편애니메이션들. 주제와 재료의 자유로움, 새로운 기법의 시도, 은유와 움직이는 이미지의 향연…. 극장에 앉아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으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차오르는 행복감에 나는 세상에 더이상 바랄 게 없는 사람이 되어 있다. 나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광고 회사를 다니다가 내 이야기를 쓰고 싶은 마음에 직장을 관두고 프랑스로 떠났다. 파리에서 애니메이션 석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고 프랑스, 캐나다의 애니메이션 레지던시를 오가며 독립 단편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있다. 졸업 후 제작지원을 받아 완성한 첫 번째 애니메이션 <의자 위의 남자>는 칸영화제 감독주간에서 프리미어 상영 뒤 안시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단편부문 대상인 크리스털을 수상했다. 세상에 이럴 수가! 마지막에 내 이름이 호명돼 상을 받으러 무대에 올라가던 그 순간과 이후의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얼떨떨하기만 하다. 안시와의 좋은 인연은 계속되었다. 그 후로 연출한 모든 애니메이션들이 경쟁부문에 초청받았다. 인디애니페스트의 트레일러 <천 개의 불상>은 2015년 커미션드필름 부문에, 우리 삶에서 겪는 상실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를 ‘방’으로 표현한 <빈방>은 2016년 단편 경쟁부문에, 다양한 속도로 움직이는 식물, 사람, 동물의 이야기를 담은 <움직임의 사전>은 2019년 단편 경쟁부문에 초청되었다. 안시에서 프리미어 상영을 했던 <빈방>은 그 후 100여개의 국제영화제에 초청되어 또 다른 세계 4대 애니메이션영화제인 히로시마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의 그랑프리를 포함해 17개 상을 수상했다. <움직임의 사전>은 다시 한번 칸영화제의 감독주간을 거쳐 안시로 가는 여행을 했다.

안시영화제는 나에게 지속적인 후원을 아끼지 않는 든든한 은인과도 같다. 오랫동안 고심해서 만든 애니메이션을 처음으로 선보일 때 영화제의 세심한 배려가 담긴 작품 소개와 구체적이고 깊이 있는 토론, 관객의 적극적인 반응과 격려에 다음 작업을 이어나갈 힘을 얻는다. 지난해 가을에는 60주년을 맞이하는 2020년 안시영화제의 심사위원을 맡아달라는 초청장을 받았다. 한국인으로는 처음 갖는 기회였다.

시차를 생각해 잡힌 온라인 미팅

안시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온라인 사이트.

올해 안시영화제는 코로나19로 인해 6월 15일부터 30일까지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지난해 가을, 초청 편지를 받을 때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영화제에서 직접 제작한 사이트(online.annecy.org)를 통해 여러 프로그램을 선택해 볼 수 있었고 유튜브 채널을 통해 감독들이 직접 촬영해서 보낸 작품 소개 영상도 볼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심사도 온라인으로 진행했다. 나는 TV & 커미션드 필름 경쟁부문을 심사했는데, 캐나다의 애니메 이션영화제인 소메 뒤 시네마 다니마시옹(Les Sommets du cinéma d’animation)의 디렉터 마르코 드 블루아와 프랑스의 애니메이션, 만화, 비디오게임 등을 전문적으로 소개하는 아트 루디크 뮤지엄의 디렉터 디안느 로니에와 함께 심사를 했다. 둘 다 불어를 구사해 영어보다는 불어가 편안한 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움직임의 사전>

심사 과정은 순조로웠다.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폐막식을 미리 준비하기 위해 6월 초에 심사를 마쳤다. 5월 중순경 먼저 커미션드 필름 부문의 고화질 영상을 받았다. 커미션드 필름 부문은 뮤직비디오, 영화제 트레일러, 광고, 환경, 사회 및 교육 애니메이션 등 의뢰를 받아 제작한 애니메이션을 소개하는 부문이다. 이전과 비교해 가장 큰 차이 중 하나는 상영이었다. 보통 영화제에서는 딱 한번 감상하고 심사하는데 반해 이번엔 각자의 공간에서 편한 시간에 보고 싶은 애니메이션을 여러 차례 볼 수 있었다. 그간 대만, 덴마크, 일본, 캐나다 등에서 심사를 맡은 경험이 있는데, 영화제 기간 동안 만나서 자주 토론하는 오프라인 심사보다는 다소 제한된 환경이었지만 외국에서 막 도착해 시차로 인해 때때로 졸음을 참아가며 봐야 하는 상영보다는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고 평가할 수 있었다. 외국어로 대화해야 하는 나로서는 심사평과 논의할 내용도 미리 준비할 수 있었다.

<Shooom’s Odyssey>

3개국의 시차로 인해 캐나다 오전 8시, 프랑스 오후 2시, 한국 밤 9시에 웨어바이(whereby)라는 온라인 미팅 프로그램을 통해 만났고 두번에 걸쳐 1시간 정도씩 소요했다. 먼저 어떤 방식으로 진행할지 논의했다. 그리고 각자가 가장 높게 평가한 5편의 애니메이션을 꼽았다. 세명의 의견이 일치하는 작품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그런 작품이 없었다. 두명의 의견이 겹치는 작품들에 대해 평을 나누었고 한명만 선택한 작품이더라도 빼놓지 않고 구체적인 의견을 공유했다. 최종적으로 독특한 그래픽과 구성을 선보이며 다양한 기법을 환상적으로 조합한 러키 찹스의 뮤직비디오 <Traveler>를 크리스털로 선정했다.또 다른 뮤직비디오와 바다 환경 보호를 주제로 한 애니메이션이 경합하는 가운데 주제의 다양성과 중요도를 고려하여 그린피스의 <Turtle Journey>를 심사위원상으로 결정했다.

<Traveler>

커미션드 필름 부문의 심사가 끝나고 열흘 후 TV부문의 심사가 진행되었다. 넷플릭스와 같은 플랫폼의 성장으로 다른 해보다 TV부문에 좋은 작품이 많았다는 평가가 있었다. 이번에는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로 <Shooom’s Odyssey>가 크리스털로 선정되었다. 갓 태어난 아기 부엉이가 자연과 인간세계를 오가며 성장하는 30분 분량의 한편짜리 TV프로그램으로, 탁월한 구조의 시나리오, 섬세한 애니메이션 표현력, 아름다운 그래픽 등 무엇 하나 빠지는 게 없는 뛰어난 작품에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 TV시리즈의 심사위원상은 에 수여했고, TV스페셜의 심사위원상은 동화책을 원작으로 한 <The Tiger Who Came to Tea>로 결정했다. 6월 20일 온라인 폐막식을 통해 심사 결과가 발표되었고 온라인영화제는 30일까지 이어져 이용자들이 다시 한번 수상작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안시를 직접 방문하지 못했던 관객도 다양한 애니메이션과 프로그램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은 이번 영화제의 커다란 이점이었다. 반면 고심해서 만든 애니메이션을 극장에서 보여주기를 바라는 감독들은 완성한 애니메이션의 영화제 출품과 개봉을 내년으로 미루었고 그로 인해 올해 만나지 못한 작품들도 더러 있었다. 봉리우 대극장에 모여 큰 화면과 질 좋은 사운드로 애니메이션을 감상하며 토끼를 부르짖고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이 소감을 나누는 시간들이 부디 내년 안시에서 이루어지길 바란다. 드넓은 잔디밭에서 펼쳐지는 야간 상영의 순간, 별이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전율과 즐거움을 누리는, 모두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관통하는 그 순간이 안시에서 펼쳐지기를.

지원만큼이나 시장이 필요하다

한편 올해는 안시에서 한국 애니메이션들의 성과가 주목되는 해이기도 했다. 박지연 감독의 <유령들>이 단편 경쟁부문에 초청되었고 안재훈 감독의 <무녀도>가 장편 콩트르샹 부문에, 한국예술종합학교의 정해지 감독이 만든 <수라>와 한수빈 감독이 만든 <나우시아>(Nausea) 졸업작품 부문에 초청되었다. 그 가운데 <무녀도>와 <수라>가 각 부문의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한국은 국가의 제작지원 덕분에 매해 지속적으로 단편애니메이션이 제작되고 있지만, 유럽이나 캐나다와 같이 시장이 마련되거나 국가에서 법으로 정해 각 TV채널에서 단편애니메이션을 투자하거나 선구매 방영하는 방식, 지역에서 감독과 작가를 초청하여 문화환경을 풍요롭게 만드는 레지던시 등이 마련되어 있지 않아 복합적인 지원이 없는 형편이다. TV채널이나 지역의 지원은 일반 대중이 다양한 문화를 향유하고 애니메이션에 대해 깊이 이해할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제공한다. 영화에 대한 형식적, 주제적 연구와 발전을 위해 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가장 중요한 부문으로 주목하고 하나의 예술 장르로 인정받는 단편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도 아직까지 한국에서는 많이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올 수 없는 단편애니메이션의 매력적인 세계에 더 많은 관객을 초대하고 싶다.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안시영화제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고 있는 한국 애니메이션을 앞으로 한국에서 더 많이 주목하고 기대해주기를 진심으로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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