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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8 스페셜] 한국 SF영화가 성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한국 관객이 SF를 싫어한다고? <설국열차>는? <또봇>은?

<늑대소년>

오늘 내가 <씨네21>에서 받은 임무는 ‘한국 SF영화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임무는 지금까지 SF 장르에 속한 한국영화가 성공한 적이 거의 없었고 지금 그 상황이 바뀌고 있다는 전제가 깔려야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전제는 사실이 아니다. 영화로 제한한다고 해도 그렇고, 매체의 범위를 드라마나 애니메이션 시리즈로 넓힌다면 더더욱 그렇다. 이 장르에 속한 성공작은 그렇게 무시할 정도로 적지 않다.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모든 창작물에서 중요하다

일단 봉준호를 보자. 자그마치 세편의 SF영화를 만들었다. <설국열차>와 <괴물>은 모두 히트작이었다. 넷플릭스에 풀린 <옥자>의 지명도도 높다. 세편 모두 대놓고 장르성을 과시하는 작품이다.

최근 두편의 한국 좀비 콘텐츠가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연상호의 <부산행>과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이다. <부산행>은 속편인 <반도>가 대기 중이다. 그런데 조지 로메로가 창시한 모던 좀비영화는 모두 SF의 서브 장르다. 사람의 생살을 뜯어먹는 살아있는 시체가 나오지만 이들은 모두 SF 이론으로 설명되고 초자연현상이 개입되는 경우는 드물다. <킹덤>에서 배두나가 연기하는 의녀 서비는 전형적인 SF 과학자 주인공이고 언제나 과학자처럼 해답을 내놓는다. 그리고 좀비 역병으로 왕이 죽은 조선의 역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작품은 SF의 또 다른 서브 장르인 대체역사물에 속한다.

아직 끝이 아니다. 초능력자가 주인공인 <마녀>, 백두산 폭발을 다룬 <백두산>, 핵발전소 사고를 다룬 <판도라>, 제약회사가 만든 변종생물이 나오는 <연가시>, 신종조류독감이 소재인 <감기>도 있다. <승리호>의 조성희도 전에 두 차례 SF를 만들었다. <늑대소년>과 <짐승의 끝>이다. 그중 <늑대소년>은 히트작이었다.

드라마는 어떤가? 존 클루트와 일당이 편집하는 <SF 백과사전>에서 한국을 검색해보면 두편의 한국 드라마가 걸린다. <>과<별에서 온 그대>이다. <>은 대체역사물이며 대한제국을 페티시하는 퇴행적인 서브 장르의 문을 열었다. <별에서 온 그대>의 남자주인공은 외계인이다. 모두 대히트작이다. 아까 <킹덤> 이야기를 했는데, 넷플릭스엔 한국어 SF 시리즈가 하나 더 있다. 천계영의 동명 웹툰을 각색한 <좋아하면 울리는>이다. 한동안 타임슬립이 드라마 소재로 인기를 끌었다. SF다. 초능력자들도 인기 있는 소재였다. SF다. 히트작은 없었지만 로봇 주인공 드라마도 제법 나왔다. SF다. 어린이 애니메이션으로 넘어가면 <또봇>과 <바이클론즈>와 같은 작품들이 있다.

정리하자면, 한국에서는 오래전부터 꾸준히 SF 콘텐츠를 만들고 있었고 그중 상당수는 이미 히트 중이었다. <괴물>과 <>때부터 세어도 적어도 14년에 걸친 히트작의 리스트가 있고, 히트작이 아닌 작품들을 포함하면 리스트는 더 길어진다. 왜 이게 보이지 않는 걸까? 그건 소위 ‘정통 SF’에 대한 편견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미래 배경에 우주선과 로봇과 외계인이 나오고 이들을 대규모의 특수효과를 통해 구현한 영화가 아닌 작품들은 은근슬쩍 다른 장르로 분류된다. <>과 <별에서 온 그대>는 로맨스다. <백두산> <판도라> <감기> <연가시>는 재난물이다. 좀비물은 호러다. 봉준호 영화는? 봉준호 영화다.

<감기>

하지만 그러는 동안 물에 서서히 젖어가는 것처럼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과 관객은 SF의 존재와 어법을 받아들이게 된다. 이제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가상의 과학이나 과학적 가설, 비현실적인 장르적 관습을 동원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었다. 심지어 많은 사람들은 이를 새로 훈련을 받아야 할 낯선 장르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만큼 SF는 일상화되었다. 한국 관객이 SF를 싫어한다는 편견이 있고 <스타워즈>의 꾸준한 흥행 실패가 그 증거로 불려오는데, 한국은 <어벤져스> 시리즈와 <인터스텔라>가 대히트한 나라이기도 하다. 한국 관객은 SF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그냥 <스타워즈>를 싫어하는 것 같다. 그럴 수도 있지.

갑작스러운 SF의 유행처럼 보이는 지금의 현상은 때늦은 커밍아웃에 가깝다. 원래부터 꾸준히 SF를 만들어온 업계가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제 보다 정통적인, 그러니까 보다 할리우드 SF처럼 보이는 영화들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엔 대단한 기술적 불연속면이 존재하지 않는다. 80년대라면 우주공간을 날아다니는 우주선은 엄청난 할리우드 스타일의 기술적 성취였다. 사람들이 <승리호>의 우주선과 로봇들을 보고 감탄한 것은 아마 그 기억에서 비롯된 습관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이보다 훨씬 어려운 기술적 도전들을 거친 한국영화는 이미 많다. 야구하는 고릴라를 만드는 게 우주선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옛날에는 <스타워즈>에서나 가능했던 이미지들이 요새는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나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소개되는 단편영화에서도 툭하면 튀어나온다. 지금 넷플릭스에서 리메이크 중인 <고요의 바다>도 원작은 학생 단편영화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장르나 영화 기술이 아니라 상상력의 도약이다. 앞으로 나올 작품들이 대단한 SF적 상상력을 과시하는 작품인가? 그건 보기 전엔 알 수 없다. 하지만 지금 영화와 드라마를 만드는 사람들이 한국어를 쓰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몇 십년 전까지만 해도 할리우드 백인 남자들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SF 장르 공간으로 보내는 건 무시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건 지구의 미래가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구 문명에 통합되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청사진이다.

그렇다면 나의 임무로 돌아가보기로 하자. ‘한국 SF영화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도대체 무엇인가?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다. 예를 들어 보다 과학에 신경을 쓰라는 것. 과학기술만 업데이트하지 말고 사회와 가치관의 변화에도 신경을 쓰라는 것. 과학이 중요하긴 하다. 좋은 과학적 아이디어나 정확한 과학묘사가 있다면 좋을 것이다. 하지만 <스타워즈 에피소드5: 제국의 역습>이나 <블레이드 러너> 같은 영화가 고전 대접을 받는 동네에서 정확한 과학이나 독창적인 과학적 아이디어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우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사회와 가치관의 변화는 원래 다른 장르에서도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다. SF가 더 튈뿐이다.

고전에 매달리지 마라

옛날 같았다면 제발 다양한 SF의 고전을 접하라고, 이를 통해 어휘를 늘리고 무엇이 독창적이고 무엇이 진부한지 구별할 수있는 눈을 가지라고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요샌 다들 그 정도는 기본으로 하고 있지 않을까? 앞에서 말했지만, 지금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SF 장르의 작품을 많이 접하고 있으니 말이다. 한국적인 SF에 대한 요구는 어떤가. 백두산 폭발과 분단 상황이라는 지극히 한국적인 소재로 90년대 할리우드 액션영화를 맥없이 흉내내기만 한 <백두산>을 보면 그게 그렇게까지 의미 있는 소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한국 SF영화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한국영화가 성공하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인가?’ 와 크게 다르지 않다. SF는 반드시 주어진 규칙을 따라야 하는 편협하고 작은 동네가 아니다. 모든 창작자들에겐 자기만의 길이있다. 그중 일부는 성공으로 이어질 것이고 나머지는 아니겠지만 다 찍어서 붙여보기 전에는 뭐가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 장르가 주는 재료를 갖고 뭐든지 다 해보는 수밖에. 창작자가 무엇을 하면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약장수처럼 떠드는 건 별 의미가없다. 그런 게 있다면 내가 먼저 써먹었을 것이다. 그럴 시간이 있다면 이 과정 중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실패작들이 한국 SF에 미래가 없다는 증거가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데에 써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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