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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의 자리는 어디로 갔을까

[안시환 평론가의 프런트라인]

가족과 함께 <강철비2: 정상회담>을 관람했다. 초등학교 6학년 딸이 함께했다. 딸은 <강철비2: 정상회담>의 엔딩에서 한 대통령의 연설 장면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고 한다. 나는 불필요한 사족 같기도 하고, 너무 직접적인 연설에 괜히 민망하기도 했는데 말이다.

2020년 여름, 본다고 가정된 주체에 관한 에세이

2020년 여름, <반도>, <강철비2: 정상회담>(이하 <강철비2>),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하 <다만악>)를 연이어 보면서 관객으로서 내 자리를 찾지 못한 채 스크린 주위를 이리저리 겉돌았다. 스크린에 비친 세계에는 내 자리가 없었다. 우리는 흔히 관객의 자리가 스크린 바깥의 객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어쩌면 관객의 진짜 자리는 영화 속 세계 안에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여름 시즌을 겨냥한 상업영화라면 더 그럴 수밖에 없다. 마치 르네상스 원근법에서 모든 선들이 만나는 곳에 관람객의 시선을 위한 소실점이 숨겨져 있듯이, ‘본다고 가정된 주체’로서의 관객(의 시선) 역시 영화의 세계를 구조화하는 보이지 않는 힘이다. 그러니 관객은 본다고 가정된 자신과 만난다. 그런 면에서 나는 관객임에도 관객이 아닌 자였다. 비평의 자리로 고쳐 앉아 극장에서 사라진 내 자리를 바라보려 한다.

<강철비2>, 본 것과 보지 못한 것

<강철비2: 정상회담>

<강철비2>의 도입부를 보면서 <굿모닝 프레지던트>(감독 장진, 2009)가 떠올랐다. <굿모닝 프레지던트>에는 세명의 대통령이 등장한다. 한 나라를 책임지는 막중한 임무의 그들이 지만, 그들의 진짜 고민은 아주 작고 평범한 것들이다. 노후를 걱정하며 복권을 사기도 하고, TV드라마에 빠진 평범한 시청자기도 하며, 사랑의 감정에 머뭇거리기도 하고, 부부싸움 끝에 이혼을 통보하기도 한다. 알고 보면 대통령도 그리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이 영화는 꽤 귀여운 면이 있다. 다만, 그 무렵 난 사랑스러운 모습의 대통령을 보면서 키득거릴 만큼 마음이 여유롭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이었다.

이와 비슷하게 <강철비2> 역시 도입부 대부분을 대통령으로서의 공적 업무보다는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를 보여주는 데 치중한다. <강철비2>의 관객이 한 대통령(정우성)을 친근하면서도 지지할 만한 인물로 여기게 된다면, 그것은 대통령으로서의 공적 역할에서가 아니라 부인에게 알콩달콩 농을 치는 남편이자 딸에게 삥 뜯기는 아빠의 모습 덕분이다(한 대통령이 잠수함에 갇혔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기도하는 부인과 딸의 모습이 반복해서 강조되는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다). 그러니까 관객은 그가 어떤 대통령인지 제대로 알기도 전에 그를 지지하는 입장이 되고, 그렇게 눈에 콩깍지가 씐 상태로 북미 회담에 참가한 대통령을 바라본다. 이러한 방식의 인물 소개는 현실 정치에서 평범한 이웃으로 자신을 이미지 메이킹하는 정치인의 행동에 비견될 수 있다. 이제는 식상하다 못해 가식적으로 보임에도 불구하고 선거철만 되면 정치인은 시장에서 떡볶이를 사먹는 퍼포먼스를 벌인다. ‘소시민적 평범성’의 이미지가 유권자와 정치인의 거리를 좁히는 데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가끔은 떡볶이와 어묵을 앉아서 먹어야 하는지 서서 먹어야 하는지 묻는 고급진 질문으로 역효과를 내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우리가 사적인 평범함을 내세우는 정치인을 가식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다면, (그것이 효과적이라 하더라도) 사적 영역의 힘으로 공적 영역의 인물을 호감 있게 만들려는 영화적 화법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 걸까?

사적 영역을 경유해 공적 영역의 문제를 우회하는 방식은 그 이후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정치적 이슈를 영화적으로 해결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얼핏 <강철비2>는 첨예하게 대립하는 이슈를 정면으로 돌파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어떤 평자는 ‘신랄한 정치 풍자극’이라 평하고, 또 다른 평자는 ‘현실감각을 일깨우는 영화’라고 이야기한다. 그런데 당신이 진짜로 본 것이 무엇인지 떠올려보라. 과연 저런 평가를 가능하게 할 만한 것이 있었는가? 잠수함에 함께 갇힌 처지인 한 대통령, 북한 위원장(유연석), 미 대통령 스무트(앵거스 맥페이든)는 시시콜콜 대립한다. 북미간 갈등뿐만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중국과 일본의 이해관계까지 더해진다. 그 과정에서 국제정세에 대한 양우석 감독의 많은 관심이 느껴지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러한 정세 분석이 익히 알려진 정보 그 이상이 아닐뿐더러 이 작품이 ‘신랄한 정치 풍자’나 ‘현실감각을 일깨워준다’는 평가를 얻을 만큼 정치적 이슈를 뚝심 있게 돌파하는지도 의심스럽다. 이는 동일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다른 평자 사이에는 ‘본 것’에 차이가 있다는 의미다.

내가 본 것은 정치적 이슈 앞에서 우회하는 <강철비2>의 뒷모습이 전부다. 그러니까 앞서 언급한 평가들은 ‘보지 못한 것을 봤다고 느끼는’ 착시의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물론 그 반대일 수도 있다). 한반도를 둘러싼 다층적인 대립을 이식한 이 영화에서 첨예한 대립 관계인 북미가 평화협정서에 서명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도록 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강철비2>는 세 국가의 수장들이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기는 상황이 있을 뿐, (현실적으로는 더 중요한) 정치적 갈등과 대립이 어떻게 그 고비를 넘기는지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한마디로, 갑작스럽게 화해의 경지로 도약한다. 신기한 것은 <강철비2>에는 갈등이 해결되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이슈가 해결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강철비2>는 북미가 정치적 입장의 차이를 좁혀나가는 과정 대신에 그들간의 ‘사적 친밀감’이 차곡차곡 쌓이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문자 그대로) ‘화장실 유머’다. 잠수함에 갇힌 세 사람이 아옹다옹 다툴 때 세 사람의 평균 연령은 한 서른살정도 낮아 보인다. 마치 세 고등학생이 함께 배를 타고 수학여행을 가는 분위기라도 해도 좋을 정도다. 좁은 공간에서 서로 얼굴을 맞대고 ‘티키타카’ 대화를 나눌 때, 세 수장의 관계나 관객과 세 사람의 관계는 그 심리적 거리를 좁힌다.

<강철비2>는 세 사람이 당면한 정치적 이슈를 나열할 때마다 이들의 ‘퇴행적 소년 놀이’를 덧붙이면서 그 민감함을 희석화한다. 실제로 정치적 이슈가 제기될 때에는 그 바로 뒤에 순 수한 소년들의 농담 따먹기가 이어진다. 첨예한 정치적 대립이 귀여운 소년들의 기싸움으로 돌변하는 것이다. 그렇게 긴장은 이완되고 갈등은 휘발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북한을 소재로 하는 영화들, 그러니까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어쩔 수 없는 영화들이 그 대립과 갈등을 얼버무리려할 때 소년 시절의 퇴행적 놀이를 곧잘 활용한다는 사실이다. <공동경비구역 JSA>(감독 박찬욱, 2000)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대립하는 남북 군인이 소년 놀이(포르노그래피 잡지를 함께 보고, 닭싸움을 하며, 대중문화를 공유하는 등의 모습)를 통해 우정을 쌓는 과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년성으로 정치적 대립을 극복하는 장치는 낡은 방식이지만 그 효과는 여전하다.

<강철비2>는 정치적으로 해결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북미 수장이 평화협정에 서명하고, 남북 수장이 서울에서 정상회담을 여는 마술을 부린다. 보지 못한 것을 봤다고 느끼게 만들고, 해결되지 못한 것도 해결되었다고 오인하게 하는 착시효과의 영화, 그것이 <강철비2>다. 물론 그 마술은 ‘소년 시절로 퇴행한 놀이’와 그것을 통해 공적, 정치적 영역을 사적인 것으로 대체하며 만들어진 착시효과의 결과다. 원래 소년시절의 우리는 싸우면서 우정을 쌓는 법이니.

<반도>, 보이면 안되는 것

<반도>

<강철비2>를 두고 착시 효과라고 표현했지만, 이를 다른 측면에서 보면 관람객을 영화가 원하는 방식으로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강철비2>가 스크린 앞의 관객은 설득하는 데 성공하면서도 대중을 극장으로 유인하는 데 실패한 작품이라면, <반도>는 400만명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음에도 관람 이후의 관객 반응은 부정적이라는 면에서 상반된 경향을 보인다. <강철비2>의 소실점이 관객의 시선을 붙잡는 데 성공했다면, <반도>의 소실점은 관객을 작품 바깥으로 밀어내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 송경원 기자는 <반도>가 관객에게 몇 가지 강력한 심리적 동기를 제공한 채 액션과 볼거리를 보여주는 데 치중하고, 대중의 집단적 눈높이를 너무 낮게 설정한 것 등이 관객에게 “불쾌감으로 작동해 종국엔 감정적인 밀착을 방해하고 액션의 쾌감마저 관객으로부터 분리시켜버리는 결과”로 이어지고 있음을 지적한다(<씨네21> 1266호,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2>와 <반도>, 창작의 태도와 실종된 형식에 관하여’).

연상호 감독이 어떠한 패착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송경원 기자의 글로 충분하니, 이러한 패착이 발생한 원인에 대해서만 간단히 덧붙이고 싶다. 흥미로운 것은 연상호 감독의 전작인 <염력>에서도 대중은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이다. <부산행>의 흥행 성공이 연상호 감독에게 <염력>을 선물했다면, <염력>의 흥행 실패에 대한 자기 성찰이 <반도>를 낳았다. <염력>은 울퉁불퉁한 영화다. 우연히 얻은 초능력을 감당하지 못한 채 이리저리 부딪히며 도시를 날아오르는 석헌(류승룡)처럼, <염력>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영화였다. 하지만 관객은 개연성의 부족을 말하며 영화를 외면했다. 사실, <염력>은 개연성이 부족했다기보다 장르에 대한 관객의 기대를 비켜선 작품이라는 게 더 적합한 평가일 것이다(난 이 작품이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반도>는 <염력>의 흥행 실패에 대한 반작용이다. 그래서 불규칙하게 울퉁불퉁하던 표면을 매끈하게 다듬고, 몇몇의 뚜렷한 인과관계를 개연성이라며 관객에게 제시한다. 그래서 영화의 첫 장면에서 정석(강동원)이 외면했던 가족이 민정(이정현)의 가족이어야 하고, “상식 같은 소리하고 있네. 시도는 해봤냐?”라는 매형의 일침은 정석의 행동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반도>의 연상호 감독은 이러한 간단한 패턴이 관객이라는 난해한 문제를 풀 수 있는 개연성의 공식이라 믿는다. 그것은 <염력>과 상반되는 것들이다. 그럼에도 관객은 개연성이 없다고 <반도>를 비판한다. 문제의 핵심은 개연성 차원이 아니다. 송경원 기자의 지적처럼, 연상호 감독이 대중의 평균 눈높이를 너무 낮게 설정한 것도 문제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는 영화를 구조화하는 ‘낮은 눈높이로 가정된 (영화 속) 관객의 시선’이 실제 관객의 시야에 고스란히 노출된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반도>에서 관객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너무 낮은 수준으로 영화 속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의 시선)이다. 그것이 내게 <반도>가 불쾌한 이유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One more thing

<다만악>은 한번 시작한 재미난 놀이를 중단하지 못하는 아이와 닮은 영화다. 아이가 푹 빠져 있는 놀이를 끝내기 위한 방법은 하나다. 그냥 끝, 하고 끝내야 한다. 끝나기를 기다려서는 안된다. 끝내기 전에는 끝나지 않으니까 말이다. 지금 한국 누아르영화 역시 이와 유사한 상황이 아닐까. 누아르를 표방한 한국영화들은 지금 누가 더 극악할 수 있는지 경주하는 게임을 벌이는 중이다. <다만악>의 인남(황정민)은 딸과 함께 파나마로 떠나려 한다. 그런 인남 앞에 레이(이정재)가 들이닥쳐 그와 딸의 목숨을 위협한다. “이럴 필요까지 없잖아”라는 인남의 말에, 레이는 “내 손에 죽기 전에 인간들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뭔지 아나? 이럴 필요까지 없지 않느냐는 말이야”라고 답한다. 이 대화와 함께 “난 너와 관련된 인간들을 모조리 죽일 거야”라는 레이의 대사는 영화를 보고 나와서도 계속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마도 이들의 대화가, 당신이 무엇을 상상하든 더 잔혹한 세계(또는 이미지)를 관객에게 보여주고야 말겠다는 한국 누아르영화의 다짐처럼 들렸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지금의 한국 누아르영화는 이 정도까지 가겠지, 라고 생각하면 그보다 한발 더 나아간 가학적인 이미지(또는 상황)를 관객의 시야에 들이민다. 거의 강박 수준으로 ‘One more thing’을 외친다.

<다만악>을 연출하면서 홍원찬 감독 역시 이러한 생각을 한 듯하다. 실제로 그는 관객이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릴 만한 상황이 펼쳐지려 하면 컷으로 장면을 전환하거나 프레임 바깥으로 그 상황을 밀어내곤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다만악>의 ‘본다고 가정된 주체’ 역시 ‘One more thing’을 욕망하는 주체다. 영화의 사이즈에 대한 강박이 대표적이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타이의 조폭을 보라. 그들은 서사적 필요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거리에서의 총격전 등 액션의 사이즈를 키워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그 자리에 놓인다. 이 영화에대한 평가 중 가장 동의할 수 없는 것이 트랜스젠더 유이를 연기한 박정민에 대한 평가다. 희극화된 트랜스젠더의 전형성도 불편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의 연기 자체가 영화 전체의 톤을 흐트러뜨린다는 데 있다. 그래서 (유이가 아니라) 박정민이 보일 때마다 영화는 산만해진다. 전체적인 톤을 위해서라면 덜 알려진 배우를 캐스팅하는 편이 훨씬 좋았겠지만, 영화가 원하는 것은 박정민의 연기가 아니라 그의 이름과 영화를 보고 난 뒤 관객이 서로 떠들 수 있는 소소한 이야깃거리다. 좋은 배우를 아주 소모적으로 소비한다.

내가 이 영화를 보면서 탈진할 것 같은 느낌을 받은 것은 한국 누아르영화의 폭력적 수위가 어디가 끝인지 가늠할 수 없게 되었다, 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다만악>에서 관객에게 먼저 보여주는 것은 그다음에 올 더 충격적인 것을 제시하기 위한 미끼다. 영화 내에서 폭력의 강도는 점점 성장한다. 영화의 서사는 좀처럼 전진하거나 눈덩이처럼 커지지 않는 데비해, 점점 커지는 폭력의 강도가 영화의 이야기가 진전되고있다는 착각을 하게 한다. 주먹에서 칼로, 칼에서 작은 총으로, 작은 총에서 더 큰 총으로, 총에서 수류탄으로 폭력의 강도와 그 스펙터클의 수위는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다. 그렇게 우리는 (서사가 아닌) 폭력의 눈덩이 효과를 본다. 이는 누아르 계열의 한국영화가 보여준 발전 모델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한국 누아르는 <다만악>과 함께 수류탄의 단계까지 도착했다. 그래서인지 레이가 “어차피 이렇게 될 줄 알았잖아”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본다고 가정된 관객을 겨냥한 대사처럼 들렸다. 죽어야 끝나는 게임인 줄 알고 있었잖아, 라는. 지금 한국 누아르는 모두가 죽어야 끝나는 게임을 벌인다. 어쩌면 이 게임은 한국 누아르 장르의 비명(碑銘)이 세워질 때 비로소 끝나는 게임인지도 모르겠다. 그 묘지에 함께하고 싶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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