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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박소담 - 처음 만나는 자유
배동미 사진 백종헌 2020-09-03

시간이 박제된 책으로 가득 채워진 중고 서점에 오랫동안 머무는 젊은 여성. 대개의 젊은이들이 찾는 유희의 공간 대신 서점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는 이라면 80년대에 청년 시절을 보낸 이들과도 소통할 수 있을 것만 같다. <후쿠오카>의 소담(박소담)은 서점 주인인 제문(윤제문)에게 먼저 후쿠오카 여행을 제안하고, 중년세대로서 자신보다 더 많은 것들을 앞서 경험했을 제문과 자연스럽게 여행하면서 유려하게 여러 생각을 나눈다. 미련인지 기다림인지 모를 감정을 안은 채 과거 헤어진 연인의 고향인 후쿠오카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해효(권해효)까지 동참하면서 세 사람의 기묘한 여행이 시작된다. 극중 소담은 두 사람 사이를 슬그머니 빠져나와 여행 중 우연한 기회로 만나는 일본·중국 국적의 사람들과도 개방적인 자세로 소통한다. 그리고 대학 선후배 사이지만 28년간 의절한 채 살아온 해효와 제문 사이를 화해의 국면으로 이끈다. 그렇게 <후쿠오카>의 소담은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고 언제나 타인을 믿는 사람이다. 평소 배우들의 개성과 자신이 창조해낸 캐릭터를 묘하게 뒤섞는 것으로 유명한 장률 감독은 배우 박소담을 그런 사람으로 본 것 같다.

<후쿠오카>는 <검은 사제들>로 평단과 관객의 주목을 한몸에 받은 뒤 앞만 보고 달려왔던 박소담을 멈춰 세운 작품이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와 <기생충> 사이, 장률 감독의 제안을 받고 후쿠오카행 비행기에 오른 박소담은 2주간 후쿠오카에 머물며 영화를 찍었다. 학창 시절부터 그 흔한 휴학 한번 없이 달려왔고, 졸업 후에는 바로 충무로에서 활동을 시작한 탓에 그는 <후쿠오카> 전까지 4박5일 이상 여행조차 떠나본 적 없었다. 낯선 곳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극중 소담처럼 물 흐르듯이 몸을 맡기다보니 어느새 박소담은 낯선 동네가 편안하게 느껴졌고 오롯이 자기 자신이 되는 경험을 했다고 말한다. <후쿠오카>라는 작품이 그에게 어떤 활력을 주었는지는 오스카 레이스를 펼친 <기생충>부터 9월 7일 방영을 목표로 촬영 중인 tvN 드라마 <청춘기록>에 이르는 거침없는 행보가 대신 말해주고 있는 듯하다. 드라마 촬영 중 귀한 시간을 내어준 박소담은 화보 촬영 현장에서 먼저 기자에게 다가와 “우리 일만 하면 안되잖아요. 안녕하세요”라고 밝게 인사를 건넸다. <후쿠오카>의 소담이 거기에 있었다.

-장률 감독과의 두 번째 만남이다. 이번 <후쿠오카>에서는 제문과 여행을 간 소담이 그곳에 있는 중고 서점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이 마치 환상처럼 등장한다. <군산: 거위를 노래하다>(<이하 <군산>)의 주은(박소담)이 가지고 놀던 일본 인형을 껴안고 주은이 부르던 일본 노래를 똑같이 부르는데, 전작의 캐릭터와 묘하게 이어진다.

=장률 감독님은 구체적으로 디렉팅해서 배우의 생각을 가둬놓는 스타일이 아니다. 노래 장면에 대해 처음부터 여쭤봤는데 “일단 해보라”고 답하셨다. 신기하게 현장에 들어가서 연기를 하다보니 감독님이 <군산>을 찍을 때부터 <후쿠오카>를 같이 생각하고 주은과 소담이란 연결고리를 갖고 계셨구나 싶었고 묘하게 설득이 됐다.

-서점 손님과 주인의 관계를 맺고 있던 20대 초반 여성과 중년 남성이 불현듯 함께 여행을 떠난다는 건 영화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설정은 아니다. “후쿠오카에 가자”고 먼저 제안하는 소담의 마음은 어떤 것이었을까.

=소담과 제문이 어떤 공간으로 순간이동하는 느낌이라고 생각했다. 둘 사이에 엄청난 전사가 있고 계획적으로 후쿠오카에 갔다기보다, 그저 두 인물이 머무르는 공간이 바뀐 것이라고 할까. 감독님께서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보다 눈앞에 놓인 이 상황에 적응하면 된다고 말씀해주셨다.

-후쿠오카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해효와 그의 후배 제문이 과거에 얽힌 사연을 얘기하는 사이, 소담은 후쿠오카 시내를 홀로 배회한다. 한국어를 쓰면서도 중국인, 일본인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소담의 모습이 인상적인 한편, 이국의 공간에 홀로 놓인 배우 박소담의 모습을 관찰하는 즐거움도 있더라.

=실제로 여행을 4박5일 이상 가본 적이 없다. 해외에 2주간 머무르는 것도 <후쿠오카> 촬영을 통해 처음 경험했다. 촬영 장소와 숙소가 가까운 위치에 있어서 산책을 자주 했는데, 혼자 장도 보고 커피도 사 먹고 산책도 하고, 그렇게 5일 정도 보내고 나니 내가 정말로 이 동네에 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낯선 공간에서 배역에 어떻게 적응해야 하나 처음에는 고민이 많았지만, 서서히 후쿠오카라는 도시에 익숙해지는 과정에서 모든 것이 물 흐르듯 진행되었던 것 같다.

-장률 감독의 영화에 계속해서 출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와의 작업이 배우 박소담에게 어떤 열정을 불러일으키나.

=그 질문을 박해일 선배님에게 드린 적 있다. 선배님은 “같이해보면 딱 안다”면서 “장률 감독님의 현장은 너무 기대되는 현장”이라고 하셨다. 박해일 선배님의 말처럼 장률 감독님의 현장은 어떤 장면에서 배우들이 만나 어떤 시너지 효과를 낼 건지에 대한 기대감이 커지게끔 하는 힘이 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감독님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묘하게 작품에 빠져들고 설득당한다. 장률 감독님의 영화는 처음 볼 땐 기묘하고 낯설지 몰라도 다 보고 나면 계속 생각나고, 또 다른 상상을 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다.

-지금 한창 촬영 중인 tvN 드라마 <청춘기록>에서는 어떤 역할을 맡았나.

=배우 지망생 사혜준(박보검)을 덕질하는 26살 메이크업 아티스트 안정화를 연기한다. 대기업을 다니다가 20대 중반에 시원하게 사표를 내고 자기 꿈을 찾아 메이크업 숍 막내로 들어간 인물이다. 숍에 막내로 들어갈 나이는 아닌데, 그만큼 자기가 하고자 하는 욕심과 꿈이 명확하고, 그걸 100% 실천하는 캐릭터다. 대본을 읽었을 때부터 극중 캐릭터가 나와 공통점이 많은 것 같아 꼭 하고 싶었다.

-<검은 사제들> 이후 충무로에서 떠오르는 스타가 됐을 때도 드라마를 통해 꾸준히 안방극장을 찾아갔다. <기생충> 이후에도 역시 드라마로 복귀한다. 대중의 눈높이에서 작품 밸런스를 잘 맞추는 것 같다.

=좋은 감독님과 작가님, 흥미로운 소재가 다가오면 하게 되는 것 같다. 특별한 기준은 없고 작품마다 같이하는 사람들을 가장 많이 중요하게 생각한다. 같이 호흡하는 감독과 배우들이 주는 힘이 어마어마하다.

-동료의 힘을 처음 느낀 작품은 무엇인가.

=<베테랑> 때부터. 조태오(유아인)의 술자리 신에 등장하는 ‘앳된 막내’란 캐릭터는 대사도 없는 작은 역할이었는데, 류승완 감독님과 배우 선배님들이 많이 챙겨주셨다. 작은 술자리까지 다 연락해서 불러주시고 미스 봉으로 출연한 장윤주 선배님은 결혼식에도 초대해주셨다. 정말 작은 역할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복이 많다고 느꼈고 그때 선배들이 준 에너지가 정말 크게 다가왔다. <검은 사제들>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연기상을 받았을 당시 류승완 감독님이 단상 아래에서 축하한다며 손가락으로 따봉 사진을 찍어서 보내주시기도 했다. 그런 소중한 인연들이 23살이란 어린 나이부터 계속 이어져왔다.

-<기생충> 이야기도 해보자. 촬영 당시 완벽하게 동선을 짜고 슛에 들어가서 한번에 어려운 장면을 만들어냈을 때 쾌감을 느꼈다고 말했는데, ‘제시카 송’장면을 찍으면서 비슷한 쾌감이 있었나.

=사실 제시카 송 가사는 <기생충> 촬영을 준비하면서 제일 처음 외운 대사였다. 문장이 아니라 단어들의 연속이어서 가장 먼저 외워야 했다. 촬영 당시에는 현장에서 막상 (최)우식 오빠와 얼굴을 마주보자 열심히 외우는 모습이 웃겨서 웃음이 터졌다. 현장 스탭들도 같이 웃었다. ‘관객이 제시카 송 장면을 많이 좋아하는구나’ 하고 처음 느낀 건 칸국제영화제(이하 칸영화제)에서였다. 촬영 당시에는 기우와 기정 남매가 박 사장 집에 들어가기 위해 그렇게까지 준비하고 있고,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인 우리의 분위기가 웃겼다면, 칸영화제에서는 언어가 완전 다른 관객이 그 결과물을 보고 같이 웃어줬던 거다. 관객이 박수를 치며 웃는 걸 보고 지금 우리가 함께 <기생충>에 빠져들고 있다는 걸 온몸으로 느낄 수 있어 정말 감격스러웠다. 통했구나 싶었고, 다행이다 싶었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구나 했다.

-2015년 초 <씨네21>이 ‘라이징 스타’로 선정했다. 그로부터 5년이 흐른 현재 영화, 연극, 드라마까지 총 20편이 넘는 작품에 출연했다. 지치지 않는 비법이 뭔가.

=2015년 이후에 한번 지쳐서 1년 정도 쉰 적이 있다. 그때 장률 감독님의 <군산>을 찍었다. 지치지 않는 법을 나도 좀 알고 싶다. (웃음) 4년 동안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연기과를 쭉 다니고 23살 때 바로 졸업한 뒤 너무나 운 좋게 바로 일하게 됐다. 달려나가는 건 잘하고 있었는데 되돌아보고 쉬는 법은 아예 몰랐던 것 같다. 어느새 내가 사람들을 만나면 “뭐하면서 쉬어?”라는 질문을 많이 하더라. 계속해서 해나가려면 잘 쉬고 잘 충전하는 게 중요한데…. 사실 내가 이렇게 다작을 한 줄도 몰랐다. (웃음) 연극도 계속하고 영화와 드라마도 계속해서 작품이 많이 쌓인 것 같다.

-장률 감독이 배우 박소담을 “연기를 위해서 이 세상에 온 사람”이라 칭했다. <검은 사제들>에서 여러 언어로 서로 다른 목소리를 내며 자유자재로 빙의연기를 펼치기도 했다. 연기에 있어 본인만의 비법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현장에 적응하려고 노력한다. 영화 촬영 현장에서는 대본을 읽으며 상상했던 공간들을 실제로 마주하게 된다. 공간과 같이 연기하는 배우들에 빨리 익숙해지면 어느 순간 저절로 그 배역이 되어가는 걸 느낀다. 촬영 초반에는 배우 박소담으로서 배역을 해내려고 노력하다가 어느 순간이 지나면 딱 그 배역과 만나는 느낌이 드는 순간이 있다

-개봉을 준비 중인 <특송>으로 하고 싶어 했던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

=내가 연기하는 장은하는 우체국에서 배송해주지 않는 모든 걸 빠르게 배달하는 인물이다. 어쩌다보니 챙겨야 하는 아이가 생겼고, 그 아이를 챙기다보니 싸움을 하게 된다. 싸우길 훈련받은 인물이라기보다 상황에 적응해가면서 필사적으로 싸우는 인물이다. 맞기도 많이 맞고 악에 받쳐서 싸우는 순간들이 많았다. 해보니 너무 재밌고, 또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희열도 있었다. 대사 연기를 모니터로 보는 건 무척 쑥스러운데 액션 연기를 하고 나서 모니터링하는 건 정말 재밌었다. 내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화면엔 어떻게 나오는지 계속 보게 되더라. 전에 없을 만큼 모니터링을 많이 했다.

-액션의 꿈은 이뤘고, 앞으로 더 도전해보고 싶은 역할은 무엇인가.

=역할…. (곰곰이 고민하더니) 나이를 먹어가면서 거기에 맞는 역할을 하고 싶다. 올해 딱 서른이 됐는데 크게 달라진 건 없는 것 같지만, 30대 중반이 할 수 있는 무게감 있는 역할이 있는 것 같다. <청춘기록> 안길호 감독님의 전작인 <비밀의 숲>같이 무게감 있는 작품에서 전문직 여성을 연기해보고 싶다. 사실 전문직 여성 캐릭터를 제대로 맡아본 적이 없는데 꼭 연기해보고 싶다.

-장률 감독이 박소담 배우가 술을 잘 마신다고 하더라. 술도 잘 마시고 성격도 좋고, 과 대표로서의 면모가 어디 가지 않은 것 같다. 학창 시절 매우 주도적인 학생이었을 것 같은데.

=정말 많이 주도적이었다. (웃음) 수업 시간에 동기들이 떠들거나 하면 잔소리하는 과 대표였다. 그러면 동기들이 “오늘도 소담이한테 혼났다”고 농담했다. 아직도 동기들과 만나면 그런 농담을 하곤 한다. 일부러 그런건 아닌데 4년 동안 쉬지 않고 혼자 ‘칼졸업’했다. 다들 독하다고 했다. 나는 즐거워서 연기하다보니 졸업할 때가 되어서 졸업한 거였다. 졸업까지 크게 어렵지 않았다. 후회되는 게 한 가지 있다면 20대 초반에 여행을 못 가고 학교에만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졸업이 크게 어렵지 않았다. (웃음)

-마지막으로 미국 아카데미협회 회원이 된 걸 축하한다. 회원이 되면 축전이나 가입증서 같은 게 날아오나.

=뭐가 날아오긴 한다. (웃음) 메일로 연락이 오고 회원 가입도 해야 한다. 시상식에 영향을 미칠 투표나 그런 것까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시상식 즈음해서 한번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다. (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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